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5] 온유, 절제

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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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7월 2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제목 : 그의 삶에서 성령을 보다
본문 : 고린도전서 15:9-10
결단 : 주님 말씀하시면
# 설교 전 중보기도 제목
1) 예배를 위해서 : 내 마음의 눈 열어 주를 보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2) 리더들을 위해서 : 소그룹 리더와 새가족 리더로 섬기는 지체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로 맡은 바 사역을 능히 감당하는 빛과 소금 되게 하소서
[도입 : 부동산에 미친 한국 사람들]
혹시 이 중에 집 장만에 혈안이 있는 분 계십니까? 내 집 장만에 꿈이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5장 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얻고자, 내 집 장만에 소망을 두신 분들은 이제 온유하셔야 합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온유하다 해서 실제로 땅을 얻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이 땅은, 부동산같은 개념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복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땅에서의 복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본문 : 인간은 본질상 온유할 수 없다]
그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온유는 무엇입니까? 대게 온유를 생각할 때, ‘선한 것’을 많이들 생각할 겁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선하다 생각했고, 또 그들의 순수함과 감출 수 없는 매력이 참 좋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들의 감출 수 없는 매력은 참 좋습니다. 하지만, 전 아엘이를 보며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어, 확신에 확신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제 딸이라 그럴 수 있지만, 아엘이는 생각보다 영리합니다. 특히 모방을 참 잘합니다. 제가 하는 모습을 곧바로 따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관찰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동작들로써 완성을 시킵니다. 그래서 가르친 동작들에 있어서는 세뇌가 된건지 아니면 익숙해진건지 알 수는 없지만 곧 잘 합니다.
그러던 중 저도, 제 아내도 가르친 적 없는 행동을 스스로 해냈는데,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악하다.’ 분명 저는 ‘주세요’를 가르치고 물건을 받고 나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가르쳤고 그렇게 서로 주고 받으며 놀았는데, 어느 날은 제가 ‘주세요’ 하니까 주는 척 하더니 자기 품으로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재밌다는 표정과 함께 깔깔 웃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은 결코 선할 수 없으며 아담의 원죄로부터 악한 존재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요즘은 더 합니다. 소유욕이 생긴건지, 자신의 물건을 지키고자 나타나는 방어기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가 제 몸에 손을 대면, 엄마를 때립니다. 또 다른 친구가 본인이 안고 있는 물건에 손을 대면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역시 인간은 참으로 악합니다.
[본문 : 성경이 말하는 온유,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
그래서 ‘온유’라는 것이 우리 삶에 있어 결단코 쉬운 과정은 아니겠거니 생각이 듭니다. 이쯤에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무엇일까 하고 보니,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온유는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내 주관이 아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 이라 말합니다.
[본문 : 사랑도 절제해야 한다]
‘절제’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절약’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인내’ 아니면 ‘오래참음’ 같은 걸까요? 또 생각해볼법한 것은, 절제에 해당하는 것은 과연 나쁜 것들만일까?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이야 딸 둘이면 금메달이고, 딸 하나에 아들 하나면 은메달이고, 아들만 있는 집은 동메달이라 말하지만, 예전 어르신들이 아들을 꽤나 원하셨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 장로님도 계속 딸만 낳다가 뒤늦게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이뻐보였는지 모른답니다. 그때부터 장로님 눈에 아들이 보이지 않더라는거죠. 잠 자다가도 아들을 괜시리 한 번 보게 되고, 일 하다가도 전화로 안부를 묻게 되고, 하루에 몇 번이고 그렇게 안부를 묻고 잘 있는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프거나 본인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기도 하고 마음이 얼마나 졸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이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너무 놀라 이리 저리 찾다 마당을 보니, 너무 평온하게 잘 놀고 있더랍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마음 속 이런 소리가 들렸답니다. “너, 누구 바라보고 사느냐? 저 아이가 누구의 것이냐? 내게 맡겨라” 이 말씀이 딱 들리는데, 가슴이 철렁하며 다리에 힘이 쫙 풀리더랍니다. 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 지나쳤음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의 것이니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라고 회개로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갔다고 합니다.
사랑은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도 과하니 문제가 됩니다. 사랑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단순 좋지 못한 것을 참는 것이 절제라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보면 마냥 그런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절제란 무엇일까요?
[본문 : 성경이 말하는 절제, 내 감정보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사는 것]
성경이 말하는 절제는 한 마디로,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감정대로 살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철저히 주님 뜻대로, 내 삶에 오신 주님을 위해, 주께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바로 절제가 됩니다.
[본문 : 바울의 삶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참으로 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성령의 열매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맺혔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리고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까지 모든 열매가 그의 삶 곳곳에 맺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며 오네시모를 용서할 것을 구했고, 희락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라 외쳤고, 화평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선포했고, 오래참음으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라고,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뿐아니라 그의 삶에는 자비를 비롯한 오늘 우리가 나눈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정말 아름답게 맺혔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 : 성령의 열매 맺기 1. 코람데오 : 하나님 앞에 정직하라]
도대체 어떻게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의 삶에, 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에, 스스로가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 말할 수 밖에 없던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정직하길 소망했다는 겁니다. 즉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은 참 어렵지만, 거짓으로 사는 것은 꽤나 달콤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제 군대 후임 중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훈련소를 끝내고 전역할 때까지 함께 할 부대로 전입오면, 대게 선임들이 호구조사를 시작합니다. 몇 살이냐, 뭐 하다 왔냐, 여자친구 있냐, 이쁘냐 등 여러 질문들을 하며 대화를 합니다. 이 후임이 자신은 군입 전 백화점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일했고, 특히 일본어를 잘 해서 일본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일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자친구도 있는데 사진을 보니까 너무 이쁜겁니다. 너무 완벽한 직업에 완벽한 여자친구까지. 근데 이 친구를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런 삶이 부럽지가 않은겁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키가 심각하게 작았고, 또 감히 제가 누굴 평가할 처지도 아니지만 너무 못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며 부럽기보단 의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물증이 없어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 채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 일종의 쉼터같은 그린캠프로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친구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그저 군입 전 백화점 주차장 안내 아르바이트를 한게 전부였던 것입니다. 이 친구는 정직하기 보다 거짓으로 만든 자신의 세계관과 삶 속에서 자기를 가둬둔 채, 그것이 진짜인냥 살아온 것입니다.
정직보다 거짓을 택한 결과는 오히려 나를 내새우는 삶이 되기도 하고,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허언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기보다 거짓을 붙들고 산다면 단언컨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내가 높아지기를 너무나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 나의 뜻대로 살기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짓보다 정직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숨김없이,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진솔한 마음, 감정,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 성령의 열매 맺기 2. 하나님 기준으로 행동하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 기준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에 자신이 기준 되는 삶이 있었죠. 그때 그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예수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핍박뿐입니까?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사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지만, 왜 잃었습니까? 그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았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 기준 되어 행동하고 판단하고 생각했던 모든 이치들이, 하나님 기준으로보니 배설물에 비유된 것입니다.
저는 일을 할 때 가급적 제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래도 나름 기획에 달란트도 있고, 또 추진력이 있는 편이라 계획한 일에 ‘잘 할 수 있다!’ 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준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스스로에게 주는 확신이 생각보다 높은 확률로서의 성공하게됨을 가져다 주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됩니다. 스스로의 확신이 100%의 평온을 주지 않습니다. 높은 확률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불안과 걱정이 남아 있습니다. 또 실패할 경우 제 스스로를 자책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하여 나아감은 ‘반드시’ 또는 ‘틀림없이’ 행복할 수 있다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들이 분명 기쁨이었고 행복이었고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는 불안과 걱정과 고민이 끊임없이 존재했던 거지요.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버렸고, 그 안에 예수가 채워지니 어찌 됩니까? 내가 누렸던 모든 것들이 진정한 기쁨이 아님을 알게 되어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하고, 그 안에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말로는 들어서 알겠는데, 와닿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고 마땅히 이를 행할 방법 조차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용 :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하지만 여러분. 그런 고민 속에서 우리를 건져 줄 희망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는 이미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열리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죽는 과정에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나를 넘어트리는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삶에 ‘나의 죽음’이 그리고 ‘예수로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거지요.
그럼 우리는 이 한주 어떻게 더 그리스도의 열매를 맛보고 아직은 작은 그 열매를 성장 시킬 수 있겠습니까? 매순간 예수로 사는겁니다. 어떻게요?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내게 뭐라 말씀하시는가?” 묻고 또 묻는겁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주님의 그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세미한 음성 조차도 들을 수 있도록 늘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심따라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결단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말씀을 가지고
1) 매순간 주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 되게 하소서
2) 주님의 음성을 깨어 듣는,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게 하소서
#수련회를 위해서
3)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의 눈 열어 보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4) 그 날의 환경과 상황이 은혜로 나아감의 부족함 없는 나날들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매순간 하나님께 묻고, 그 음성을 들어 나아가는 삶 살기로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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