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1 양청] 25-2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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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속죄) : 죄의 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하는 것
대속 :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죄의 값을 치루신 것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에는 3중직, 곧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 있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에는 예수님께서 과거 2천년 전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3중직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임을 살폈다. 지난 시간에는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선지자 직분을 어떻게 수행하셨고, 지금 수행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삼중직 중에서도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심을 알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25문. 그리스도는 어떻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십니까?
답. 그리스도는 신적인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고, 자신을 희생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간구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십니다.
26문. 그리스도는 어떻게 왕의 직분을 행하십니까?
답.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키심으로써, 그리고 자신과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행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제사장 직분을 행하신다고 하는 걸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구약의 제사장은 세 가지를 담당했다. 첫째는 제사의 인도이다. 일반 백성들은 자기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사를 직접 진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셨고, 제사장을 통해서만이 속죄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자이다. 일반 백성들을 대표해서 제사를 담당한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그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제사장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제사장은 늘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직무를 가졌던 자였다. 사무엘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길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세번째는 백성을 축복하는 일이다. 아론이 백성들을 축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교재 3번을 보라. 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제사에는 언제나 피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생명의 피가 낭자했다는 것은 그 제물의 완전한 죽음을 상징한다. 왜 이 피가 필요할까? 어떤 현대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더이상 기독교를 푸줏간의 종교로 만들지 마라" 맨날 피 이야기한다고 그런 말을 했단다. 사람들의 피를 누가 좋아하겠나? 피라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물이 떨어지는 것과 피가 떨어지는 것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은가? 피를 보면 섬뜻하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를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늘상 봐야만 했다. 거의 외과의사가 피를 보듯 그렇게 일상적으로 봐야 했다.
왜그런가?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다루는 제사에서 죄를 지은 것이 피흘림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데, 안수를 함으로서 짐승이 대신 죽임을 당하는 ‘대속’ 이라는 개념이 제사에 있는 것이다. 대속을 담당하는 짐승의 피흘림을 통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셨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셨다, 그 심판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다. 나 대신 짐승이. 그래서 피라고 하는 것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너무나 비싸서 어떤 것으로도 값주고 살 수 없다 했다. 어찌 짐승 한마리를 잡아서 내 죄를 해결할 수 있겠나? 내 죄가 크던 작던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선고는 사망이다. 우리 세상에서는 경범죄, 중범죄 등이 있어서 그에 따라 형량이 정해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의 삯은 오직 사망 뿐이다. 율법의 작은 것 하나를 범해도 다 범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러므로 피흘림이 있어야했고, 이 피흘림을 통해서 눈 앞의 짐승을 나 대신 하나님이 심판하여 죽이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런 제사가 나중에 짐승이 아닌 예수님이 실제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의 요지는, 나를 위해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죽으셨다? 물론 이 부분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내 죄를 예수님께 옮기시고, 내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께 행하셨다는 것이 십자가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그래 그냥 용서하마” 그렇게 하실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위한 완전한 화목제물로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다.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흘리는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이 되셔서, 스스로가 제물이 되셔서 친히 죄값을 담당하심으로 신적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신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가치가 100원이라고 한다면, 짐승의 가치는 10도 안되는데, 이 제사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보해 오셨던 인간의 해결되지 않은, 심판받지 않은 죄를, 예수님에게 다 맡기셨는데, 예수님의 가치는 감히 값으로 메길 수가 없는 것, 무한대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무한한 가치를 지니신다. 그렇기에 아담부터 가장 마지막에 주님을 믿어 구원받을 그 사람의 죄까지 담당하기에 충분하셨다는 것이다.
4번을 보라.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그렇게 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원수된 관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심판이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이다. 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공의를 만족시키는 제사를 드리심으로서 원수였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목[샬롬]이라는 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샬롬이 이루어져야 가정에서의 샬롬, 친구간의 샬롬 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은 다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샬롬은 철저하게 배제한 채로, 이 세상에서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샬롬을 먼저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성공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샬롬이 먼저 이뤄지지 않는 한 절대로.
5번을 보라. 단번에 드려진 희생물에 대해 말한다. 아론도 제사장이었지만 예수님도 제사장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론의 제사장직분과의 차이는 뭔가? 아론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린 적이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다. 두번째 차이는, 예수님은 단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제사를 완성하셨다. 히브리서 9 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말씀한다. 말씀을 찾아보자. 히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드리고 드리고 반복해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번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이후에는 영원히 제사를 그치셨다. 단 한 번의 제사, 모든 사람을 위한 단 한 번의 제사.
로마카톨릭은 매 주일마다 미사를 행한다. 미사는 신학적으로 예배가 아니라 제사이다. 따라서 매주 미사를 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를 매주 드리는 것이다. 그들은 미사를 하면서 실상은 매주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시다. 매 주마다 그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제사가 끝났다고 말한다.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히 자신을 희생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 제사는 완전히 끝났다.
6번, 중보사역,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일 수 있겠는데 사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심으로 중보자가 되셨고,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다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 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끝났다는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의 역할, 그 중보적인 역할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6번의 내용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경험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속죄사역의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변호하신다. 우리의 대언자로 계신다.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보통 재판정에는 중요한 인물들이 있다. 재판장이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다. 피고인과 원고인도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피고로서 재판장에 섰다. 죄인이다. 성부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 검사는 누구일까? 마귀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폭로한다.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죄까지도 하나하나 다 밝혀내며 우리를 죄인으로 폭로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변호사가 있으니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폭로하는 마귀에 대항하며 말씀하시기를, “그 죄에 대해 이미 다 형벌을 받았다, 이미 다 심판을 받았다, 이미 다 값을 치룬 사건이다” 무엇으로 ? 그분의 피로. 이것이 우리를 대언하시는 분, 우릴 변호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이 일을 하고 계신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를 신뢰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다.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능하신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대속사역이었다. 이는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면 제사장이 성막 울타리에서 성막 안으로 들어가며 보면 놋 제단이 있는데 여기서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짐승을 번제로 드린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제 그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서 또 하나의 제단이 있으니 금향단이다. 향을 피우는 용도이다.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계시록은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하시는 두 가지의 제사장 사역은 바깥 놋제단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피흘려 죽으시는 일이었고, 그 대속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그 대속의 은혜를 받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향단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사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순서가 바뀔 수 없다. 대속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우리를 위한 기도의 사역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왕의 직분을 보자. 7번이다. 왕은 기본적으로 통치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은 사실 대단히 편안한 개념이다. 구약에서 열왕기와 역대기가 있고 사무엘상하가 있다. 왕들의 역사가 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역사를 성경이 왜 관심있게 보여주는걸까? 왜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성경이 쓰고 있는 것은 구속사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들, 히스기야나 요시아나 다윗이나 많은 훌륭한 왕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훌륭하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뭔가 불안하고 흠이 많은 모습들을 보게 된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는 무엇이냐, 너희 중에서 인간이 왕이 되어서 다스릴 수 있는게 아니다. 왕은 오직 한분 하나님 뿐이다. 너희는 이런 연약한 왕 말고 진짜 왕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진짜 우리의 왕이다 라고 해서 왕을 세웠는데, 그 사람도 결국은 변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인간 역사가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우리에게 오셨다.
8번에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신다 한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에베소서는 말씀한다. 이는 말을 지지리도 안듣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우리를 복종하게 하시기 위하여 무얼 하셨느냐, 중생의 은혜를 베푸셨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주님께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겠다 한다.
그리고 9번을 보라. 다스리고 지키는 일은 왕의 당연한 직무이다.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도록 다스리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이는 그분의 통치를 받고 그분의 다스리심에 복종해야, 원래 우리를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지극히 복되고 영광스러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자기 백성을 영원에서 영원까지 지키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완벽하고 영원하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임기 5년짜리의 지도자가 아니라 영원하다.
10번을 보라. 왕이신 그리스도는 원수를 정복하신다. 대적자들, 질병과 슬픔, 고난, 마지막에 멸망받을 원수인 사망까지도 주님은 다 정복하셨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그 모든 요소들, 예를 들어 유혹, 인생에서 마주할 법한 아주 심각한 고통과 고난들,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하는 모든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영혼을 저해하는 요소들, 대적들을 주님은 다 이기셨다.
여러분, 내가 훌륭하고 내 믿음이 탁월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항상 꿈꿔오고 그림 그려왔던 대로 항상 되어왔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조건과 상황과 환경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대적요소들을 막으시고 이것들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의 왕이신데, 왜 나에게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가? 왕이시면 잘 좀 다스리셔야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나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지혜로는 당장에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이것을 잠시 허락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결론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사장과 왕의 직분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적용을 해보자.
첫째로는 직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항존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항존직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것이다.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고 한번 집사는 영원한 집사, 해병대에서 쓰는 그런 이런 개념이 아니다. 목사, 장로, 집사의 세가지 직분은 주님 오실 때까지 항상 교회 가운데 있어야 하는 직분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삼중직을 온전히 수행하셨고, 완성하셨으며, 신약의 교회에 새롭게 직분을 주셔서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항존직을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직분 고유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공부할 시간이 또 있길 바란다. 어쨌든 직분을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직분을 존중해야 하고, 직분을 바르게 수행해야 하며, 그 직분을 잘 활용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의도대로 기도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기적인 기도, 편협한 기도, 잘못된 것들을 추구하는 기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은 내 틀린 기도를 마치 교수님이 내가 리포트를 제출하면 이에 대해 줄을 쭉 그어 다시 써오라는 식으로 하시는게 아니라, 새로 싹 고쳐서 교수님이 스스로 제출해 주시는 식이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가? 주님께서 우리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기도를 이처럼 온전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삼위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내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기도해야 한다. 그 영광스러움.
마지막, 교회와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를 생각하라 했다. 요17 장을 보면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나온다. 이 말씀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존재, 우리를 향한 열심, 사랑,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ccm 중에서도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라는 가사가 있다. 내가 기도할 힘이 없고, 기도할 여력이 없을 때에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감사하고 좋은 일이다. 그 때에 우리는 그 누군가를 두고 내 어머니를 떠올릴수도 있고, 나의 스승이나 내 동기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언제나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막상 돌아보면 나를 위해 기도해줄만한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하는 청년들이라거나. 찾아보면 왜 없겠나?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기도해줄만한 존재들이 잠을 잔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가 기도 많이 하고 내가 헌신 많이 해서 여기까지 왔다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의 은혜이다. 이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이 처리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일어날 때에도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를 지금도 당신의 손안에 통제하고 계시고 조절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평안을 누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인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