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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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하나님
시편 139편 1-18절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주일 예배자리에 나아온 한빛교회의 귀한 성도님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먼저 앞뒤좌우에 계신 분들과 인사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인사해보겠습니다. 우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시며 ‘우와’하고 감탄하셨을 줄 믿습니다.
그렇게 존귀하게 지음 받은 여러분과 함께 예배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터스텔라 하나님입니다.
인터스텔라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던 흥행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요
혹시 성도님들은 인터스텔라의 뜻을 알고 계신가요?
인터스텔라는 ‘~의 중간의’, ‘~의 사이의’를 뜻하는 접두사 Inter과
별의, 행성의 라는 뜻의 Stellar가 합쳐진 합성어로, 행성 간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오늘 설교의 제목인 인터스텔라 하나님 이라는 말은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 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과연 오늘의 본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오늘은 시편 139편의 말씀을 통해 별과 별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모든 한빛교회의 성도님들이 신비롭고 다채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별과 별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공간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시공간의 법칙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법칙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시간과 공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한 문장을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별과 별 사이에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럼 이 주제를 가지고 함께 시편 139편 1-18절이 설명하는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반복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시나이다, 아시오며, 아시오니와 같은 ‘알다’의 표현과 보셨으므로와 같은 ‘보다’의 표현입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주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보시고, 알고 계시며
우리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안수하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본문에서 ‘알다’라는 라는 단어로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흐]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부부사이의 앎, 즉 ‘동침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다는 것은 마치 부부사이와 같이 숨김없이, 거짓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신적인 통찰력으로 꿰뚫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보고 계신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ESV영어 성경으로 본문 1절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O LORD, you have searched me and known me! (Ps. 139:1 ESV)
오 로드, 유 헤브 설취드 미 엔 노운 미
방금 읽은 영어 문장을 한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 보시고, 나를 알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이 우리를 아시는 근거가 우리의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 보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시편 121편 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그리고 다로 다음 절인 121편 5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이유는 지키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오늘 말씀 5절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를 익히 아시는 주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여기에서 ‘둘러싸다.’로 사용된 동사 [짜바르]는 원래 전쟁 용어로 ‘포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둘러싸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 뒤에 안수하셨다라는 축복의 메시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내용은 마치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의 손이 모세를 덮었던 것과 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빈틈없는 보호하심과 따뜻한 손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보고 계시다면,
우리의 죄인 된 모습, 연약한 모습, 깨어진 모습,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 조차도 다 아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런 주님은 왜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우리의 모든 말과 모든 행위를 다 알고 있다면 과연 우리 중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콕 집어서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고 지키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정답이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선을 두시는 이유는 우리를 벌하기 위함도 아니고, 정죄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이유 역시도 약점을 잡아서 혼을 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알고자 하시며,
또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끊임없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본문 5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둘러싸는 것 역시도 포위하여 가두어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외압과 위협으로부터 지키시고 감싸 안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라보심과 알고계심, 둘러싸심은
우리를 향한 정성 어린 따뜻한 눈빛이고, 충만한 사랑의 공감이며, 가장 안전한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이 ‘알다’와 ‘보다’, 또 ‘둘러싸신다’라는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나눈 알고 계신 하나님, 보고 계신 하나님, 둘러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과 어린 아이의 관계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 결혼 하셨나요?
[답변듣고]
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지만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대부분 아이를 키우셨고, 또 장성한 자녀가 있으실 줄 압니다.
그래서 성도님들, 특히 우리 어머님들께 질문 드립니다.
아이 키우실 때 울음 소리만 들어도 대변인지 소변인지, 배고픈지, 잠 투정인지 기가 막히게 알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안 키워봐서 모르지만 부모가 되면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뭘 원하는지 알게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또 어떤가요?
아이가 유치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운동회나 재롱잔치, 발표회를 할 때는 어떠셨나요?
100명이면 100명, 1000명이면 1000명 아무리 많은 수의 아이들이 모여 있어도 내 아이만 보이지 않으셨나요?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냥 보이는 것입니다.
또 둘러싸신 경험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재울 때나 밖에서 데리고 다닐 땐 어떻게 하셨나요
포대기로 둘러싸서 안전하게 꽉 묶고 업어 다니시지 않으셨습니까?
둘러싸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둘러 싸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 보는 것, 둘러싸는 것 모두 사랑입니다.
제가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게 한 가지 씩만 예시를 들었는데,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하니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어린 아이가 어떠한 의심도, 생각도 없이 부모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을 구할 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넘어짐을 보고 계시고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 감싸 안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시는 모든 한빛교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번째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다윗은 본문 17-18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언어학자들은 사랑이라는 말이 ‘사량’에서 유례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량’이라는 말은 (생각 사)에 (헤아릴 량)으로 ‘생각하여 헤아리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는 다윗의 고백은
이미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상태에서 하는 간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바다의 모래 보다 많아서 다 셀 수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래보다 많고 보배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여러 모양과 속성의 사랑이 있지만,
오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독일의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부는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이요
성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이며
성령은 정복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의 온전함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으로 인해 고난 당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이고 하나님의 고난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고난 당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릴 위하여 우리 죄를 용납하시고 십자가를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그러워 진다는 것은 인내하는 사랑을 배우는 것이고,
남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사랑으로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금 더 낮아지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양보하고, 기다려주고, 손 내밀어주는 따뜻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에 뿌리 박힐 때
사랑으로 터가 굳어지고 생명의 열매가 가득히 맺힐 줄 믿습니다.
많은 학자와 목회자들은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밭에 심고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가길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길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가 주어진 오늘의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뛰어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듯
우리가 밟는 땅이 변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변하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별과 별 사이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본문 13절과 16절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주님이 나를 보셨으며
나에게 정해진 날들이 아직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발달 과정과 발달 심리학을 보면 사람의 인격과 성격, 삶의 형태 등 내적인 성향이
0~2세 사이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즉 한 사람의 내면을 이루는 요소들이
너무나 연약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달심리학에 근거하여 아동의 심리 발달과정을 설명하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좋은 보호자를 만나는 아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서 긍정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고,
반대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없는 보호자를 만나는 아이는 높은 확률로 불안감을 기반으로 한 자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인격적인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면
보시는 바와 같이 아주 멋있게 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 모인 우리 중 그 누구도 직접 부모님이나 보호자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하는 0~2세 사이에 가정환경이나 공동체 구성원을 선택할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기에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인격과 성향,
내적 자아가 결정된다고 하면 이것은 공평과 공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개념과도 굉장히 위배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13-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주님이 직접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형질이 이루어지기 이전,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사람의 그 어떠한 개념도, 형태도 없을 때부터 우리가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우리의 모든 삶을 예비하시고 지금까지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과거에 우리를 빚으시고 창조하신 주님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남은 인생까지도 동일하게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아직 우리 삶에 벌어지지 않은 모든 일과
모든 순간 조차도 전부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와 여러분이 어떤 부모님을 만나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인격을 형성했는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시간을 초월하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 있는 그대로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또한, 성도님들이 어떤 부모였고 자녀에게 어떤 교육을 했고, 어떤 인격을 보였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주님이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빚으시고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또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포함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도 찾아오시고
날마다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섭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 7-10절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펴도 거기 계시며, 바다 끝에 거주할 지라도 거기에 계시니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공간적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이나, 스올이나,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스올은 거리상으로는 아주 먼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적인 의미로는 영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다 끝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끝이라는 표현은 세상의 끝, 즉 시인이 물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표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도망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우리를 기다릴 것이며,
세상의 끝, 벼랑 끝, 바다의 끝까지 밀려 요동할지라도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상황과 여건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 각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있을 줄 압니다.
코로나로 인한 사업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그 밖에 수만가지 아픔과 상처들,
혹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영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신앙생활 열심히 했었는데,
코로나 전에는, 건강했을 때는, 사업이 잘 됐을 때는, 내가 하나님 잘 믿었었는데 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식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절망하는 성도님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빛교회의 성도님들이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과학과 이성과 논리와 법칙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자유하시듯
우리도 성령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1-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또 2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혹시 지치고 힘이 들어서 신앙의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이제 그만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만 아파도 괜찮습니다.
근심, 걱정, 아픔, 상처 다 내려 놓아도 괜찮습니다.
내 삶의 문제를 내려놓는 것, 그거 무책임 한 것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주님이 해결하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당장의 삶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항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함께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건데요
저를 따라서 함께 고백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나를 지키십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키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지키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꼭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데 우리를 용납 하시는 이유는요,
과거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변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미 우리의 삶은 변화되고 회복된 것입니다.
끝으로 귀한 한빛교회의 성도님들께 권면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우리와 날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든든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날마다 생각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삶에 찾아 오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전부를 내어드릴 때,
주님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유일한 쉴 곳과 평안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나약함, 죄인 된 모습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탓하지 않으시고, 벌하지 않으시며
참고, 기다리고, 인내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 간의 삶을 살아가실 때
부족하지만, 서툴고 어렵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크게 한 번 부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