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성결
Notes
Transcript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람, 불륜’과 같은 주제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공공연하게 수많은 매체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2020년에 방영된 ‘쀼의 세계, 부부의 세계’일 것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유튜브나 sns를 통해 관련된 짤들을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에 여러 유명한 대사들이 있지만, 바람을 핀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에게 했던 가장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것을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아내를 놔두고 바람 핀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내와 / 바람핀 여인 둘다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간통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62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더 이상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더라도 형법상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형사처벌이 불가하더라도 민사소송을 진행할 수 있긴 하지만, 이전과 달리 간통이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만약 간통에 반대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통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간통, 곧 간음이 죄라고 말씀십니다.
지난주부터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의 범위를 육체적 살인뿐만 아니라 마음의 살인까지 확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간음에 대한 범위를 육체적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의 간음까지 확장하고 계십니다. 꼭 간음이라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마음에 음욕을 갖게 하는 오른 눈을 빼버리거나, 혹은 간음을 행하게 될 오른 손을 잘라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오른 눈과 오른 손을 지닌 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잘라내고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성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남성분들 같은 경우, 아름다운 여성을 보게 되면 마음 속에 음란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음란한 생각이 마음 속에 불일듯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명령을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눈과 손은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오른 눈과 오른손을 잘라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의 간음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 왼 눈과 왼손으로 간음을 저지르고,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해 엄격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또 다른 엄격한 율법주의를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갖기 위해서는, 간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득 문득 우리 마음 속에 음란한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간음은 아닙니다. 성적인 욕구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음란한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로 유명한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새가 우리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 그것은 막을 수 있다.” 순간 순간 마음 속에 음란한 생각이 들 순 있지만, 그 음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음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결국 그 음란한 생각이 행동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에 음란한 생각을 품어선 안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아예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음욕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내용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 중 제 열번째 계명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탐내다’라는 단어와, 오늘 본문에 나온 ‘음욕을 품다’라는 단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곧 내것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탐낸다면 음욕을 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입니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에 나온 것처럼, 구약에서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할 대상은 ‘이웃의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면, 곧 결혼한 여인이 아니라면 내가 결혼한 것과는 상관없이 음욕을 품어도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은, “만약 네가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면 누군가의 아내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해 음욕을 품으면 안된다”라는 뜻입니다. 간음의 기준이 여성의 결혼 유무가 아니라, 남성의 결혼 유무이고, 또 그 안에 음욕의 유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곧 “너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를 족한 줄로 여기고, 그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오늘 본문 31절부터 나온 이혼에 관한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31절에서, 구약 신명기 24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신 24:1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러나 이 율법의 말씀은 음행을 넘어 다양하고 더 넓은 해석들을 낫게 했고, 남자들이 부당하게 아내를 버리는 명분으로 악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 문헌을 보면, 아내가 밥을 태우거나 음식을 망친 경우에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하지 못한 것이 남편에게 수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 있는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고자 하면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못생긴 얼굴이 남편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혼하기 위해 정말 말도 안되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로 간음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로 이혼을 해선 안된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이혼에 대해 정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에 처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던 시대적 배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이 당시에는 여성이 이혼을 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이혼을 한다는 표현보다, 이혼을 당한다는 표현이 더 올바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혼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이 없고, 남편이 아내를 쫓아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시대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여성이 이혼을 당하게 되면,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여성들이 돈을 잘 벌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이 혼자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몸을 파는 매춘 행위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음행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포르네이아’인데, ‘포르네’, 창녀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포르네’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는 ‘포르노’의 어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것은 그 남편이 아내를 매춘부로 만든다는 것이며,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그 여인이 간음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또 음행한 이유 외에 이혼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윤리가 결여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살인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고, 율법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 가장 첫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오늘 본문에 ‘간음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또 다른 뜻은, ‘우상숭배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라는 것은, 인간이 사랑해야 할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도 함께 사랑하며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부의 세계에 나온 남자 주인공처럼, 자신의 아내도 사랑하고, 또 다른 여인도 함께 사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 가장 첫 번째 계명에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신들과 간음을 하던 말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 사이에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나만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바람을 핀다면, 정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구약의 여러 말씀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한 남녀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특별히 구약 호세아서의 말씀을 보면, 그 관계가 명확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와 고멜은 결혼하고, 그 사이에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고멜은 예전에 음란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호세아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 다시 음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값을 주고 다시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호 3:1-3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다른 남자와 간음한 고멜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고, 음란한 여인 고멜을 끝까지 사랑한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분명 율법에 의하면,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정말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에 나오듯 하나님은 “내가 너희만 사랑했듯, 너희도 음행하지 말고 나와 함께 지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이란 배우자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며, 한 사람만 바라보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 24:15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왕상 18:21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마 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재물과 풍요의 유혹에 주의해야 합니다. 방금 읽은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에서, 재물로 번역된 단어는 ‘맘몬’입니다. 이 맘몬은 아주 오래전부터 ‘재물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원어적 뜻은 ‘사람이 보다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원어적 뜻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맘몬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을 지배하던 신은 바알이었는데, 바알은 농사와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바알이 주는 풍요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정작 그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동안 지키시며, 그들에게 풍요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재물은 인간이 가장 강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맘몬은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재물을 갖게 되면 더 많은 재물을 열망하게 하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자신이 가진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맘몬이 가진 막강한 힘에 대해 경고하시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신적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며, 신앙의 간음입니다.
우리가 육체적 간음과 마음의 간음, 그리고 신앙의 간음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해야 한다고, 곧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온전한 거룩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포기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신앙의 거룩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구약 출애굽기 28장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이 입는 옷에 대해 28장 전체를 할애해서 상세히 설명합니다. 총 39절이나 되는 긴 말씀에서 제사장이 입는 옷을 설명하신 이유는, 그 옷을 입는 제사장들이 거룩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옷이나 입고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먼저 제사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구별된 거룩한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옷이 어떤 원단, 어떤 색,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상세히 말씀하시고, 제사장이 써야 할 모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 모자 위에 순금으로 된 패를 달아야 하는데, 그 패에는 이렇게 적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성결!”
머리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이며, 또 가장 중요한 부위입니다. 이처럼 머리에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자를 적은 이유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이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눈이 간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미간에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자가 있음을 잊지 말고, 날마다 기억하고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스스로는 거룩해 질 수 있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유혹하는 간음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난곡신일교회 청년, 그리고 성도 여러분. 혹시 육신의 간음과 마음의 간음, 그리고 신앙의 간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거룩함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룩함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 힘과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거룩함을 방해하는 것들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여러분의 컴퓨터나 휴대폰 바탕화면을 변경해 보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며, 제 휴대폰 바탕화면을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변경했습니다. 부적처럼 이 문구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육신과 마음과 신앙의 거룩을 이루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