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4) 찐 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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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용서가 없는 사회

‘내 예배 당에 온걸 환영해, 연진아’
최근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받았죠?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동은이는 학창시절 연진이와 그 친구들에게 엄청난 학교 폭력을 당합니다. 그 뒤 동은이는 자퇴를 하게되고 그들에게 복수를 결심한 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나갑니다. 연진이의 하나뿐인 딸의 담임 선생님이 된 동은이는 이제 자신이 세워뒀던 계획을 하나 둘 실행해 나가죠. 중간중간 동은이의 계획이 틀어지며 복수가 실패하는 듯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결국 그녀의 복수는 성공하고 이제 그녀의 남자친구 주선생의 복수를 도와주며 드라마는 끝이납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무엇이 ‘글로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극 중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복수에 성공한 동은이일까?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원없이 살았던 연진이일까요? 과연 드라마에서 누가 영광을 보았을까?
동은이의 복수가 성공할 때마다 순간순간 통쾌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는 내내 그렇게 속시원하진 않더라구요. 계속 뭔가 모를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동은이는 엄청난 괴롭힘을 받았고,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연진이와 친구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 죄 지은 자들에게 처벌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동은이처럼 복수가 자기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 살아가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그렇게 복수를 다 이루고 나면 정말 기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화를 보면서 결국 어느 누구도 영광을 얻지 못하고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수로는 진정한 영광도, 진정한 기쁨도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영광은 어디 있을까요?

본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에 대해 기도하게 하신 뒤, 그 다음으로 죄 용서에 대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세요.
사람은 자신의 삶이 편해지고, 배불러지고, 등이 따뜻해지면 전부다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서 마음을 찝집하게 합니다. 바로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과 창조와 진화론에 대한 주제로 시간을 보내진 않겠습니다. 이에 대한 주제는 이후에 얘기 나눌 시간이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 땅의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주변 이웃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인생의 주된 목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단 한순간이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너무나컸습니다.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하나님께 범한 죄의 책임은 그에게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으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저도 이번주에 병원에 가서 아이를 초음파로 보니까 너무 귀엽더라구요. 하지만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들과 한시간만 같이 있어보면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시간이 아니라 십분만 같이 있어도 충분합니다. 자기가 심심하거나, 배고프면 놀아달라고 밥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거짓으로 우는 척도 합니다. 장난감을 일부러 놔버려서 부모가 계속 줍게 만듭니다. 다시 손에 지어다주면 또 놔버립니다. 안 가져다 주면 뗴를 쓰며 울기 시작합니다. 이미 마음에 있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죄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이 왜 죄입니까? 나만 기쁘고 나만 좋기 위해서 상대방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기분, 건강, 주변 상황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지위를 내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죄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까지 의미합니다. 그를 지으시고 낳으신 하나님과 어떠한 허물이나 벽이 없이 지내던 사람에게 죽음은 더이상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 상의 벽을 만들었습니다. 죄로인해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죽음으로 인해 흙으로 사라져 버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사망이라는 벌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셨지만 한낫 피조물에 불과하기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요즘 벌레가 굉장히 많죠? 러브버그가 한창인데 걔네들이 다가올 때 손으로 휘저으면 너무나 무력하게 날라가버립니다. 사람의 하찮은 손짓에도 벌레의 인생은 위태로워지죠. 이처럼 하나님의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지은 이후에 하나님의 존재와 형벌이 두려워서 피하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벌을 받을 까봐 무서워서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일부러 피하거나 숨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남을 피해 그분과 멀어지려고 했고 하나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곳에 가서 계속 죄를 지어 댔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또는 잊어버릴려고,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지키고자 부를 늘리고, 권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늘렸습니다.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자 술에 중독되고, 담배를 피고, 마약을 하고, 놀거리에 진탕 취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람 안에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하고자 발버둥치지만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 무능함을 안타깝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이 죄를 해결해주시고자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은 죄값을 감당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지은 죄값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무능한 사람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대신 죄값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모든 말씀을 지키셨고, 또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통치자에게 죄를 선고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모든 죄값을 받고 해결해주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이 사람이자 하나님이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그가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이상 죽음이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사람이 받아야 할 죽음의 벌을 직접 해결해주셔서 더이상 죽음이 사람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아래 있지 않고 생명 아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후에 곧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당신을 믿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 그를 믿은 자들은 진정한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히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마태복음 18장에서 주인에게게 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으로 비유합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한 도시가 로마에게 바치던 세금의 양은 대략 백달란트 정도였습니다. 한 달란트는 한 사람의 일년 연봉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백 달란트는 백명 분의 일년 연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큰돈입니다. 만약 일년연봉이 3600만원이라고 치면, 백달란트는 36억입니다. 그렇다면 만 달란트는 3600억 정도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아니 이사람은 이렇게 이런 어마어마한 빚을 어떻게 지게 된 걸까요? 이런 빚이 있으면 정말 인생폭망입니다. 너무나 좌절스러워서 그 종은 자기의 식구들까지 종으로 팔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식구들이 뭡니까? 장기도 다 팔고, 안구도 적출하고 그래야죠. 하지만 그의 상황을 딱하게 여긴 선한 주인은 그 종의 빚을 모두 갚아줍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그 종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너무나 감사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인에게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은혜를 받았기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어요? 그래서 자기도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것입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빚을 탕감 받고 집으로 향해 가는데 길에서 마침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납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치 일당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백 데나리온은 100일치 금액이죠. 대략 3개월 가량의 월급입니다. 한달에 300을 번다고 치면, 900만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본인이 탕감받은 만달란트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돈입니다. 3600억과 900만원을 비교한다면 4억분의 1입니다. 정말 적은 돈이지요. 과연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그는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백데나리온을 값지 않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겁박합니다. 그 사람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꼭 갚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동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범죄도시 장첸마냥 ‘내가 돈 받으러 왔는데 그거까지 알아야 하니’라는 식으로 무시하며 그를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정말 이기적인 양반이죠. 자기가 탕감받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가 손해본 것만 생각합니다. 정말 안하무인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이 광경을 보다못한 주변 동료들은 이 일을 주인에게 알립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잘하였다 내 충성된 종아’라고 생각했을까요? 정말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는 만달란트 탕감받은 그 종을 다시 불러서 그의 행동을 꾸짖고는 자기가 탕감해준 만달란트를 도로 다 갚으라고 명령한 뒤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적용: 용서할 수 있는 용기

우리는 만달란트 빚진 종처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만달란트보다 더 큰 빚을 하나님께 졌지만 그분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이 사랑을 나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누룩과도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은 쉽게 말해서 곰팡이 입니다. 곰팡이가 얼마나 빨리 피는 지 모릅니다. 곰팡이는 굉장히 적극적인 친구입니다.
제가 이주전에 부모님께 산딸기 두박스를 받았습니다. 정말 양이 많았습니다. 그걸 택배로 받고 씻어서 물기를 뺀다고 식탁 위에 두었는데, 다음날 보니 하얀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다 상해버리기 전에 빨리 괜찮은 것들을 골라내야겠다 싶어서 정상적인 것들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전부다 썩어 있었어요. 곰팡이가 이렇게 빨리 퍼진다는 걸 그 때 알았습니다. 곰팡이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퍼져 자기의 구역을 넓힙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처럼 빨리 퍼져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살게 될 곳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한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곳에서 느끼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누룩가 같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씀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기도문의4번째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기도의 주동사를 명령형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나라 임하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주여 이렇게 해주소서‘라고 강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요청인 동시에 서원의 성격도 담고 있습니다. ‘해주소서’의 기도는 ‘주여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의미를 함께 포함합니다.
저번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주님께 ‘해주소서’ 라고 기도한 뒤 아무것도 안하고 끝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고 잘못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요청과 서원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에 그 기도가 이뤄질 것을 믿으며 행동해야 하합니다. 단순히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가식적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누룩이 퍼지는 것과 같이 적극적인 경건을 요청하십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이 기도를 올려드리며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을 향해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마음을 품고 용서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라고 물은 질문에 예수님이 ‘일곱번의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우리의 죄에 대해 회개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자칫 이 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테니 우리를 용서해주세요‘라는 식의 조건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결코 하나님의 행동을 이끌어낼 어떠한 자격도 없습니다. 이 구절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라는 부사절을 조건절이 아니라 동시적이자 연속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부사절로 봐야한다고 제안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날마다 용서해주세요.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매일 그러하겠습니다’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더없이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있기에 열매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통해 뿌리가 잘 심겨져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잘 못한 사람을 용서합시다. 이러한 행동으로 우리 안에 믿음을 확증합시다. 우리에게 행함이 없다면, 만약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화만 난다면, 그래서 그 화를 주체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 안에 믿음이 제대로 서있는지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용서 = 찐 글로리

여러분에게는 누군가를 용서할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용서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나타내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사랑과 용서, 그것이 진정한 영광 찐 글로리입니다.
우리가 이 찬양을 함께 고백했으면 좋겠어요. 송축해 내영혼이라는 찬양인데요, 이 찬양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 찬양은 원래 영어 찬양인데 그 제목이 ‘ten thousand reason’ 만 가지 이유라는 뜻이죠. 우리가 찬양해야할 이유가 만가지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찬양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함께 이 찬야을 부르며 내가 주님께 수만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당신을 찬양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내가 나의 삶에서 그 은혜를 베풀수 밖에 없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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