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주일1-2부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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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5:22-23(신약 308쪽)
설교제목 : 성령의 열매
Galatians 5:22–23 N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익숙해졌기를 바랍니다. 우리 서로를 향하여, 미소띤 얼굴로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로 인사후
감사합니다.
제가 찾아보니깐, 작년 5월에 우리가 약 한 달간 24시간 릴레이기도를 했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이 과정에 저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는데요. 우리 성도분들께서는 이 릴레이기도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저는 이 기도회를 시작할 때 매우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은 무리수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제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은 그 릴레이 기도가 24시간이란 것이었습니다.
이는 새벽 1시부터 5시까지도 릴레이기도 시간에 포함됨을 말합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기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기도하도록 만든 것은 큰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는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었고, 평일에 시간을 내서 기도할 수 있는 분들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요. 아마도 새벽 1시부터 5시까지의 그 기도시간이 없었더라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이 일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행하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저의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주어진 일정표에 맞춰서 이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꽤 고생을 하신 분들도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은 훨씬 더 부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예상을 훨씬 웃도는 상황에 저는 꽤 놀랐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 일은 성공적으로 마쳐졌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좀 이견이 있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잖은 자극을 준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후에 릴레이기도회가 마무리되고 담임목사님과 이 일에 관하여 얘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제가 이 일에 관하여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저의 표정과 행동이 사실은 그것을 애초부터 숨기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담임목사님이 짐작하고 있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담임목사님은 제가 이 일에 부담을 갖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이 사실은 담임목사님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면 목회적으로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는 것임을 얘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추진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무렵에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 편성을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는데,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 일을 순조롭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길었던 코로나의 여파로 다들 동역장을 내려놓겠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뤘고, 공동체 모임도 오랜 기간 침체가 되어 이 일을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24시간 릴레이 기도회를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얘기를 덧붙이셨는데요. 만약 이 일이 저의 생각처럼 잘 되지 못했을 때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이 일이 잘 되었을 때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분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지를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만약 우리가 릴레이기도를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했을 것이고, 반대로 이 일이 계획대로 진행됨을 통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저 교인들 기도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또는 영적회복을 이루기위한 목회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아, 담임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제가 성령 하나님에 관해 참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경험과 생각보다 더 뛰어나시고 나의 기대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분인데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않았구나 혹은 그것을 내가 온전히 믿고 있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러한 고민의 지점이 요사이 몇 주간을 통해 나눴던 성령에 관한 연속 설교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여전히 공부를 하면서도 성령 하나님을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은 깊고 넓으신 분인데요. 그래도 공부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저는 신앙에 있어서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이 참 와 닿습니다. 20세기 스위스의 유명한 의사이며 심리학자이고 작가인 폴 투르니에의 말입니다. “사람이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결혼이야 당연히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확신이나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그런 점에서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을 고백하게 됩니다. 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좀 있습니다. 앞서 릴레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도 그러했지만, 제가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모습을 통해 생각합니다. 제 컴퓨터에는 오래된 메모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목사님 정리 좀 그만하세요. STOP’이 그것입니다. 사실 저는 정리정돈에 관해 약간 병적인 증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깔끔함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 삶을 좀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좀 정상이 아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제 컴퓨터나 제 외장하드 또는 제 클라우드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저는 거기에 담긴 자료들을 자주 정리합니다. 항목별로 날짜별로 각각의 파일에 이름까지 신경써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설교한 내용을 성경 66권에 따른 폴더로 만들어서 각 책에 각 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날짜와 해당예배와 교회순서로 이름을 써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것 오랜 시간 축적되어서 만들어진 자료이긴 하지만 초창기에 이것을 만들 때, 성경책 66권의 폴더를 만들고 또 그 각 권에 따른 각 장의 폴더를 만들고 이런식으로 분류하고 정리하기를 오랜 시간 해야했습니다. 이정도면 제가 분명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바쁜 일정에서 자료가 때로는 뭉탱이로 쌓일 때가 있는데, 그것을 또 시간을 내서 분류하고 정리합니다. 그건 사무실의 제 컴퓨터 바탕화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일찍이 저의 이러한 성향을 간파한 담임목사님은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전 목사님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요. 그것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목회가 힘들어질 수 있어요.’ 저는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크게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해할뻔 했지만, 담임목사님의 진심은 통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큰 문제라는 사실을 머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앞서 얘기한 24시간 릴레이기도가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일을 역시 제 안에 있는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분석하고 그에 따라 행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껏 그렇게 해서 나름 잘 사역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협하거나 그 일에 문제가 될만한 변수들을 많이 고려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라도 일을 제대로 하자는 주의인데, 그러다보니 제 기준에서 수용되는 일은 괜찮지만 그 기준을 넘어서는 일에 관해서는 쉽게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릴레이기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몰랐는데, 제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주님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보다 또는 그 능력에 힘입기 보다 오히려 제 경험과 판단에 더 많은 것들을 의존해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 신앙과 관계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없고 그렇게 하는 신앙생활은 사실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의 뜻과 의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를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애초부터 나를 의지하여 할 수 없는 것이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그것을 자주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가 판단하기로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아니 정확히는 내가 생각해보니 그건 이렇고 저렇다’라고 내 기준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이면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고, 어디서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저는 이제껏 제 멋대로 제가 다 계획세우고 저 혼자서 다 시물레이션 하고 마지막에 아주 작은 불안감을 달래고 나머지를 성령 하나님께 맡겨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적당히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고도 그것을 사역이라고 그것을 주님의 일이라고 포장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나서요. 저는 저의 판단을 의지하지 않으려 합니다. 최대한 저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저를 내어놓으려는 노력을 해봅니다. 사실 참 어렵습니다. 불쑥불쑥 저의 생각이 올라오고 저는 여전히 어떤 문제나 사안을 저의 좁은 생각 안에서 쉽게 판단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올 해 2월 청소년부와 청년부와 연합해서 준비한 ‘찬양의 밤’ 행사 때가 그러했습니다.
처음에 이 행사에 관한 기획과 내용을 접하면서 이건 너무 무리한 계획이 아니냐고 저는 감히 학생들과 청년들을 핍박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할 때 그 행사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기대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 행사는 주로 청소년과 청년을 타겟으로 하여서 익산 주변에 있는 교회들을 초청하여 함께 집회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은 약 1달이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 생각해도 이것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격하게 이 부분에 관해서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는지 아십니까? 이번에도 저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 오히려 예상보다 많은 다른 교회 분들이 방문을 해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게도 흠이 많은데, 저는 자꾸 그것을 의지하려는 버릇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상태를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말씀인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Galatians 5:17 NKRV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서로 싸우는 과정을 겪게 됨을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것은 영혼과 육체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고 싸움입니다. 내가 나의 뜻에 지배되는 것이 육체의 소육을 따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에 쫓을 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지 그것이 중요해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끝임없이 갈등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할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싸움에서 결코 나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앞서 제가 예측하고 제가 생각한 모든 것들이 틀린 것 또는 그것이 예상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사건 곧 저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떤 것이 더 옳은 길인지 압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다시금 오늘 성경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Galatians 5:22–23 N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성령의 열매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흔히 이것을 성령의 9가지 열매라고 말하는데요. 사실은 원어인 헬라어로보면 여기서 열매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헬라어로 열매를 ‘카르포스’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열매라는 단어를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가 아니라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다만, 그 사랑은 9가지 곧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서 성령의 열매 곧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사랑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이 말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언제가 제가 얘기를 한 것도 같은데요. 저에게 이 사랑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에 이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임을 압니다. 그래서 잠깐 그 얘기를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본래부터 저는 목사를 꿈꿔온 사람은 아닙니다.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것이 무척 재밌다고 느껴 대학원까지 진학을 한 저였는데, 대학원에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신학공부를 재미로만 계속할 수는 없을텐데, 목회자로 결단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기로에 서게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목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아주 익숙한 이야기가 전혀 새롭게 다가 오기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계명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에 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얘기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또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이루는 것임을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그것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안에 크게 다가와서 바로 목사의 일이 그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그것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일을 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참 좋은 일이고 멋있는 일이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목사만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가 또한 그 일을 하는 사람임을 새삼 생각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열심히 달려온 결과로 목사가 되었는데, 막상 제 삶에서 그와 같은 사랑의 흔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데로 저는 성령에 인도함을 받기 보다 저의 생각과 판단을 더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보자면 내 안에 사랑이 부재함을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이 열매맺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분들은 어떠십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저는 연속된 성령의 관한 이야기가 이것을 돌아보고 또 이것을 깨닫는 것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국 사랑을 실천함으로 나타나야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지적으로 막 사랑해야지 한다고 되는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대체 어떻게 의지적으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가능하기나 한 명령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방법을 일러주는데요. 같이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목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John 15:1–5 NKRV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절과 5절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힘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사랑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머물고 그분을 통해서 사랑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폴 투니에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반복하자면, “사람이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처럼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사랑 가운데 살게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성령의 열매 맺게 합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분들께서는 주님께 속하여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이 말씀을 놓고 잠깐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성령의 열매맺는 삶을 이루게 해달라고 이를 놓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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