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이야기-죄에 관하여(인간론)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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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 5장 12절(신약 245쪽)
설교제목: 기독교교리 이야기-죄에 관하여(인간론)
Romans 5:12 NKRV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 사람과 서로를 향해 크게 미소 짓고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서로 인사 나누고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죄’라는 다소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면서도 사실 신앙 안에서 참 중요한 이야기를 어떻게 잘 전달할지를 계속 고민하게 됐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관련된 주제를 김진혁 교수님이 쓰신 “질문하는 신학”이라는 책을 통해 주로 공부했는데요. 미리 양해를 구하며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설교는 그 책의 내용을 많은 부분 가져왔습니다. 제 생각엔 그 책의 내용이 우리에게 이 죄라는 주제를 좀더 깊이 있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요. 해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시 한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윤동주, “또 태초의 아침”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시입니다. 사실 저도 시에 관해서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데요.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고한 자료에 따르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을 이해하고 오늘의 주제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임을 알게 됩니다. 관련 내용을 인용해서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의 도입부가 주는 이미지는 순백의 겨울이 가진 청결함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만들어 낸 반들반들한 깨끗함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래서 겨울의 무균상태의 맑음에서 녹아 없어질 봄이 올 것을 기다립니다.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땀 흘리며 일하게 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백의 겨울처럼 마냥 맑고 밝은 봄은 아닙니다. 그 속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당황스러움과 수치심과 찝찝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윤동주 시인이 그려 내는 인간은 죄를 모르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순백의 겨울과는 대조되는 죄로 얼룩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부정적인 존재로 나타내기 보다는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창세기 3장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한다기 보다는 어쩌면 인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그것은 인간이 가진 관계맺음에 따른 능력으로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이 인간이 가진 긍정적 측면이라면 이번 시간에 우리는 그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죄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존재입니다. 어쩌면 윤동주 시인은 앞선 시를 통해 그와 같은 인간의 이중성을 잘 포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기독교에서 ‘죄’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는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지에 관한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면, 기독교에 좀더 쉽게 접근하고 참여할 수 있게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이 부분은 양보와 타협이 불가한 부분입니다. 심지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신학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과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것’ 다시 말해 죄는 신학의 중심주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해 가려고 합니다.
우선은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에 관련된 여러 표현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는 ‘구부리다’, ‘허물’, ‘악의 지배’, ‘신뢰의 깨짐’, ‘거역하다 침해하다’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죄를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알아야 할 바를 모름’, ‘율법을 지키지 않음’, ‘경계를 범함’, ‘말을 듣지 않음’, ‘바로 서야 하는 곳에서 넘어짐.’, ‘교만’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죄를 이야기합니다.
그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죄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하타’이고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입니다. 매우 중요한 단어이니깐 한번 더 반복합니다. ‘히브리어 하타, 헬라어 하마르티아’ 이것은 ‘목표에서 엇나가다 또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앞서 말한 하타와 하마르티아가 주는 이미지가 그런 건데요. 활로 화살을 쏠 때, 언제 목표한 과녁에 정확게 맞게 될까요? 당연히 화살과 목표한 과녁의 거리가 가까울 때겠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과녁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상태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또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가 죄로부터는 가까워진 상태이지요.
그러니깐 죄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에서 죄를 얘기할 때는 법적은 차원의 문제나, 윤리적 차원의 문제라기 보다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종류를 크게 둘로 구분을 합니다. ‘원죄’와 ‘자범죄’가 그것입니다. 원죄를 잘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인데요. 다시 오늘 성경본문인 로마서 5장 1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Romans 5:12 NKRV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말하는 한 사람은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인류가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합니다. 반면에 자범죄는 원죄로 인해서 생겨나는 죄의 결과인데요. 각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와 욕망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범죄에 관해서 가톨릭은 대죄와 소죄로 구분하기도 하는데요. 많이 들어셨을 겁니다. 7개의 대죄라는 것이 가톨릭에 있습니다. “교만, 시기, 분노, 탐욕, 나태, 탐식, 정욕”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대죄와 소죄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떤 작은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대죄와 소죄에 관계없이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죄가 없었다면,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범죄가 없었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담과 하와를 한 개인으로 본다면, 우리와 그의 죄가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현대의 아담에 관한 연구는 실제로 존재한 어떤 인물로의 가능성을 추적해 가지만, 대체로 우리가 동의하는 교리적인 설명은 아담과 하와를 인간의 모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모름지기 아담과 하와 같은 구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범죄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이러한 죄가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을 찾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서 22절까지 말씀입니다. 신약 283쪽에 있습니다.
1 Corinthians 15:21–22 NKRV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해서 죽음과 구원에 있어서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의 결과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고요. 또 설령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습이 곧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이 있는 이상에야 우리는 언제든 죄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의 문제는 홀로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문제는 어찌보면 관계에 따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하긴 했는데요. 죄의 결과가 관계가 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성경의 죄를 관계의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세상을 창조하시 원리가 관계중심적이기 때문인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성경구절이지만, 한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6-27절(구약 2쪽)입니다.
Genesis 1:26–27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나오는데요.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라는 것으로 복수 형태로 나오고요.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남자와 여자라는 하나 이상의 관계를 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중심적 존재로 창조하셨고 하나님도 관계적 존재임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에 이렇게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시는데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대체로 길고양이 강아지에게 우리가 이름을 짓어주진 않지만요.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에게는 이름을 짓죠.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가 그 대상과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죠. 이와 관련된 김춘추 시인의 유명한 시구가 있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세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만물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세계였습니다.
또 이러한 관계에 관하여 흥미로운 장면을 구약성경 창세기 2장 22절에서 23절을 통해 볼 수 있는데요. 같이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2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Genesis 2:22–23 NKRV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다고 하는데요. 왜? 갈빗대로 만드셨을까요? 사실 이건 성경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얘기지만요. 이와 같은 해석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중세 한 신학자의 해석인데요. 만약 하와를 아담의 머리 일부분으로 만들었으면, 하와가 아담을 지배하려고 했을 것이고 반대로 하와를 아담의 발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면, 아담이 하와를 지배하려고 했을 것이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반자적 관계에 놓기 위해서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에 관해 아무런 얘기도 안하니까, 사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신 것인지를 나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이 지배하거나 다스리는 관계가 아니라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성경에서 ‘샬롬’이라고 얘기하는 것인데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러한 샬롬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벽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요.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일컫던 축복하던 하와를 ‘하나님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하와를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땅이 만들어내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씨름하며 땀 흘리며 살아야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샬롬의 파괴이고 죄의 결과이지요.
이렇게 첫 인류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창조세계의 샬롬을 무너트리고 그 관계를 망쳐놓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그 결과로 지금도 우리는 우상을 끝임없이 만들고 숭배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고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는데요. 오래된 영화지만 유명했던 ‘매트릭스’라는 영화 속에서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실날하게 말합니다. 잠깐 인용해서 읽어드립니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받은 한 가지 계시를 나누고 싶어. 너희 종을 분류하면서 깨달은 건데, 너희는 사실 포유류가 아니야. 지구상의 모든 포유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자연적으로 균형을 만들어 내지만, 너희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 너희는 한 지역으로 이동해서는, 그곳의 모든 자연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번식하고 또 번식해 버려, 너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뿐이야. 지구라는 행성에 너희와 똑같은 형태로 움직이는 또 다른 유기체가 있지, 바로 바이러스야.
이것이 물론 성경과 관련이 없는 영화 속이야기이긴 하지만요. 죄로인해 변질된 인간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공존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해나가는 인간의 죄악은 바이러스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다 또는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샬롬의 상태 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인데, 이러한 회복을 이뤄가는 분이 다름 아님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면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내용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바로잡고 회복하는 이야기가 한편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의 기준을 따르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에 관한 시험인데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창조세계를 착취하거나 그것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는데요. 인간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에 관한 시험입니다. 성전이라는 주목받는 자리에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함을 통해 지배하고 군림하는 위치에서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셨더 것처럼 섬김의 자리에서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은 사탄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시험이었는데요.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라는 것에 관한 시험입니다. 어리석은 것에 속지 말고 하나님만을 철저히 믿고 따름으로 그 분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라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이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하셨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5장 18절에서 19절까지 말씀입니다. 신약 246쪽입니다.
Romans 5:18–19 NKRV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렇게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첫 인류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죄의 문제를 빼놓을 수없는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의 문제의 심각성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죄에 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죄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이 인간을 부정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더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만큼 굉장한 위치로 올라섰음을 강조하고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 신학자는 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는 이를 도울 방법은 없다.” 그래서 죄의 교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교리는 비참한 상태에 놓인 우리를 돌아보고 어떻게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지를 모르는 우리에게 회복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함만복 시인의 ‘죄’라는 시를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 함만복, “죄” -
우리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죄의 문제를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의 문제를 바르게 직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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