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2 저녁] 하나님을 영화롭게 즐거워하는 삶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39 views
Notes
Transcript
찬송 13 영원한 하늘나라
본문 고전 10:31
자비하신 하나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 지었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하는 마음들을 더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주님 이 시간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날마다 거룩해지게 하시며, 주님의 마르지 않는 생명샘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우리의 영이 날마다 소생케 하시고, 믿음 안에서 오래참음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들, 영적으로 억눌리고 궁핍한 자들,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 병상으로 고생중인 자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그들을 만져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거룩한 주일, 주의 모든 권속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대언할 종의 연약함은 가리워주시고, 오로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시간만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선포될 때에 우리의 두 귀가 울리게 하시며, 걍팍한 마음들이 말씀 안에서 흔들리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시간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행위들에는 사실 목적이 있다. 갓난 아이들이 행하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에도 그들만의 목적이 있고, 우리가 공부하고, 일하며, 먹고 마시며, 잠을 자고 여가시간을 보내는 그 모든 일들에도 분명한 목적이 따른다. 인생에 목적이 없는 일들은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창조하실 때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의도나 목적 없이 지으셨다? 그저 우연찮게 이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을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분명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하심에 따라 창조된 거룩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하찮은 인생, 별 볼일 없는 인생, 의미 없는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목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분명하고도 선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본래 목적대로 우리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강대상은 설교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설교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이 강대상을 만든 사람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설교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식탁의 용도로 사용한다면 이는 이를 만든 사람의 의도와 맞지 않게 잘못 사용하는 셈이다. 볼펜은 글을 쓰라고 만든 것인데, 볼펜으로 이를 쑤신다면 이것 역시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잘못 사용하는 셈이겠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더이상 상위의 개념이 없는, 가장 극강의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한 대학교수와 학생의 대화이다. “학생! 무엇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걸어가나?”, “네 교수님 공부하려고 도서관에 갑니다", “그렇구먼, 공부해서 뭐하려고?”, “네 교수님,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취업하려구요", “좋은 회사에 취업해서 뭐하려나?”, “좋은 배우자 만나서 결혼해야죠", “좋은 배우자 만나서 결혼은 뭐하려고?”, “애도 낳고 집도 사서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렇게 애도 낳고 집도 사서 살면 그리고는?”, “그리고는… 늙고 죽겠죠.”, “그러면 자네는 죽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걸어가는겐가?”
이 질문의 핵심은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에 점점 더 상위목적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점점 상위의 목적을 확인하다보면 결국에는 더이상 상위의 목적이 없는, 가장 극강의 목적, 가장 최고의 목적을 만나게 되겠다. 그런데 도서관으로 열심히 걸어가던 이 학생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인생의 목적을 인생 가운데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내용으로 삶을 꾸려도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해결이 없는 삶은 눈 앞의 잠시 잠깐의 즐거움만을 좇아 살다가 허망하게 죽는 삶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의 목적들을 단지 인생 가운데서 찾으려 하면 할 수록 우리의 대답은 점점 궁색해 질 수 밖에 없다.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단순히 “밥을 왜 먹니?”, “배고프니깐요" 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목적이 아니라 본능이다. 짐승에게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그들은 오로지 본능에 이끌려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인생들은 늘상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일부 염세주의자나 허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 목적 따위가 어디있나? 그냥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면 되지" 그들은 스스로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 그 답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분주히 돌아다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한다. 찾으면 찾으려 할 수록 그것이 고통이다. 그러니 답 찾기를 포기하고 만다. 수많은 이들이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찾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답을 찾지 못했던 바로 이 부분을 성경은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을 이와 같이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는 것이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목적은 가장 최고의 목적, 가장 최상위의 목적이기 때문에 내 판단하에 조정할 수 없고, 내가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모든 인생들은 두 가지 인생관 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믿는 자들과 무신론자들이다. 성경을 믿는 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받는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막상 사는 것을 보면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무신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이를 가리켜 무늬만 그리스도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을 믿는 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그분이 진리이시기에 그분의 말씀도 절대진리이며, 그 선하신 창조주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생의 절대목적이 분명히 있음을 믿는 자들이다.
롬11:36 를 함께 읽어보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방금 읽었던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존재의 목적이 되시며, 모든 것들의 종착지요,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에 분명한 목적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 목적은 앞서 살펴보았던 고전10:31 말씀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다. 인생의 순간들마다 “왜?” 라는 목적을 찾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대답 외에 다른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대답이 없다.
여러분, 왜 성공하려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왜 돈을 모으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왜 결혼을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부모 여러분들, 왜 자녀들에게 공부시키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청년 여러분들, 왜 연애를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학생 여러분들, 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근본적인 목적이 흐려지면 안된다. 어쩌면 우리 중 누구라도 쉽게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 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공하려 한다고. 그런데 진짜 이러한 인생의 목적이 선명하게 세워진 사람이라면 삶의 자세와 태도도 달라지는게 마땅하지 않겠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란 없다고 믿는 자들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창조주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인생의 절대적인 목적도 없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인생의 목적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의외로 이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도 그러하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절대 진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을 만유의 주로 고백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게 중요할 수 있어, 그러나 나에게는 이게 중요해, 뭐가 맞고 틀린게 아니야, 그냥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일 뿐이야"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런데 사실 이런 가치관은 무신론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주된 목적이라 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존 파이퍼가 이런 말을했다. “어떻게 우리는 오렌지주스를 마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을까?” 이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매순간을 결정하고 행동하라는데 이는 막연한 말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다양한 동기, 다양한 목적들이 존재한다. 예뻐질려고, 건강해질려고,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등등 행위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본문은 주된 목적이라 한다. 인간이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목적들을 수단으로 만드는 최고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예뻐지려고, 건강해지려고, 넉넉하게 살려고, 좋은 학점 따려고 등등 그 목적들을 부인하는게 아니다. 그런 것들을 배제시키라는게 아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결합해서 최고의 목적, 가장 상위의 목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단절이 된다면, 우리는 분명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인생가운데 무언가를 늘 우리는 행한다. 그것을 내가 원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 고집 때문에. 내 고집과 원함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 해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인생의 성공과 실패라고 까지 말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신자에게 이것이 잘 연결될 때 그는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다른 문제이다. 분명 인생의 여러 고비들과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종착역에 섰을 때 그는 정말 만족스럽게 기쁘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한평생 하나님의 지으신 주된 목적에 따라 살았으니까. 명 설교가였던 스펄전이 이제 숨을 거두기 직전, 그가 아내 손을 잡고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무엇인지 아는가? 한평생 복음과 함께 살다간 하나님의 사람이 했던 마지막 말,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너무나도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었다오" 였다. 그가 이렇게 행복하게 그의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뭐라고 증언하는가? 우리가 수많은 구절들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시간에 한 대목만을 찾아 읽어봤으면 좋겠다. 시16:5-11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제가 지난 번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사람에게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 스스로 계시며 만물을 만드시고 유지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근거가 되신다. 이런 점에서 방금 읽었던 시편의 다윗은 하나님으로 마음이 충만해있던 자였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니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 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하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다. 방금 읽었던 시16:9 를 보라.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 그분이 나의 영원한 아버지 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100여명 이상이 수년에 걸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가리켜 “enjoying Him”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을 엔조이 하는 것, 그분을 내 기쁨으로 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영어 단어 “ENJOY”는 “~안에"를 의미하는 “EN”과 기쁨을 의미하는 “JOY”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해서 enjoy는 어떤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배꼽을 잡으며 웃는 그런 저급한 기쁨과 즐거움을 말하는게 아니다. 내 안에 무한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오늘날 이 enjoy 라는 단어가 쾌락적이고 퇴폐적인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사실 이 단어는 매우 아름다운 단어이다. 상대와 함께 하는 모든 상황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을 enjoy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살피신다. 우리 안에 모든 순종과 예배의 근본을 지켜보시며 그것이 Joy, 즉 기쁨에서 출발하는지를 살피신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과 믿음에 힘이 있는 것이, 단지 그 복음과 믿음이 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등록한다거나 하는 외적인 어떤 것에 기초하지 않고, 전능하신 창조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과 신뢰에 기초해 있고, 그 영원하신 아버지를 향한 샘솟는 기쁨에 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이 Joy가 가득한가? 여러분의 인생을 통틀어 오직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기쁨의 대상이 되시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이런 저런 모양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모든 일련의 행위들 가운데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가? 그 기쁨이 원동력이 되어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내가 누리는 힘과 능력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드리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JOY, 기쁨이 아니라면 다시 복음 앞에 서시기를 바란다. 나의 나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깨닫는 그 십자가의 자리에 서시기를 바란다. 그 은혜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 JOY가 넘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쁨"을 오해하면 안된다. 어떤 분들은 이 기쁨을 세상이 주는 기쁨과 혼동하기도 한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어떤 것인가? 조건적이다. 기브엔테이크이다. 하나님이 어떤 조건을 들어주셔야, 하나님이 어떤 것을 이뤄주셔야 기뻐한다. 그 안에 있는 기쁨이 조건적이라보니까 때로 고난이 찾아오고, 시련이 찾아오고, 인생 속 기근이 찾아오고, 믿음의 시험이 찾아올 때 기쁨이 싹 말라버린다. 조건적인 기쁨이니까. 불평과 원망이 넘처흐른다. 그 신앙이 기브엔테이크였으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말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롬5:3-4 를 통해 말씀하기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생 가운데 마주하는 환란에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벧전4:13 에서 믿음의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것을 기뻐하라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리에게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다 하신다. 원어로 보면 가장 극강의 즐거움, 가장 최고의 기쁨, 가득 채워져서 더이상 주체할 수 없어 폭포수와 같이 흘러넘치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건데, 은혜받은 자의 특징은 바로 기쁨이다. 상황이나 조건이 어떠함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그 하나님으로 인한 넘치는 기쁨. 그 기쁨은 단지 일주일 중 하루, 주일에만 있을 수 있으랴? 물론 하루라도 그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얼마나 감사한가? 때로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봉사와 헌신 가운데 기쁨이 메마르는 순간이 얼마나 있던가? 그러나 진정 은혜받은 자는 일주일 중 하루만을 기쁨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넘치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롬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말씀처럼 지금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그 은혜에 넘치는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속 모든 것들이 주께로부터 왔다. 이를 믿으시는가?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사함은 늘상 좋은 것을 주실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인생 가운데 안좋은 일들도 있다. 좌절할만한 상황도 있다. 슬퍼하고 힘들어할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욥의 고백처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삶이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겠나? 때로 형통한 길을 허락하실 때에도 기쁨으로 감사하고, 때로 굽이친 골짜기를 만나게 하셔도 이 또한 나의 유익을 위해 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태도,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어느 시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립니다" 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러한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맺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도 명료한 목적을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그분을 기뻐함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시147:1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는 것이 선하며 아름답고 마땅하다 말씀하신다. 시73: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요, 주님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주신 그 분명한 목적대로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그 기쁨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기쁨이 아니다.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양, 최고의 감사, 최고의 사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이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오늘, 특별히 우리의 기쁨이 메말랐다면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길 소망한다. 우리의 신앙에 감사가 메말랐다면 다시금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확신하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인생의 목적답게,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영화롭게 하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기도하자. 주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깨닫게 하셔서 무엇으로도 사그러들지 않고 꺼지지도 않는 넘치는 기쁨으로 채워주옵소서. 그 기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기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주여 붙들어 주옵소서.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히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이 자리의 우리를 만드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인생의 목적을 세상 가운데서 찾으려 하고, 내 주관적인 목표와 뜻에 따라 살아가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 자리의 우리에게 이러한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온전히 붙들어 주옵소서.
특별히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말씀하셨사오니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세상 그 무엇으로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천상의 기쁨을 우리 안에 채워 주옵소서.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우리의 평생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복된 여정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64 기뻐하며 경배하세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