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힘을 내어야 할 이유

다시보는 룻기 시리즈➇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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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6-18
지난 시간에 우리는 나오미가 룻에게 타작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가, 그의 이불 안으로 들어가라는 권면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한 말의 핵심은 보아스가 주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보아스 자체를 너의 남편으로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보아스에게는 기업 무를 자(즉, 고엘)의 책임이 있으니 며느리 룻에게 언약을 근거로 타작마당에 가서 보아스에게 청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3장 5-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모든 말에 순종하겠다고 하고, 시어머니의 말대로 행하게 됩니다. 룻은 잠든 보아스의 이불 끝을 들고 들어가 그 아래에 눕게 되고 보아스는 자던 중에 놀라 깨어납니다. 그리고 이불 속에 있는 여인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룻은 9절 말씀에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이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룻이 점잖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청혼을 한 셈이죠. 이거 얼핏 보면 야심한 밤에 외로운 한 여인이 중년의 남자가 자다 일어난 틈을 타서 청혼을 한 그저 그런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별로 공감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배경을 잘 모르기 때문이죠. 고대 사회에서 타작이 끝난 마당은 어떤 곳을 의미할까요? 사실 룻이 나오미의 권면을 듣고 행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타작을 마친 후, 벌어지는 마당에서의 축제는 음주가무가 난무했기 때문이죠. 흔히 말하는 뒤풀이가 제대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는 많은 일탈 행위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 아닙니까? 이방 민족인 가나안 문화가 이스라엘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들레헴의 타작마당 역시 그렇게 젊은 여인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자칫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은 억센 남자 일꾼들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무법천지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룻에게 이런 험한 곳에 화장을 곱게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보아스를 찾아가라는 거예요. 이에 룻은 고민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권면대로 행합니다. 나오미가 타작마당의 문화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3절을 보시면 나오미가 룻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에게 보이지 말고”
이 표현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숨어 있으라”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단장한 네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죠? 타작마당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나오미도 알기 때문입니다.
룻 역시 이방인이기 때문에 타작마당이 어떤 곳인지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잠들어 있는 외간 남자의 발치로 들어가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들어가 청혼했을 때, 보아스가 거절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룻이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한 여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룻이 나오미의 말에 순종한 것은, 사실은 룻의 전부가 걸린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룻은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키는 나오미에게 왜 순종 했을까요? 그것은 룻 역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룻이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보아스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오미도 알고 있고 룻도 알았던 보물은 다름 아닌 보아스입니다. 이들은 이 보물을 얻기 위해 무엇도 포기할 수 있었고, 타작마당의 위험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룻은 정확하게 보아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잠결에 놀라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던 보아스의 질문에 대한 룻의 대답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룻3:9 합독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룻이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의 여종이니 옷자락을 펴서 저를 덮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오미가 “만일 보아스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이렇게 대답해라”라고 알려 준 게 아니잖아요? 이것은 룻이 스스로 준비한 말이고 그녀 나름대로 프러포즈를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독특한 표현이 하나 있는데, “옷자락으로 덮으로서”라는 표현입니다. “저와 결혼을 해 주시겠습니까?” “제 고엘이 되어 주세요” 이런 직접적인 말도 아니고, 왜 하필 청혼 멘트로 “옷자락으로 덮어 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전에 보아스가 자신에게 했던 축복의 말을 룻이 기억하고 응용한 것입니다. 룻2:12(화면)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 말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분의 날개로 너를 덮어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아스의 축복 중심에 있는 날개로 번역된 단어와 룻이 청혼할 때 사용하는 옷자락이라는 단어가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의미적으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나 축복해줬던 것처럼, 이제 당신의 옷자락(날개)으로 나를 덮어(보호하여)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청혼한 것입니다.
여러분, 룻은 자신이 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에 온 이유는 모압 땅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아스의 밭에서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헤세드를 경험했어요.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하길 그가 바로 네가 찾던, 너를 덮어 줄 남편이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고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과 타작마당의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아스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죠. 보아스를 알아봤기에 룻은 타작마당의 위험을 뚫고, 용기를 내어 보아스에게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오늘날의 교회마다 위험을 감수하는 헌신과 도전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되곤 합니다. 사실 저는 어른 목회는 새밭교회에서 했던 것이 거의 전부이고 대부분은 청소년과 청년 사역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도 모르게 제 안에 기존의 질서와 규범들에 대한 거부감 비슷한 게 있어서 “어른스럽다” “안정되었다”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뭔가 안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열정 있다”라는 말은 오히려 제게는 칭찬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한 만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세상이라면 굳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하심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세상의 논리와 시스템이 교회에도 적용되고 제도와 규범이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공동체의 힘을 훼손시키고 있다면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는 것 아닌가요?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싶다면 인생 자체가 모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오경 중에 맨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새로울 신(新)자가 아닌, ‘되풀이 되다’라는 의미의 거듭 신(申)자를 한자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되풀이하여 가르쳐 준 율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실패한 너희 선조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 본받을 것 같으니까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향해 비장한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신명기는 분위기가 좀 어둡고 어렵습니다. 이 출애굽 2세대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여러분, 우리도 이 시대의 부모로서 비슷한 고민들 하지 않으세요? 내 자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따라 살면서 신명기 신학처럼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누리며 살기 원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시다면 부모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실패한 출애굽 1세대처럼 반면교사가 아닌, 정면(正面)교사순종의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순종의 모델, 즉 정면교사의 삶을 보여주어야 출애굽 2세대들인 우리 다음 세대들이 똑같이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믿음의 실험과 모험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요셉과 다윗,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그런 헌신과 도전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바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 할 일을 꿈꾸고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어떤 일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헌신과 열정이 가슴을 벅차게 할 때가 있습니다. 보아스를 얻기 위해 위험한 타작마당을 지나야 하는 것처럼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도전과 선택들이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믿음의 길이 되며, 그 일을 통해 더 성숙하고 성장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안전한 삶에 길들어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 신앙생활이 주는 위험을 한 번도 감수한 적이 없이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예측한 대로, 계획한 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런 교회 공동체가 된다면 그 이상의 것을 순종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때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위험을 감수한 순종, 예측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제도와 관행, 체면 문화에 얽매이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말고 룻이 보아스만을 바라보며 위험한 순종을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일직선적인 믿음과 결단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룻은 지금 컴컴한 타작마당이라는 위험과 ‘현숙한 여인’이라는 자신의 명예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보아스에게 나아갔습니다. “당신의 날개로 나를 덮어 나에게 완전한 상이 되어 주십시오.” 그녀의 위험한 순종에 이제 보아스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3장 10절과 11절입니다.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가 룻의 말을 듣고, 그녀의 뜻대로 “다 행하리라”라고 말을 합니다. 보아스가 룻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요한데요. 10절을 보니 룻의 청혼은 단순히 룻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죽은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한 헤세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아스는 룻에게 감격을 했습니다. “자네는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를 수 있는 여인인데 스스로 행복할 기회를 포기하고 이 늙은 나에게 찾아와 그것도 먼저 청혼을 하다니… 그것은 자네의 시어머니와 가문을 위한 헤세드 임을 내가 알았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라고 약속을 하죠.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룻과 나오미의 인생은 핑크빛인 것만 같은데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보아스의 입에서 나오미에게 다른 기업 무를 자가 있어, 그가 기업 무를 권리를 주장하면 나를 기업을 이을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상황을 룻이 알 리가 없죠. 너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보아스와 룻이 결혼한다는 결론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긴장되질 않지만, 룻과 나오미의 입장에서 보면, 보아스가 그들의 고엘이 되고, 유일한 기업 무를 자라고 기대를 하고 위험과 수치를 다 감수하고 모험을 했는데, 갑작스럽게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은 말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의외로요. 이러한 청천벽력과 같은 일들을 신앙생활에서 자주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것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침묵하시는 것 같아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면서 결정한 일이 있습니다. 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확신도 주셨어요. 그런데 막상 쉽게 일이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은 알겠는데, 내 생각과 다르게 하나님의 도움의 손이 임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가만히 계시고, 여전히 기다리게 하십니다. 도대체 기업 무를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인가요?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더 어려운 일은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인내해야 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어렵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 많이 기다리게 하시지 않나요? 저는 여러분들의 기도가 대부분 작년과 올해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기도 제목이 응답 되질 않았거든요. 더 힘든 건, 언제 어떻게 응답이 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죠.
여러분,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요? 주신다고 했으면 빨리 주시지, 왜 이렇게 시간을 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애타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내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야.’ 하면서도 더디 응답 되고 막막할 때 ‘내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내가 회개해야 할 일이 더 많은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그 기다림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여러분, 그건 다른 게 아니더라고요. 그 기다림 속에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과정임을 알게 하시고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내 인생에 정말 붙잡아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더라고요.
저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에 반응하여 헌신하고 수고하지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해, 거의 매일 기도하면서 반복하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 그 성도님이 조금만 더 견디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저 언덕만 넘어서게 하옵소서. 저 모퉁이만 돌고 이 언덕만 올라서면 그곳에 참된 안식과 위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주저앉지 말고 믿음으로 견디는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니 더디 응답 되고 오랜 기다림으로 지치시더라도 우리 교우님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보아스가 얼마나 매너가 있는 사람인지요. 룻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가 타작마당에 온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심지어 기업 무를 자 문제도 본인이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룻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15-17절 합독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보아스는 먼저 15절에서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주고”, 또 17절에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룻을 돌려보냈습니다. 보아스가 돌아가려는 룻에게 방금 타작한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번 되어 주었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였다는 사실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왜 보리의 양을, 몇 에바 또는 호멜이라는 이스라엘의 부피 단위로 쓰지 않고 ‘여섯 번’이라는 횟수를 강조하는 것처럼 쓰였을까요?
저는 ‘여섯’이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리를 얼마나 주었는지는 그 양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예상보다는 많이 줬겠죠.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숫자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곱’입니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숫자,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일곱’에서 하나가 부족한 ‘여섯’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여섯’은 부족함이나 부정적인 의미가 더 큽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하는 666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여섯’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식도 있습니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여섯’은 ‘일곱’이라는 안식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아직 완성이 안 되거나 안식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곧 그런 날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안에서 보아스의 태도를 볼 때 이 ‘여섯’ 번이라는 반복된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기대와 소망과 위로의 숫자’입니다. 직장인들도 금요일 오후가 되면 ‘불금’이라고 해서 조금만 더 참고 신나게 주말을 보내려는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보아스가 여섯 번 보리를 퍼 주며, 나오미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곧 이 문제를 해결하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겠다. 절대 이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게 하겠다 내가 속히 오겠다’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 가운데 우리 하나님이 응답이 더딘 것 같은 경험을 많이들 하시죠? 내 생각대로, 내 시간과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무정해 보이는 우리 주님 때문에 얼마나 답답한 날과 우시는 날이 많으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여섯째 날’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역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힘을 내어 마지막 하나까지 채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준비하신 참된 안식을 맛보게 되는 날까지, 이 소망으로 오늘을 또 인내하고 그분을 고대하며 살아 내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모든 내용을 다 들었고, 보아스가 여섯 번 되어 준 보리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불안해하는 룻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성경).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말은 “내 딸아, 이제 우리 자리에 앉자. 우리는 할 수 있는 다 했으니 이제 그가 어떻게 하는 기다려보자꾸나. 그 사람은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을 거란다.”
나오미의 이 말이 참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가 있죠? 그것은 불안하고 모자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보아스가 되시는 우리 주님의 신실함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절대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가야 할 마땅한 자리에 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도와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수많은 무리는 평생을 가도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20kg 가까이 되는 많은 양의 이삭을 주워 온 것처럼, 그들도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을 정도로 기적적인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후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입니다(화면).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러분, 이 말씀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탄 배에 특이한 점이 보이십니까? 바로 그 배에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가운데 풍랑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함께하실 것 같고 항상 든든하게 내 곁에서 말씀해 주시고 지켜주실 것 같았던 예수님이, 그 무서운 바다 위로 제자들만 재촉해서 배워 태워 보내시고 대체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시던 그 놀라운 주님은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제자들처럼 재촉해서 나를 등 떠밀어 홀로 바다 위에 배를 태워 보내시고 갑자기 떠나버리신 것 같은 그때, 마치 예수님이 사라진 것처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던 내게 침묵하시고 멀리 계시던 것 같은 그때, 나 홀로 이 파도 속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지쳐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주님은 대체 뭐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 대답을 다음절인 마태복음 14장 23절을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화면)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여러분이 만일 예수님이 없는 것 같은 배 위에 홀로 있는 것 같으시다면, 여러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홀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잘 견뎌주기를’ ‘그 파도를 잘 이길 수 있기를’ ‘타작마당을 지나는 모험을 감행하고 그렇게 어렵게 보아스의 발치까지 어렵게 나아갔건만, 다시 돌아가라는 그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견뎌주기를’ ‘이제 곧 여섯을 지나 일곱의 수가 다 되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힘을 내어 주기를’ ‘여러분과 저를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믿고 인내하도록 지금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배에 태워 건너게 하시고는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섯째 날’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 건너편으로 가라 하시고 모퉁이를 돌 때까지 인내하라 하십니다. 다시 힘을 내어 마지막 하나를 더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일이 완성되기까지 절대 쉬지 않겠다고 하시는 우리 주님을 다시 신뢰하고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여러분, 왜 주저앉아 계십니까? 이 언덕만 넘으면, 이 모퉁이만 돌면, 우리 주님이 거기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고 계시고, 붙잡아 주시고, 등 떨 밀어주시며 함께 해 주시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준비하신 참된 안식을 맛보게 되는 날까지, 이 소망으로 오늘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믿음으로 살아 냄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날에 주님의 품 안에서 감격의 재회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시겠는데요. 여러분, 혹시 예수님 없이 홀로 배 위에 계신 것 같습니까?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고 계신가요? 지금은 여섯째 날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힘을 내어 하나를 더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절대 쉬지 않겠노라고 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겠습니다. 저에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주님, 우리가 8주째 이 룻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만, 전하는 저도 그렇고 듣는 우리 교우님들도 주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말씀은 말씀일 뿐 감히 눈앞에 있는 타작마당을 지나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려는 모험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저희들의 연약함도 보게 됩니다.
주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뭔가 더디 응답되는 것 같고, 타작마당에 홀로 내 버려두시는 것 같은 두려움도 있고, 배를 태워 홀로 건너게 하시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시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셨고, 보아스처럼 이 일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결코 쉬지 않겠노라고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가 이 여섯 째 날을 지나 속히 오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붙들고 안주하고 주저 앉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뚜벅 뚜벅 제 갈 길을 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실 그 영광의 날에 주님의 품 안에서 잘 했노라고, 잘 싸워 여기까지 왔노라고 주님과 눈물의 재회를 할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룻기의 말씀을 통해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겠노라고 약속해 주시는 그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살아가길 다짐하는 우리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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