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시는 예수님
Notes
Transcript
찬송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
본문 눅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자비하신 하나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 지었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하는 마음들을 더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주님 이 시간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날마다 거룩해지게 하시며, 주님의 마르지 않는 생명샘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우리의 영이 날마다 소생케 하시고, 믿음 안에서 오래참음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들, 영적으로 억눌리고 궁핍한 자들,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 병상으로 고생중인 자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그들을 만져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거룩한 주일, 주의 모든 권속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대언할 종의 연약함은 가리워주시고, 오로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시간만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선포될 때에 우리의 두 귀가 울리게 하시며, 걍팍한 마음들이 말씀 안에서 흔들리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시간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현대 한국 사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주함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바쁘다" 라고 한다. 사회가 부추기는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너도 나도 분주하게 살아간다.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었다. 첫 출근하는 날에 들뜬 마음으로 지하철에 탔다. 너무나 충격이었다. 지옥철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어터진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다보면 갑자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갈 때가 있다. 그럴때는 굳이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뛰게되더라.
서울에 취업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비슷한 것 같다. 왜 다들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모르겠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나도 왠지 바쁘게 살아야만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왠지 뒤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현대 사회가 그렇다. 매우 분주하다. 물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목적을 잃어버린채로, 내가 왜 이렇게 분주해야 하는지, 무얼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로 분주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다하여 맡겨진 사명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자기 일용할 양식을 먹을 것에 대해 말씀한다. 그런데 때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잠시 쉬라고. 분주하던 발걸음을 잠시 느긋하게 움직이라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도 쉬어갈 줄 아셨던 분이셨다. 이 쉼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휴식으로서의 쉼이 아니라 안식으로서의 쉼을 말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안식을 누리셨는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삶의 정황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매우 다르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의 삶이 바빠봐야 오늘날 우리만큼이나 하겠나 싶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도 매우 바쁜 분이셨다. 그분의 사역을 요약하면 늘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일이었다. 어쩌면 오늘날 유명 부흥강사보다 훨씬 더 바쁘신 삶을 사셨을 것이다. 주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병환자를 고치시며, 중풍병자를 고치실 것이다. 게다가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거대한 사역을 시작하시려 한다.
이렇게 바쁘고 중대한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때로 일을 중단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 일하던 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셨다. 예수님은 쉬시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제자들에게도 자주 쉬라고 하셨다. 심지어 주님은 폭풍 가운데 흔들리는 배에서도 주무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겨울 시즌에 대한 기록에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아마도 이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시면서 휴식을 취하시지 않았겠나 추측한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볼 때 주님은 쉬셨고, 절대로 가속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오히려 주님이 열심히 일하셨던 때가 있었다. 그 때가 언제였는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일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분명한 목표와 자기 의식을 갖고 행하신 일이었다. 물론 주님은 이 날에도 쉬실 수 있으셨지만, 유대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쳐주시고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뜻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로 일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셨다.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가? “사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적인 쉼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휴양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쉬셨다. 그토록 위대한 일을 감당하시는 중에도 주님은 하나님과 호흡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 안에 계셨고, 하나님과 동행하셨다. 하나님이 참된 안식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가? 가장 큰 이유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구원을 믿지 못한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지 못한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성경은 믿음이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믿음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야말로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 허상일 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자리가 과연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욕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사치와 향락을 꿈꾼다. 남들보다 더 사치스러운 인생을 꿈꾼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환경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 움켜쥐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나의 밑 빠진 욕심의 독에 한없이 이것 저것을 부으려 하다보니 가속할 수 밖에 없다. 휴식을 줄여가면서 일을 해야만 한다. 안식을 포기하며 공부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이 세상의 원리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있어야 누리고, 힘이 있어야 복종 시키고, 힘이 있어야 높은 자리에 올라선다. 힘이 없으면 도태되고, 힘이 없으면 무시당한다.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을 동경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나의 인생의 주도권을 기꺼이 내어드린다. 결국 세상의 물질과 명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에게 안식이 어디있겠는가. 그저 죽는 그 순간까지 매여 살고 조종당할 뿐이다.
심지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도 안식하지 못한다. 안식은 휴식과 다르다. 안식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게 아니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안식은 하나님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주일에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왜? 주일에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님께 나와있지만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지도 않는다. 한적한 곳으로 나오지 않았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안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는가? 첫째로, 기쁨이 메마른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니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있겠는가? 메말라버린다. 또한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가득해진다. 염려는 무엇이고 근심은 무엇인가? 염려는 걱정과 생각이 많은 것이다. 근심은 초조해하고, 불안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이 많다. 이것 저것 계산할 것이 많고 걱정도 많다. 불안해 하고 힘들어 한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까?”는 염려이고,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것은 근심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늘 분주하며 조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 휴식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왜 안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에 쉬셨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휴식의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7일째 되는 날에 복을 주셨다. 이는 복을 베푸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창조의 완성인 7일째 되는 날에 완전한 안식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날을 안식일 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안식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깨어졌다. 그래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만물이 인간을 거슬르기 때문에 인간은 수고해야만 하고 땀을 흘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이 땅에서의 안식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그분의 안식을 누리길 원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안식으로 초청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7일째 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작정 쉬라고만 하시진 않았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며 안식일에는 하나님 안에서 쉬라고 명하셨는데, 6일째 되는 날에 만나를 두 배 주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심을 증거하셨다. 일곱째 날에는 수고로울 필요 없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하나님 안에서 누릴 평강이라 생각하지 않고 육체적인 쉼의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던 것이다. 주님이 참된 안식을 주신다. 예수님은 안식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시다. 그분을 믿는 자에게 모든 멍에를 내려놓게 하시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오늘도 우리는 주일로 모였는데, 바로 이 이유로 인해 주일이 중요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일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들까지도 등장하였다. 물론 우리는 일상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세상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통해 오늘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참된 안식을 누리면서 장차 다가올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게 하셨다. 맛보게 하셨다.
주일의 중요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풍성히 경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장차 주실 영원한 안식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지 않나?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지옥엔 가기 싫고 하니 천국에 가고 싶으신 것인가? 우리가 천국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진정한 예배와 영원한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아가며 진정한 예배도 사모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안식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참된 안식을 빼앗고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바쁘게 보채어 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쉼에 대한 결단. 안식에 대한 결단이다. 우리는 이 결단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결단은 무엇이 있을까?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 한다.
첫째, 멈춰서길 잘 해야 한다. 중단할 때 중단할 줄 알아야 한다. 뭔가 계속 하면서 분주한 삶을 살았는데, 이것이 정말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게 맞는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무얼 원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 주 동안 이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되, 정한 날에는 삶의 현장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교회의 공적 모임의 자리, 예배이다.
성도는 회집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주일 공예배는 물론이고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그런데 멈춰 서야 할 때 서지 못하고, 떠날 떄 떠나지 못하니 예배의 자리에 와서도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떨쳐내질 못한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당연히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 예배의 즐거움, 신앙생활의 기쁨들이 모조리 메말라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복이 있는 자들은 의에 주린 자들이다. 의에 주렸기 때문에 다른 것들로는 나의 주림을 채울 수가 없어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이다. 의에 주렸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는 그 주림을 충족시킬 수 없다. 이처럼 의에 주려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이처럼 멈춰서기를 잘하길 바란다. 늘상 하나님 중심으로 열심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정한 주일에는 삶의 현장을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안식하는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해야 할 것 두번째, 나의 삶의 거품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인생의 짐이 많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우리의 지나친 욕심들이 거품이 되어 더 많은 필요 이상의 짐들을 이고 살아간다.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지나치게 분주한 삶을 산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 허황된 삶의 거품들을 거둬내어야 한다. 오해하지 말라. 저는 여러분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내려놓음이라거나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산에 들어가서 속세와 연을 끊고 도나 닦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 하나님 지향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매우 단순한 삶을 사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지만 또 하나의 별명은 ‘파로이코스’ 곧 나그네였다. 나그네의 특징은 무엇인가? 먼 길을 떠나면서 이것 저것 많은 짐을 짊어지면 얼마 못가 쓰러진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그네로 불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쾌락에 얽메이지 않았다.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았다보니 삶에 거품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 공동체 가운데 나보다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꺼이 나의 것들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었다. 돈에 얽메이지 않았고 명예욕이 없었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투명하였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쓸 수 있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돈이나 명예나 쾌락이나 이런 것들을 좇아 살아간다. 우리의 짐이 너무나도 무겁다. 더 가지길 원하고, 더 인정받길 원하고, 더 누리길 원한다. 돈이나 명예와 즐거움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지배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우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돈에 지배를 당하게 되면 맘몬이 우리의 신이 되고, 쾌락을 좇아 살면 쾌락이 우리의 신이 된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돌이키고 그 외의 부수적인 거품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 하셨다. 이제 세상의 여러 거품들을 제거하고, 헛된 짐을 버려두며 예수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짊어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안식하는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해야 할 마지막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어야 한다. 룻기의 나오미 가족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향했다. 그들은 기근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결과와는 전혀 반대로 그들은 텅 빈채로 돌아와야만 했다.
반면 이방인이었던 룻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두려울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했다. 그 결과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날개 아래 도움 구하러 온 너에게 하나님이 평강 주시길 원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날개 아래로 쉬러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라합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온 정탐꾼들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세상 여리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늘상 우리를 조바심나게 만들고, 염려와 근심으로 인도한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원하는 대로 불의를 따르게 된다. 아브라함은 애굽의 바로를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주는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결국 불의한 일들과 손잡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숨으러 찾아온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은 지키시고 돌보시며 보호하신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말씀을 맺는다. 초대교회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모였었다. 그 가운데는 왕족이나 귀족도 있었겠고 노예들도 있었다. 당시 노예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되면 주인보다 평소 3시간을 먼저 일어났다고 한다. 노예에게는 쉬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예배드리고 다시 하루 종일 노동하고 저녁늦게 모든 일과를 마치고 다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어찌 보면 주일날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일정들이 평일보다 힘겹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잠을 포기해야 했고, 쉼을 포기해야 했다. 답답하고 안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다. 그들은 예배를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진정한 안식을 누렸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안식하고 있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길 원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셨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없이는 안식이 없다. 우리가 주 안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의 거품과도 같은 짐들을 내려놓으며,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새롭게 나아가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