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6 양청] 수련회 첫째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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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첫째날 저녁집회가 시작되었다. 십계명에 대해 우리가 2박3일간 살펴보게 될 것인데, 오전 G.B.S 를 통해서 십계명의 배경에 대해 우리가 공부했다. 왜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는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계명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며, 십계명의 서문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았다.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저녁에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측면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측면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가 십계명을 다룰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를 짚어 보고, 그 이후에 하나님 사랑에 대한 측면을 다룰 것이다.
첫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은 사랑을 요구한다.
첫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은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이다. 세상의 법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법을 들이민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 사랑에서 비롯된 섬김, 사랑에서 비롯된 헌신을 요구한다.
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에 남겨준 마지막 교훈들 중에 있는 말이다. 특히 방금 읽은 4-5절은 ‘쉐마' 본문으로서 이스라엘이 대대로 가르쳐야 할 율법의 핵심이 담긴 부분이다. 온통 눈길이 닿는 곳마다 붙여놓고 되새기며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라고 명하신 이 쉐마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모세는 누구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전수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해준 사람이다. 율법의 박사이다. 그랬던 그가 모든 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니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의미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율법이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과 교훈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이후에 모세보다 더 크신 분이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한 율법사가 찾아와서 예수님께 묻는다. “선생님,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이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중할 뿐만 아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다" 라고 설명하셨다. 이는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에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을 하셨다. 요13:34-35 를 찾아보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우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는 표현에 주목했음 좋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랑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수준의 사랑도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이루시고, 강도만나 죽어가는 자와 같던 우리를 이웃으로 삼아 사랑하신 주님이시다. 자신의 원함을 아버지의 뜻 안에서 기꺼이 포기하신 겟세마네가 그분의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수준의 사랑을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드러나야 하는 곳이 바로 십계명이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룬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련회 기간동안 다루어야 할 것은 율법,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법은 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도, 모세도 가르치셨던 핵심이다. 율법이 사랑을 잃으면 족쇄가 되고 짐이 된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빠졌던 함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계명이나 율법을 문자대로 지켜냈다는 자기 성취감,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교만,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지게 만든 주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성경을 좀 알아! 나는 가방끈도 길어! 성경해석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있어"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주변 성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지식과 성취와 수련 등을 자랑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철없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요,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지금 우리는 2박3일간 십계명에 대해 배울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을 살피면서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실제 삶의 문제들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배우고 알면 알수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가운데 이것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과 달라서 사랑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사랑이 결여된 법은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요 짐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주님께서 나타내시고 보여주신 그 사랑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법을 배우길 바란다.
둘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 법이 법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바로 여기서부터 기독교적 윤리가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이를 허락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정황 속에서 주신 것이라면 이 명령과 이 명령에 담긴 정신이 오늘날에도, 신약의 교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이를 연속성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만일 그 법이 오늘날 교회에도 유효하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역사공부하듯이 알고만 넘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원리 대로 사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세상과 구분하는 대원리가 되었듯이 신약의 교회 역시 십계명을 실천함으로 내가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세 가지 측면에서 십계명이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계명은 무조건적 명령이다.
첫째로, 십계명은 무조건적 명령이다.
십계명의 형식을 보면 어떤 것을 행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하라는 것을 명령이라고 한다면 하지 말라는 명령을 금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명령이든 금령이든간에 어떤 것을 명령할 때에는 그 명령이 조건적인 경우가 있고, 무조건적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조건적인 명령은 무엇이 있을까? 바울 서신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여기서 “먹지도 말게 하라”는 명령은 조건적이다. 이 명령은 어떤 대상에게만 적용되는가? “일하기 싫어하는 자" 에게만 적용된다. 따라서 조건적 명령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나 상황에 맞춰 적용하는 명령이다. 주로 율법의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조건적 명령도 있다. 조건이 없는 명령은 명령 자체가 목적과 의미를 가진다. 이 명령은 절대성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면 모두 무조건적 명령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등. 이 명령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다. 따라서 십계명은 시대나 상황이나 장소나 대상을 제한할 수 없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새롭게 적용해 주셨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새롭게 적용해 주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시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어서 말씀해 주십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단지 문자적으로 율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그를 때리거나 욕을 하지만 않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들은 살인에 대해서 “직접 죽이는 행위"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님은 십계명의 해설원리에 대해 다시금 말씀해 주신다. 살인이라는 것은 직접 죽이는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고 노하고 모욕하는 것"까지라는 것이다. 7계명도 마찬가지이다. 몸으로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까지가 7계명에 해당한다. 우리의 외적 행동 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해석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해석이다.
십계명의 연속성을 뒷받침하는 세 번째 요소는,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의 해석 때문이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 장을 계속 펴두라. 베드로는 구원받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동일한 언어로 연결시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신약의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그분의 소유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소유 라는 히브리어는 ‘세굴라' 라는 단어인데, 이는 정말 아끼는 귀하고 귀중한 보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호칭을 베드로는 신약의 교회에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제가 들고 있는 이 아이폰을 예를 들어서 100만원을 주고 샀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제가 지금 2년 가량 쓰면서 이 중고폰의 시세가 약 50만원 선이라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아이폰을… 요즘 누가 핫한지 잘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서 에스파의 카리나가 2년간 쓰던 폰이라고 하자. 아니면 김연아? 손홍민? 소지섭? 뭐 진짜 유명한 사람이 2년간 쓰던 폰이라고 하자. 그럼 이 폰의 가치는 새 폰 100만원의 가격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분, 소유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된다. 유명인사가 소유한 물건이 그런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면,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내 소유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평가될 수 없다. 여러분의 소유자로 인해 새로운 가치가 부가되는 것이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외모나 학력이나 신분이 아름답기 때문인가? 교회당이 아름답게 지어져서 아름다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에 따라 우리도 그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냐에 따라 우리도 그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를 소유하신 분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냐에 따라 우리도 그 거룩하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벧전2:12 를 보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지금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선한 행실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악하다고 오해하고 악평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 오실 그날에 그들이 너희의 선행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도록, 변함없이 선한 행실을 품으라는 것이다. 벧전2:17 를 보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십계명의 원리를 말씀한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진정 무서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실천적인 무신론자이다. 알기는 안다. 배우긴 배웠다. 듣기는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소유한 복음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구시대적 유물이라서인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들은대로 살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간판은 달려 있고, 보란듯이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으나 과연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표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신다.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렇기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십계명은 유효하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에, 십계명의 원리와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따라서 십계명의 의미를 배울 때, 그것이 구시대적 유물이라고 선긋는 태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시대에 맞추어 더 깊게 깨닫고 이해하길 바라며 공부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에 적용하고 힘을 다해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힘써 준행할 때 세상은 말할 것이다. “너희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가니? 너희를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이니?” 이렇게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축원한다.
제1계명
제1계명
오늘 저녁에는 제1계명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출20:1-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방금 읽었던 구절은 십계명의 서언, 혹은 서문이라고 한다. 출20 장의 배경이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다. 천지가 울리며 하늘에서는 온갖 번개와 천둥이 치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이스라엘에게는 실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서언을 말씀하신다.
이 서언이 왜 중요한가? 실제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일들을 기초로 십계명을 명하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홍해가 갈라졌고, 실제로 만나가 내려서 그들이 먹었으며, 실제로 바위가 갈라져서 물이 나온 것을 그들이 마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요구하시는 명령이 바로 십계명이다. 따라서 “나" 라고 주장하시는 자리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느 존재도 올라설 수 없다. 또한 “너" 라고 불리는 존재들 역시 막연한 어떤 사람이 될 수 없고, “나" 라고 하시는 분을 아는 자들만이 “너" 가 될 수 있다. 이런 전제가 선명해질 때 1계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제1계명은 무엇인가?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다른 신들을 곁에 두지 말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사랑하라 명하신다. 여러분, 이 명령이 부당한 명령인가? 무례한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내셨던 구원이 실제였다면, 이러한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굴라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응답한 자들이라면 1계명은 너무나 당연한 요구이지 않나?
물론 1계명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신이 아니라는 보편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억지로 주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 그 땅에서 존재하던 신이라고 불리울만한 것들을 모두 격파하심으로 친히 증명하신 내용이 아니던가. 당대 세계에서 어느 한 나라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주 신의 광대함과 능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애굽이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도 애굽의 신이 절대적으로 강한 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는 것에는 그들의 믿음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셨다. 신이라고 만들어내었던 온갖 존재들이 실상은 신이 아니라 허구였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단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1계명은 이러한 의미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단시 온 우주에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전해주는 것을 뛰어넘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 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제1계명을 으뜸계명이라고도 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지금 이스라엘이 가진 신론은 막연하지 않다. 그들의 하나님은 철학적이지도 않고 이념적인 존재도 아니라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그분을 섬기는 신앙 역시 구체적이고 실천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제1계명은 내 머리로만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고, 내 지식으로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임을 인정하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는 이런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들 속에서 이 계명들이 명하는 바들이 증거되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국의 샤머니즘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에 등장하는 신들은 거의 100이면 100 전부 ‘노하는 신’이다. 그래서 “무슨 무슨 신이 노하셨다" 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신과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하니까 중간에 무당이라는 존재를 개입해서 신의 노기를 달래곤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늘 훼방하는 신이고 진노하는 신이고 아이처럼 잘 달래야만 할 존재이다. 그래서 그 신이 좋아할 법한 제물을 통해서, 그 신의 노기를 풀어주어야 할 굿판을 통해서 신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우상들을 섬기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어떠한 제물로도, 어떠한 행동으로도 그분을 달래거나 조정할 수 없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먼저 베푸신 구원의 터 위에서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 우리가 온전하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이나 거창한 제의나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는 사람, 사랑을 베푸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하는 겸손한 사람을 원하신다.
따라서 1계명은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는 신론이어야 한다. 단지 1계명이 예배당 안에서만, 예배시간 동안에만 “아 그래 하나님이 계시긴 하지" 정도로 의식한다면, 그 사람에겐 1계명은 안중에도 없는 셈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단지 일주일에 하루, 그것도 한 시간 정도 달래놓고 가면 되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 아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불신앙의 행위이다. 내가 믿노라고 말도 하고, 종교가 규정한 규칙과 행위들에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과 결정과 가치관 속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왜 교회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말하나?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안보인다는 것 때문이지 않나? “우리와 똑같이 살아가면서 껍데기만 다른 척 하는 너희는 누구냐?”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불신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지금도 나를 실제적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행위들은 우리가 이미 1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며, 내가 제 아무리 외적인 열심을 갖추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예배의 행위들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다 기만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날마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라는 표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삶 속에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과 형편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모범이 된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고 의식한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기뻐하실지를 의식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늘 하나님을 위해 선택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의식해서 죄를 몰아낼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인생의 결정과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때로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작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기를 연습하라. 하나님때문에 여러분의 결정과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지금 세상이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때로 은근히 비웃고 여러분의 결정에 비아냥 거린다 할지라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을 거스를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그것은 이익이 아니라 유혹이다. 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길,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향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세상과 등을 지며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며,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나음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방식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 우리는 1계명을 붙들어야 한다. 삶과 분리된 채로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지식은 허무하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허탄한 자랑일 뿐이다. 약2:19-2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아는 것, 1계명이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이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게 야고보 사도가 진정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1계명을 믿으시는가? 1계명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함을 인정하시는가? 그렇다면 1계명이 요구하는 삶의 원리 위에서 살라. 믿는 바 대로 행동하라. 아직까지 그 깊이가 얕다 할지라도, 그래서 적은 것 밖에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 주변의 많은 이들이 알 수 있도록 그렇게 1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라. 우리의 삶으로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의 삶이 어떠한지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라.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늘 그분을 사랑하기에 힘쓰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기 위해 예배에 열심을 내라. 더욱 그분의 말씀을 듣길 사모하라. 이를 통해 더욱 하나님만을 사랑하여,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는 삶을 사는 이 자리의 모든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붙들어 주셔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언행과 우리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기도하자.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세상 가운데 드러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오늘 살펴본 내용들처럼, 제1계명의 요구 앞에서 그렇습니다, 주님.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주관자이십니다. 그 주님을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함께 이 시간 합심해서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