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된 앎이 제대로된 삶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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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 앎이 제대로된 삶을 만듭니다
[서론]
한 의사를 찾아온 어떤 여인이 아무말 않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두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그녀의 블라우스로 떨어져 내려 조그맣게 짙은 웅덩이 모양을 만듭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엽니다.
한 단어를 말한후 숨을 고르고 다시 흐느끼다가 또 한단어를 말하는 식입니다.
그래도 천천히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털어 놓습니다.
“다 제 잘못이에요!”
그녀의 눈물이 더 흐릅니다.
의사가 묻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아이를 가질수 없어요. 오, 하나님!”
의사가 묻습니다.
“그게 왜 당신 잘못이라는 거지요?”
그녀는 더 흐느끼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말합니다.
그녀는 십대였을때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낙태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당시 그녀의 낙태는 다행히 어떤 합병증이나 부상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의사는 왜 그녀가 아이를 가질수 없는지 더 궁금해 합니다.
그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벌하시기 때문에 저는 아이를 가질수 없어요.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요. 그때 아이를 살해했으니 하나님이 그 벌로 평생 저에게 아이를 주지 않으실 거라고요.”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여인이 절망하는 근본원인은 난임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있다는 문제인가요?
다시 말해서, 진짜로 이 여인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문제일까요?
둘중 하나가 문제일수도 있지만 이 여인의 경우는 둘다 문제입니다.
이 여인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이 그 여인의 몸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의학박사 티머시 제닝스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지식과 믿음이 우리 뇌와 몸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불신자보다 잘못 알고 잘못 믿는 신앙인이 더 불행해집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천지, JMS같은 사이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아닐지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다닐때 그 사람의 삶은 심각하게 망가질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항상 성도들에게 정죄감을 심어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져 성도들의 일상을 망가뜨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과도한 헌신을 요구하여 가정과 사회생활의 균형을 깨뜨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들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만날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올바로 알고 배우는 것, 즉 바른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올바른 지식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별하기 힘들다는데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참된 가르침, 올바른 복음인지 분별할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 보겠습니다.
디도서는 바울이 크레타 섬에 남겨놓은 자신의 제자 디도에게 쓴 목회편지입니다.
젊은 제자 디도에게 이렇게 목회하라고 훈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두가지 임무를 맡깁니다.
1장 5절입니다.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내가 지시한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디도가 해야할 첫번째 임무는 바울이 아직 남겨놓은 일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남겨놓은 일들이란 먼저,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올바른 장로들을 세우는 일입니다.
크레타 섬에 많은 가정교회들이 있는데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각 교회를 올바로 세워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 일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들이 갖춰야할 덕목들을 거짓 선생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는 의도적으로 이 두 그룹을 대조하며 우리가 거짓 선생을 분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6-9절까지는 올바른 장로들의 특징에 대해 다룹니다.
10절부터는 장로들과 대조되는 거짓 선생들의 특징에 대해 다룹니다.
10절 맨 처음 나오는 단어가 원래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 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장로들을 세워야 하는 이유는 이런 거짓 선생들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올바른 지도자들을 세우면 참된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된 가르침을 통해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일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참된 가르침과 거짓된 가르침을 구분할수 있는 가장 큰 원리가 무엇일까요?
10절입니다.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뚜렷한 특징은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질서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합니다.
그들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즉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 자들 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선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17절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7장 2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열매라는게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 수없이 외치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참된 지식에서 참된 믿음이 나오고, 참된 믿음에서 참된 순종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참된 지식과 믿음은 무엇을 아느냐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참된 가르침인지 거짓 가르침인지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짓 가르침들일지라도 매우 그럴듯 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수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는 나쁜 열매로서 불순종입니다.
반면 참된 지식은 반드시 좋은 열매, 즉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저도 아직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데요?
저도 아직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고 않고 있는데요?
그럼 저도 참된 지식과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인가요?
이렇게 물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짓 교사의 모습은 다릅니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16절의 ‘완고함’입니다.
‘완고함’이란 반항과 반역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도 말씀을 듣고 계속해서 불순종한다면 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순종할 마음이 아에 생기지 않는다면 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이며, 가증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만큼 가증스러운 존재가 없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범죄도시3에서도 가장 나쁜 놈은 원래 나쁜 놈이 아니었습니다.
경찰이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위선자들 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 입니다.
반면,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삶은 다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앞에 보면 장로의 자격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9절에 가장 중요한 자질이 등장합니다.
바로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6-9절에 소개되는 많은 자질들이 모두 순종의 열매들입니다.
특히 7절에 보시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완고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열매는 반드시 선한 일로 나타납니다.
12절입니다.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예언자라 하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크레타 섬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한 짐승과 같습니다.
또한 탐욕적이어서 남의 것을 빼앗다보니 게으르기까지 합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욕도 ‘크레타 섬 사람같다’입니다.
‘짱개, 친일파’이런 욕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크레타 섬 사람들이 거짓 선생들을 만나니까 전혀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경건의 능력이 없으니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크레타 섬 사람들의 특징만 더 부각시켜줄 뿐입니다.
여전히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탐욕적입니다.
성품이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가르침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왜 거짓 가르침은 사람을 변화시킬수 없을까요?
다시 10절 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불순종할뿐만 아니라 헛된 말을 하고,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불순종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둘째, 경건한 삶에 유익이 없는 헛된 말들은 변화에 도움이 안됩니다.
분쟁이나 일으킬뿐 내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안됩니다.
그들의 이런 헛된 말을 14,15절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더러운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교회에 몰래 들어온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믿음 플러스 알파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 플러스 알파가 유대인의 할례와 정결법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한 음식, 부정한 물건을 만지면 구원받을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에 나온 유대인 족보를 가지고 신비한 전설을 만들어냅니다.
그 전설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한 종교적 의식이나 신비한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킬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이 모두 다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 성경의 진짜 가르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섞어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더 잘 속일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거짓 가르침에 능력이 없는 이유는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속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11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망한 가르침이 마치 성경의 참된 가르침인양 속입니다.
그렇게 속이는 이유는 자신들의 탐욕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배를 위할뿐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짜 참기름, 가짜 휘발유의 특징이 있습니다.
100프로 가짜가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섞어서 팝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분간할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참기름을 먹고 나면 몸에 탈이 생깁니다.
가짜 휘발유를 사용하고 나면 차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짜는 사람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필리핀에 갔더니 나이키 천국입니다.
집이 거의 허물어져가는 곳에 사는 친구인데 신발은 꼭 나이키만 신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친구가 자기가 가는 신발가게에 저를 데려갔습니다.
갔더니 모두 나이키인데 얼마나 싼지 모릅니다.
거의 3분의 1, 4분의 1가격이었습니다.
저도 사고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짝퉁이니까 신발의 능력을 믿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짝퉁신발은 얼마 안돼 금방 실밥이 나가거나 밑창이 뜯깁니다.
신발의 능력이 떨어집니다.
넷째, 거짓 가르침이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 신앙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한쪽에 치우친 신앙을 강요합니다.
금욕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입니다.
그렇게 균형이 무너진 신앙에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게 가정입니다.
신천지, JMS같은 사이비들을 보십시오.
공통적인 특징은 가정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그들의 가르침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 선생들과 비교되는 장로들의 특징들을 보십시오.
6절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식이 방탕하거나 부모에게 불순종하면 안됩니다.
참된 가르침은 균형잡힌 신앙인을 만듭니다.
제일 먼저 가정에서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받은 성도라면 가정이 온전합니다.
물론 신앙을 갖는일로 인해 가정이 처음에는 분쟁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참된 가르침은 우리를 변화시켜 가정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주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먼저 하나님의 청지기 의식을 함양시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 것들을 과하게 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며 잘 돌보며 나눕니다.
그래서 7절말씀처럼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쉽게 성내지 않고, 술을 즐기지 않고, 폭행하지 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이 개인의 선한 성품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제 8절입니다.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경건하며, 자제력이 있으며
이런 자질들은 주로 사회적인 선한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가르침은 반드시 우리에게 선한 성품을 만들어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듭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은 그 순종이 좀 더디더라도 우리의 마음만은 완고해져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이 딱딱하고 굳어져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불순종이 마음의 습관이 되어버리면 우리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선한 능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우리의 뇌와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의 삶에 선한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선한 열매를 맺으며, 세상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참된 가르침을 받고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