기독교교리-하나님의 형상(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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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 1장 26-28절(구약 2쪽)
설교제목: 기독교교리-하나님의 형상(인간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 사람과 서로를 향해 크게 미소 짓고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서로 인사 나누고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무무”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철학자 강신주 분이 쓰신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라는 책에서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재인용하여 들려드리겠습니다.
비록 벙어리이지만 누구보다도 힘이 장사였던 (농노) 게라심은 같은 처지에 있던 타티야나에게 연심을 품었을 때, 여지주는 위기가 닥친 것을 직감한다.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지키려는 순간, 충직했던 게라심은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게 될 테니까. 이건 노예를 가진 주인의 입장에서는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지주가 서둘러 타티야나를 다른 농노에게 시집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으로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게라심은 슬픔과 당혹감에 젖어들었지만, 금방 체념하고 만다. 그래, 농노에게 사랑은 사치일 뿐, 게라심은 이렇게 자조했을 것이다. 여지주의 첫 번째 시도는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박한 농노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부정당하는 불쾌한 느낌을 어떻게 쉽게 잊겠는가. 이렇게 상심에 빠져 있을 때, 게라심은 우연히 강가 진흙 펄에 빠져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구하게 된다. 강아지가 버둥대는 모습에서 농노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게라심은 불쌍한 강아지를 숙소로 데려와 정성을 다해 기르는 것이다. 타티야나라는 여자를, 그러니까 사랑을 상실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게라심은 강아지에게 ‘무무’라는 이름을 붙이며 온갖 애정을 쏟는다. 아마 인간이 아닌 동물을 사랑한다면, 여지주도 뭐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판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지주는 이번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여지주의 본능적인 주인 의식은 위기를 놓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째든 농노는 감정의 주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라심이 방심한 것이다. 아니, 너무 순진했다. 주인은 노예가 자기만의 감정을 갖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라는 진실, 그래서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일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티야나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던 것과 달리 여지주는 무무를 아예 죽이려고 든다. 농노라는 이유로 타티야나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는 지주에게 하물며 무무와 같은 말 못하는 짐승을 죽이는 일쯤이야 어찌 삼갈 일이겠는가. 무무를 너무나 아꼈던 게라심은 무무가 여지주의 손에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농노의 신분으로 무무를 지켜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라심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지주라면 그의 소유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법이니까.
마침내 게라심은 본인이 직접 무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자신을 그렇게도 따르던 무무를 위한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은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무무’에서 가장 서글픈 장면이 이렇게 펼쳐진다.
마침내 게라심은 몸을 쭉 펴고는 어떤 병적인 분노의 표정을 지은 채 자기가 가져온 벽돌을 노끈으로 서둘러 묶고는, 올가미를 만들어서 무무의 목에 걸고 무무를 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무를 바라보았다. 무무는 무서워하지 않고 신뢰의 눈빛으로 게라심을 바라보며 작은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게라심은 얼굴을 돌리고 나서 실눈을 뜨고는 두 손을 폈다. 게라심은 물에 떨어지면서 무무가 낸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철썩’ 하고 튀어 오른 둔탁한 물소리도, 다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에게는 가장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지나간 것이다. 마치 가장 고요한 어떤 밤이 우리에게는 전혀 고요하지 않을 수 있듯이.
철학자 강신주의 그의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스피노자가 말한 ‘비루함’이라는 감정을 소개합니다.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비루함은 슬픔 때문에 자기에게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비루함의 감정이 짙게 베여진 이야가 앞서 소개해드린 투르게네프의 ‘무무’라는 단편소설입니다.
어떠십니까? 비루함이라는 감정이 소개해드린 이야기를 통해 가까이 와 닿으십니까? 저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접하고 그 낯설게 보이는 비루함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힐 정도로 생생각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게라심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안타까운 무무 죽음을 바라볼 때, 더욱더 그러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오늘 다룰 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이른바 신론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늘부터는 인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제게 주어진 나머지 시간을 통해 기독교교리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인간론 첫 시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앞서 소개해드린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모습 곧 비루함을 가진 존재로써의 인간을 생각합니다. 다시 스피노자의 정의를 빌려오면, ‘비루함은 자기에게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비루한 것이 아닌데, 비루하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팔백십사만오천육십분의 일(8,145,060의 1)의 확률을 아십니까?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로또 1등이 당첨될 확률입니다. 쉽게 말하면,한 주에 로또 800만장이 팔리면 그 중에 1개가 당첨될 확률입니다. 그렇다면 100조분의 1의 확률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확률입니다. 평생 남자와 여자가 생산해는 정자와 난자 수를 통해 계산한 확률입니다. 물론 체감상으로는 로또 당첨보다 인간이 태어날 확률이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요. 사실은 정자와 난자 수를 놓고 계산하자면, 로또 1등을 천만번 연속으로 당첨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인간이 태어날 확률입니다.
그렇게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은 존재의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기에 저는 그것을 비루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관통하는 단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양극화, 청년실업, 노년빈곤, 출산율감소, 갑질, 헬조선 등등’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이고 우리를 비루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우리가 비루한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성경본문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에 갇혀서 살지만, 그것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또는 그것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는 반복하지만 결코 본래 비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존귀하고 특별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특별히 구약성경 창세기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본래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은 이집트에 노예생활하던 히브리인들 또는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어도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이 말씀은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변화시키도록 이끄는 말씀이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인간을 비루한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고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음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삶으로 변화를 이루어가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져 왔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정답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각 시대의 상황 속에서 재해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전에 보았던 삼위일체 교리나 하나님의 뜻에 관한 섭리론이나 하나님을 변호하는 신정론과 같은 교리들을 통해 보았듯이 교리라는 것이 꼭 불변하는 정답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이전 시대의 한계를 보완하고 새롭게 재해석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이야기도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초대기독교 약 2세기 무렵에는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형상과 모양을 구분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상은 형태적 유사성을 모양은 영원성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형태와 존재가 닮은 것을 말하는데, 타락하기 전 인간은 하나님과 닮은 모양이었고 영원히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은 하나님과 닮은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타락으로 영원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구원을 받으면 영원성을 회복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가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모양과 형상이라는 말이 사실은 수사법임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뜻을 강조하는데,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의미의 단어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6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우리가 죄로 인해서 이러한 특별한 존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음을 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인 것으로 봅니다. 앞선 내용들은 잊어버려도 이 내용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관해 현대의 신학자들은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음을 뜻한다고 답한다는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형상 또는 모양에 관하여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깐 무어라도 딱 꼬집을 순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본래 인간에게 모두 들어 있는데, 그것이 죄로 인해서 훼손되거나 없어져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혼자서 존재하지 않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웃들과 교제하는 할 수 있는 것 또는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잖아요. 사실 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지닌 사람인데, 그러한 사람들이 더불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죠.
그래서 한 때, 책 제목중에 그런 것이 있었는데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서로 다른 별에선 온 것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만나고 교제하는 일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책이죠. 또 그것을 위해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책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우리가 함께 모여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매우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지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도 사실은 쉽게 이해되어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써의 우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과거의 의미부터 설명하느라 복잡하고 긴 얘기가 되어버렸는데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맺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그 형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계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이 모세와 만나시는 장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곳에서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십니다. 이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이 서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통성명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지요. 그외도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리심과 더불어 자신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는 나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너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앞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쩌면 비루함일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써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함으로 생겨난 것이죠. 본래 우리는 비루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특별한 존재인데, 그것을 나에만 적용하다보니까요. 쉽게 타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상황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대우를 받지 못하죠. 그보다 더 일찍이 이집트에 노예생활하던 히브리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대우를 받지 못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비루한 인생을 건져주시고 그들을 압제한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하게 된 것은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지 못한 삶에 따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나 뿐만 아니라 너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또 그러한 삶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것입니다.
셋째로 결국 인간의 죄도 관계성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꼭 우리가 어떤 나쁜 짓을 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이 창조세계와의 관계가 무너진 것에 따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또 이웃과 창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원죄를 불러온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고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창조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경은 최초의 살인을 기록하는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이 결국은 관계성의 문제에서 비롯됨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관계를 맺고 살아야하고 그렇게 살아감을 통해 안정과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관계의 방식이 죄로 인해서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분명 우리 모두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희망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가 죄로 인해서 곤란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놓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할지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관계이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다음은 이웃과 창조세계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이루는 것이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이 얘기만 하고 마치려 합니다. 일전에 담임목사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셨는데요. 저도 근래에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이것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한성열 명예교수님의 이야기인데요. 행복에 관해 이뤄진 여러 연구들 중에서 주목할만한 중요한 연구가 있는데요.
1930년대 후반에 하버드 대학에서 이뤄진 연구가 그것인데요. 하버드 대학 출신의 300명을 대상으로 약 80여년간 추적 연구를 했는데요. 이 연구는 어떻게 해야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연구였는데요. 흔히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건강, 학력, 재력 등을 생각할 수 있을텐데요. 하버드 대학에서 한 연구는 그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임을 말해주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하버드 대학 출신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엘리트에 속하는 이들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낼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오랜 기간 추적연구를 하니 모두가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그리고 성공한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특징이 앞서 말한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에 있었다고 해요. 후에 이 연구는 확장되어서 하버드 대학 출신과는 반대 급부에 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기도 했는데요. 결과는 동일하게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이 성공한 이들에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에 관해서 앞서 언급한 한성열 교수님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친밀한 인간 관계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잘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의사소통을 잘한다는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는 대화가 두 가지의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요. 하나는 머리로 하는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하는 대화인데요. 머리로 하는 대화는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대화이고요. 가슴으로 하는 대화는 마음과 감정을 나누는 대화에요. 그래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대화를 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가슴으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도 대화의 방식의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하는데요. 대화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가 있고 너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가 있다고 해요. 그러니까 대화를 하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화를 하면서 다른 사람 얘기를 듣는 대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밀한 대화를 잘 한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알아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길이 됩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도 되고요.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결국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성이라고 했는데, 이 관계성을 잘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것 또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그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렇게 하나님과 타자와의 관계를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고 그 마음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대화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잠깐 같이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인생이 결코 비루하지 않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먼저 그 소리를 듣는 대화를 하는 우리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기도 하며 나아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