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하나님

주일1-2부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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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2:1-4(신약 187쪽)
설교제목 : 성령 하나님
Acts 2:1–4 NKRV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지난 월요일에 담임목사님은 안식월로 미국으로 출타하였습니다. 약 한 달 정도 쉼과 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요.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협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협력이라 함은 우리 성도 분들께서 몸이 아프거나 마음 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예배하고 언제나처럼 기쁘게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이 기간 저를 포함해서 교직원들이 담임목사님의 그 빈자리를 감당하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 성도 분들께 드러나는 자리에 있다가 보니, 많은 분들이 저를 위로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데요. 사실 잘 보이지 않은 곳에 있는 분들께서 더 많이 수고하고 더 열심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치지 않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가까이서 볼 때에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잠깐 저를 주목해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수요예배부터 시작한 것인데요. 담임목사님 안식월 동안 앞으로 제가 맡은 예배 시간에 이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좀 쑥스러운데요. 먼저 저처럼 이렇게 활짝 미소 지으시고요. 옆에 분과 이렇게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옆에 분과 눈을 맞추고 웃으며 인사합시다.
# 서로 인사 나누고
사실 저도 내향적인 편이라 예배 시간에 이러는 것을 좀 어려워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무리한 요구를 드리는 것은 이렇습니다. 고백하자면, 제가 좀 쓸데없이 진지한 편입니다. 더 정직하게는 말하자면 재미없는 사람에 속합니다. 이런 저와 함께 앞으로 한 달은 수요일과 주일오전예배 시간에 이렇게 마주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저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우리 성도 분들은 걱정이 돼요. ‘혹시라도 우리 성도 분들의 마음에 예배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와 우리 성도 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아니 서로를 보호하고자 예배 중에 한 번은 웃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저처럼 내향적이어서 마음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탁드립니다. 딱, 이 시간만큼이라도 서로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편, 저는 제가 맡은 예배 시간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처럼 주일오전예배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연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고 수요예배는 기독교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해당 주제가 다소 무겁고 딱딱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더 진지할 경향이 있는데요. 그런데도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입니다.
관련해서 제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우리 성도 분들께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보통 신학교에 가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 생각하실 겁니다. 혹은 성경만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마치면 성경에 정통하고 성경에 박학다식 해질 것을 기대합니다. 저도 신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깐 성경만 공부하거나 성경을 주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다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을 압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엄격한 준비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기를 배운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악기를 가지고 연주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악보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고요. 그 악기의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그와 같은 선행과정을 거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100번 1000번 읽는다고 해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마 지금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정확무오한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무려 2000년이라는 역사를 거쳐온 기독교입니다. 물론 성경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것이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부터라해도 적잖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어느 누구도 성경에 완벽한 해석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각 시대에 따라 늘 새롭고 오늘도 우릴 소생시키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만 공부하는 것으로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와 역사와 사상과 문화 등을 배우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그것에 관련 여러 분과 과목들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고 교회의 역사를 배우며 사상을 정립한 교리 또는 교의를 배우고 고대와 현대에 관계된 여러 문화적 요소들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숨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과는 괴리가 있을 겁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모두가 그렇게 훌륭하고 탁월한 성경해석을 해내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또는 이상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기도 배워보면 알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소리를 겨우 내는 수준이 있는 반면에 탁월한 연주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 앞서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이라는 전제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공부의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탁월한 신학생이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변화하는 것을 봅니다. 실제로 저도 신대원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분들 가운데 입학 초와 졸업 후에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진 동기들을 보았습니다. 그건 분명 신학을 공부하는 일이 성경을 보다 새롭게 이해하는 의미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점 앞으로 우리가 나눌 주제가 성경을 또 신앙생활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주일에 왜 성령을 주제로 하나님을 말씀을 나누려 하는지를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여서 이런 고민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고 진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성령 하나님’ 관하여 관심하지 않거나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은 몰라도 많은 경우에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성령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을 겁니다. 반면에 성령 하나님에 관심을 둔 어떤 분들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성령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일수록 더욱더 크게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온전히 이해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 성경 본문 2절과 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Acts 2:2–3 NKRV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초대 교회에 성도 분들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셨을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과 불로 비유됩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을 특정한 모습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라는 말의 원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성령은 ‘루하흐’라고 합니다. 또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이는 ‘바람,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한글 성경에는 이에 근거하여 성령을 ‘숨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특성을 고려하면 우리는 함부로 성령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도 없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알 수 없는 분이라면 대체 우리가 이에 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또 왜 얘기해야 합니까? 이에 관해 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 하나님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신앙생활에 관계되어 성령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성령 하나님을 아는 일이 중요할까요?
첫째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위격이시라는 겁니다. 말이 좀 복잡한데요. 지난 수요일에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들으신 분은 아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일이 좀 까다롭습니다. 또 그 얘기를 반복할 수는 없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성령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 어떤 에너지나 힘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마치 성령이 초능력과 같은 힘이어서 이 능력을 힘입으면 아주 특수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한때, 성령 관련 집회에서 성령 받으라고 하면서 입김으로 후 부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있었는데요. 이는 성령을 비인격적이거나 어떤 특수한 종류의 힘으로 이해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대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분은 어떤 에너지나 파동 또는 힘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우리와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우리와 교제하시고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구원주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둘째로 성령 하나님은 교회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시작이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 없이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저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그렇지 못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모습들 속에서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행하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입술로는 그렇게 고백할지라도 실상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까? 어떤 신학자의 분석입니다. 교회가 성령 하나님을 얘기하지만, 실상 교회에 행하는 많은 일 중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그분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오히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일들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뜻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 않나요?
어쩌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삶을 또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좋은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고 신앙생활입니까? 이에 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 44절에서 47절의 말씀입니다. 신약 190쪽에 있습니다. 같이 찾아 읽어봅시다.
Acts 2:44–47 NKRV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아마 제 기억으로는 전도사님이 올해 처음 한 오후 예배 설교가 이 본문을 가지고 했던 것 같은데요. 교회에 관한 설교였을 겁니다. 이 성경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후에 초대 교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다른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기도 응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국분이시지만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 그러니까 생후 8개월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에 대한 불만도 있었고 그에 따라 늘 강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를 나가고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결심을 하면서 자신의 장애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이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좋은 목사가 되겠습니다. 앞으로 사역할 때 이 다리가 장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리로는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어려우니깐 이 다리를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4년을 기도했던 어느 날입니다. 그 무렵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한 미국 교회에서 저녁에 치유집회를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자신을 포함하여 그 집회에 찾아온 분들을 한분 한분 붙잡고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 목사님이 설교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이 상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4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내게 응답을 안 해주신 것은 믿음이 없어서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집회가 끝나고 그 강사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아까,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그 강사 목사님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재차 묻고서 그 말에 반박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시 이야기를 통해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래된 지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서 3번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병을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반박하려던 차였는데, 그 강사 목사님이 먼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시 이야기를 아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자 그 강사 목사님이 또 묻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가시를 치유 받았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요,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대답하자 그 강사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도 바울의 가시는 치유받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쳐다보는데,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가시를 놓고 세 번 기도했죠. 그러고 나서 또 기도했나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치유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 가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은사로 쓰임 받은 거니까요.’ 이 얘기를 듣고서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전히 그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지만, 그것이 더 이상 그의 삶에서 장애로 여겨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도 응답에 관한 것으로 일전에 설교를 나눴는데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또 이야기가 한편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규정해 놓은 어떤 가치와 질서를 넘어서서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삶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의미를 거기서 발견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복을 받고 성공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른바 세상에서 출세하고 이름을 날리는 것 아닙니까? 가령 명문대라 불리는 곳에 진학하거나 대기업이나 유망한 직종에 종사하거나, 결과적으로 수치화되고 물질화된 것을 많이 가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밖에 삶은 낙오이고 실패고 패배입니까? 아마도 세상의 기준에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이 삶의 전부라면, 우리는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 경쟁에서 뒤처지면 미래가 없는 삶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와 혹은 공포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길이 있음을 얘기해 줍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한번 더 성경을 통해서 이를 찾아봅시다. 신약성경 로마서 8장 6-9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249쪽입니다.
Romans 8:6–9 NKRV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방금 읽은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길에서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길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우리 성도 분들께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연속해서 나누게 될텐데, 이를 통해서 우리가 더욱더 성령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고 그에 속하여 살아가는 복되고 귀한 삶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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