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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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라”
에스겔 16장 6절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친구들 반갑습니다.
우리 매주 만나는데, 뭔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죠?
지난 2주동안 아동부랑 연합예배도 하고, 지난주에도 본당에서 연합예배 드리고,
그래서 뭔가 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반갑고 더 많이 보고싶었습니다!
함께 오늘 설교의 제목을 읽어볼까요? “살아있으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또한 우리에게 “살아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설교를 통해 우리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셨던, 또 바라시는 하나님의 세밀하고 따뜻하신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전도사님이 지난 2박 3일동안 사경회라는 걸 했어요
사경회가 뭐냐면요 수련회인데, 한 800명정도되는 전도사들이 다같이 모여서 하는 수련회 같은 거예요
모~든 교회들에 전도사님들이 다 있잖아요? 그 전도사들이 다같이 모여서
하루 종일 찬양하고, 말씀 듣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사경을 헤맨다고 해서 사경회는 아니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의미에서 사경회를 했는데,
이 사경회를 하는 동안 우리 친구들 생각이 정말 많이 나더라고요
기도하면 할수록,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록, 성경공부를 하고 찬양을 하면 할수록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이 자꾸 생각나고,
밤에 자려고 누우면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고 그렇더라고요
그렇게 하루 종일 우리 친구들 생각만 하다가 전도사님이
오늘 본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친구들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 만큼이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에게 여러분을 어떤 심정으로 맡기셨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과 감정을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가운데 허락하신 비전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에스겔 16장에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이 빼곡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과 더불어
그 사랑을 저버린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의 모습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상한 표현이지만, 언제나 그랬듯 오늘 말씀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버림 받으시고, 상처 입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구약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꽤나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버림받고, 상처 입으시고, 배신당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옮겨지면 예수님이 버림 받으시고, 상처 입으시고,
고난 당하시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배신당하시는 사랑 덕분에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안심하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쉽게,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고 하나님을 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친구들이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꺼이 버림받기를 결심하시는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한 안타까운 현실 중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곳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만큼,
하나님이 겪으시는 아픔과 상처, 버림받으심도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이곳에서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제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들,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바 되겠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낸다고 한들,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모두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를 품고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피투성이 엉망진창인 우리를 보며, 살아있으라, 살아만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심령에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더이상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피투성이, 엉망진창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전도사님에게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 전도사님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이 능력이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생명을 살려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전도사님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며 전도하는 걸 굉장히 정말 싫어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라고” 말하는 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말은, 전도를 하는게 부끄러웠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고, 소망이 있고, 유일한 희망과 구원이 있는데,
이 가장 좋은 것을 알아볼 능력도, 실력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굳이 설득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뭐라고 대답하나요?
전도사님이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 하니까
“안 사요~”그러더라고요
아니 도대체 우리 예수님이 왜 조롱 받아야 합니까?
내가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의 이름이 조롱 당합니다.
전도사님은 그게 너무 싫었어요
죽기보다 싫었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폭발훈련을 받으면서도 노방전도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도망다녔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 전도를 안 했을까요?
아니요 모르는 사람,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예’ 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을 전했어요
사회복지서비스에는 이런 현상을
크리밍(creaming)현상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크리밍 현상을 쉽게 말하면
어떤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때,
유순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대상을 선별해여 복지를 몰아주고,
비협조적이거나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대상은 배척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 잘 듣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말 안 듣고 성가신 사람은 배척하는 것이 크리밍 현상입니다.
그 당시 전도사님에게는 복음의 크리밍 현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을 법한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상당히 합리적인 전도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음을 듣고 싶은 사람은 듣고, 듣기 싫은 사람은 듣지 않고,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배려를 함께 실천하며,
대상자를 고려하여 섬세하고, 세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종합하여 생각해볼 때 이 방법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하나님이 이러한 복음전파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을 사람만 듣고, 관심 없는 사람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의 말과 삶이 가치 있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들을 법한 사람을 선별하여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한 공동체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때
살아 있으라 선포하시고 살려 내셨습니다.
아무도 그 눈물을 닦아 주지 않고,
씻겨주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살피지 않을 때,
정성껏 먹이고, 재우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스겔 16장 60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너를 사랑했던 그 첫 날, 그 첫 약속을 기억한다.
그 약속을 가지고 너를 사랑하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살려내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너는 피투성이 엉망진창으로 있을지라도 목숨만 붙어 있어라
내가 너를 살려내겠다.
주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고, 끝까지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 예배당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들을 사람만 듣고, 예배할 사람만 예배하고, 관심 있는 사람만 기도하는 일,
이제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
이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여러분의 생명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고작 여러분의 일주일 중 1시간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고작 인성을 함양하기 위한 교양과목강의 정도를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살려내라고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의 생명은 전도사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을 목회자로 부르실 때,
또 중고등부의 전도사로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으시고,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너는 가서 나의 구원을 선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최소한 주일 중고등부 예배에 나아온 여러분 만큼은 살려낸다.
살려내고, 먹여내고, 길러내서,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승리하게 만들어 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이 살아남기를 바라십니다.
숨만 붙어 있는 인생 말고, 진짜 인생을 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또한 여러분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단,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겨드릴 때 그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삶이 고단하고 힘드십니까?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어디계신지 모르겠고,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성은 상실해버렸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십니까?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욕심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고 쓰러져 계십니까?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태어날 때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주지 않았고, 네 몸을 씻어 주지도, 깨끗하게 하지도 않았고,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도, 포대기로 감싸주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한 가지만이라도 너에게 해줄만큼 너를 불쌍하게 여기고 돌보아 준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태어나던 바로 그 날에, 사람들이 네 목숨을 천하게 여기고, 너를 내다가 들판에 버렸다.
그 때에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다가, 핏덩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고, 핏덩이로 누워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제발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내가 너를 키워 들의 풀처럼 무성하게 했더니, 네가 크게 자라 보석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되었다.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며 피투성이가 되어 버둥거리는 우리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보았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살아만 있어라.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주님이 다시한번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그 손을 맞잡고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가며
담대히 주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