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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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승리 vs 보이지 않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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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8:4–17 (NKRV)
4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7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8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9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10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1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2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13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 서론 - 다양한 지식 vs 분명한 지식
어느날 깊은 바다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아귀가 빨간 물고기를 잡아 먹으려다가 놓쳤습니다. 그 작고 빨간 물고기는 떼를 지어서 물고기 공동체로 달아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배고픈 아귀는 이런 소문을 냈어요. "얘들아~ 빨간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데~"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감기가 걸리면 열리 펄펄나잖아~ 그래서 걔들이 빨간거야!! 그런것도 몰랐어?!" 그러자 물고기 공동체는 수근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당장 나가!!" 빨간 물고기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냈어요. 결국 빨간 물고기들은 아귀의 먹이가 되고 말았답니다. <감기 걸린 물고기> 中
이 이야기는 가짜 정보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해학적으로 그려놨습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면서 좁고 깊은 지식보다, 넓고 얕은 지식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분명한 지식보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 전부인 것처럼 잘 포장되어서, '아니면 말고'라는 Tag가 달린채 전달됩니다. 이런 미디어의 특성을 이용해서 왜곡된 인식과 편가르기가 지금도 이뤄지고 있어요. 그래서 빅데이터 시대에 그 다양한 정보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대해서 아는 것도 마찬가지 같아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열심이 오히려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 사사시대라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기 속에 사사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을 한 사람씩 뜯어내어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대적과 맞서 싸우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들이지만 모두가 극복해야 하는 자기만의 상처가 있고, 처절함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사로 부르셔서 그들의 한계 너머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이 불완전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사들의 역할이 뭔지 아시나요? 세상을 뒤집어 놓는~ 세상을 전복시키는 그런 역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탁류와 같은 시대에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 흐름, 그 맥을 끊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사'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잠깐이라도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 '사사'였어요.
그래서 이 사사들은 사사기 뒤로 가면 갈수록 상태가 점점 안좋아져요. 사사기 마지막 사사로 기록된 삼손은요. 단 한 번도 여호와를 위해서 싸우지 않았아요. 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구약 학자는 삼손을 가장 형편없는 사사라고 혹평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어요. 그들이 하나님의 바람을 다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모습이 많았지만 분명 그들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우리에게 바라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사사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신거예요. 저와 함께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 하나님이 바라신 것 1 : 내 힘을 빼라
제가 오늘 함께 나누고 싶은 성경말씀은 사사들 중에서 기드온의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기드온을 다 아시죠.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름받아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어요. 그리고 미디안 족속과의 일대 결전을 치뤄서 승리했어요. 그것도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군대 120,000명과 싸워 이겼습니다. 기드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로 도망간 미디안의 왕들과 15,000명의 미디안 군대를 뒤쫓아 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드온과 300명의 사람들은 마침내 적군 미디안을 격파하고 화려한 승리를 이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결과'라는 건 Input 이 있어야 Output 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이룬 승리도 분명 기드온의 실력이나 전략, 용기, 또는 그가 가신 신앙적 항목들이 중요하게 작용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니라고 말해요. 이 승리에서 기드온의 Input 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지만 Output,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내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내 힘으로 승리했다고, 내가 가진 것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는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덜어내십니다. 재정을 덜어 내시고, 시간을 덜어 내시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마저도 덜어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게 이미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400배나 더 많은(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군대 120,000명)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밖에 없는 단 한 가지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의 이야기의 핵심은 그가 어떤 승리의 결과를 얻었는가 보다,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에 포커스를 둬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그 승리의 성격이 뭔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화려한 승리나 아름다운 삶의 화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거저받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Input 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거예요. 전기 스위치를 떠올려 보세요. 어두운 방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서 딸깍, 딸깍 스위치를 켭니다. 그런데 전기가 없으면 저 스위치는 무용지물이에요. 우리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과 헌신, 희생과 결단... 이것들은 스위치와 같은 거예요.
기드온이 얻은 승리는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이런거예요.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이 되는 삶. 그런 삶을 우리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 내 힘을 빼지 않으면...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과 치룬 전쟁을 보면 우리가 빼야 할 걸 빼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됩니다. 먼저, 미디안과의 첫번째 전쟁을 치룰때 사사기 7장 18, 20절을 보면...
"[사사기 7:18, 20]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 20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이 전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기드온을 위한 것인지 애매하게 뒤섞여 있어요. 그래서 이게 헛갈려요. 이 전쟁이 하나님을 위한 전쟁인지, 기드온을 위한 전쟁인지. 구분이 잘 안돼요.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그리고 이제 도망친 미디안의 남은 군대를 쫓아가서 두 번째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에요.
강을 건너고 강 동편에 위치한 숙곳을 지나면서 재정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지쳐 있는 자기 군사들이 쉬면서 허기를 달래기 위한 음식을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미디안을 격파한 기드온은 그곳 사람들에게 승리의 축하를 받으며 환영과 영접을 받을 권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기드온은 단지 굶주린 그의 군사들을 위해 필요한 식량을 제공해 줄 것을 매우 겸손히 간청했을 뿐입니다.
"[사사기 8:5]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데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5절)
하지만 숙곳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긴게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 8:6]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6절)
그들은 기드온의 빈약한 군사수를 보고서 결코 그들이 미디안의 남은 군대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미디안의 남은 군대는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후퇴하고 있었지만 1만 5천 명이나 되는 미디안의 남은 군대가 이미 그들이 보는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쫓고 있는 300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미디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기드온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은 두려움에 휩싸여 강자의 눈치를 보는 약자의 모습다. 이것은 브누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형제와 같은 기드온과 그 일행에게 조그마한 동정심마저 가질 수 없었고, 기진맥진한 자들에게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있는 공로자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가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모욕과 경멸로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남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고 평안히 돌아 올 때 그들의 살을 찢고, 그들의 망대를 헐겠다는 보복을 선언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쟁을 너무 쉽게 승리하고, 승전보를 알리며 돌아오는 길에 기드온은 자신이 말했던 대로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찾아가서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와서 보란듯이 그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며 처벌했습니다. 그들을 징벌하고, 그들의 망대를 헐고, 성읍 사람들을 죽였습니다(16,17절).
여기서 우리는 이 전쟁이 더 이상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기드온의 전쟁, 기드온의 승리로 변해버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 자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로운 사사로서 무례하고 못된 사람들을 징벌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향한 기드온의 분노는 절대로 정당하고 볼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 13:27에 보면 이 숙곳은 여호수아가 갓 지파에게 분배해준 땅이었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가나안 족속의 땅이 아닌 이스라엘의 땅이었다. 그 사람들도 더 이상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드온이 품은 이 보복심이 동족을 향해 칼을 들만큼 메마르고 잔혹한 행동으로 이어진 건 그의 강팍한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건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는 몰라도 진짜 승리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는 승리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에서 300명의 군대로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너무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이라면, 진짜 싸움은 기드온 안에서 치뤄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따를 때 수 많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착착 이뤄지지 않는 일들, 우리 안에 납득되지 않는 상황들, 나의 선한 열심을 막아서는 것같은 여러 장애물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나를 멈춰세우시는 분도 하나님 이십니다. 혹시라도 나의 길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을 옮기시고, 해결해 주시기기를 믿고 맡겨 드려야 합니다.
# 하나님이 바라신 것 2 : - 다움을 더하라
사사기 내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바라신 것이 이런 것입니다.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뭐라고 부르셨는지 아시나요?
"[삿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큰 용사여! 기드온이 정말 '큰 용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사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지체의 어려움을 외면했던 숙곳, 브누엘 사람들의 모습은 이전의 기드온 자신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 했던, 그것도 숨어서. 그게 누구였습니까? 바로 기드온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서 밤늦은 시간 남몰래 마음 졸이며 행했던 기드온 이었습니다. 이전에 자신도 어둡고, 두려웠던 시간 속에 잔뜩 움추러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미디안을 향한 두려운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 "큰 용사여"라고 부르셨던 이유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용사다움을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서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인다움을 살아내라고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도 이렇게 적용해요. 내가 온전한 목사가 될만했기 때문에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세우신게 아니라!! 한 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힘을 덧입어서 목사다움을 좀 살아내라는 것으로 들렸어요. 이 자리에게 우리 모두를 향해 성도다움을 바라시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요?
숨어 있던 기드온에게 용사다움을 바라시며 승리를 안겨주신 주님 을 위해 나의 기분과 감정을 내려놓는 것. 하나님의 승리를 바라보며 지금 내가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집어 삼키는 것. 내 안에 고여 있는 썩은 감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정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는 모습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는 열매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승리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박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 속에 어떤 악한 마음도 틈타지 못하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이런 내밀한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용사다움, 성도다움, 목사다움은 이런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3 : 내 몫의 상처를 드리라
자신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씻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방암으로 오랜 시간 항암 투병을 하셨던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집사님은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격감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환우들을 전심으로 보살폈습니다. 갑자기 우울해 질 때 데리고 나가서 주위를 환기시켜주고, 기력이 없을 때 입 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고, 위로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험들은 이렇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약함을 긍휼히 여기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억눌렸던 감정을 피해의식과 함께으로 폭발시켰습니다. 기드온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 이제 그는 재판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모든 방백들을 포위하고 그들을 사로잡아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자들은 내가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 부탁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15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보복할 때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기분이 우선이었고,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휘아래 시작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전쟁이 어느새 기드온 개인의 복수를 위한 개인의 군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복수를 위해 감정의 폭군이 되어서 적군과 아군을 혼동하게 됐습니다.
때로 우리는 감정에 지배당합니다. 나를 무시한 사람, 나에게 모욕감을 주고, 수치심을 안겨 준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기드온이 그저 자신의 짓밟힌 자존심과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속에 자리 잡은 감정들은 절대로 옳은 방법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 만 명의 적군을 물리쳐 주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지만, 열매없이 은혜만 구하는 백성은 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면 그에 걸맞는 열매로 화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진짜 싸움은 우리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밀한 곳에서 더 치열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맞보아야 합니다.
# 결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상처마저도 당신께 가지고 나아오는 그 상한 마음의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는 기드온의 상처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고, 안 될 거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역전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낸 산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을 향해 품었던 불의한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지 못했지만...
우리 안에서 고여 있는 썩은 감정들로는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를 향해 흘러들어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상한 마음을 씻어내고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혹시 우리 안에 상처 입은 감정, 상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의 그 썩은 자리를 도려내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드온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고치시고,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상한 마음의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 성도다움, 의인다움, 그리스도인다움을 더 선명하게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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