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7 양청] 수련회 둘째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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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시간이다. 우리가 어제는 십계명의 두 파트 중에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을 살폈었다면, 오늘 오전부터 여러분들이 아침큐티며 GBS를 통해 공부한 부분들은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 가운데 여섯번째 계명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려고 한다. 출20:13 “살인하지 말라” 이 짧은 명령 안에 어떤 하나님의 요구들이 담겨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 명령을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히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이를 지켜갈 수 있을까?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주제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한다. 한편 권위와 관계라는 측면으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눠 보기도 하는데, 1-4계명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을 절대 권위가 지배하는 관계로 보고, 5계명을 수직적인 관계로, 6-10계명까지는 수평적인 관계로 이해하기도 한다. 왜 5계명을 따로 분리하느냐 하면, 6-10계명이 규정하는 관계들을 맺어가는 기초를 5계명 준수를 통해 터득하게 하셨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제5계명은 제6-10계명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담을 지으신 이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후에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좋지 않다고 하셨다. 모든 것이 좋은 상황에 있더라도 사람은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창조섭리이다. 다만 공동체적인 삶이 모두에게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분 모두가 한번씩은 경험해 보시지 않았나?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다보면 때로는 갈등을 경험하기도 한다. 마찰을 경험하기도 한다. 불편한 관계들이 생긴다. 시기와 질투들이 나타난다. 약자를 누르려는 강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즐겁지가 않다. 신경써야 할 부분들도 많고, 괜시리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는데, 이 복이 더이상 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동체적인 삶이 모두에게 복이 되고 샬롬이 되기 위해서는 함께 지켜야 할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계명이요 율법이다.
그 중에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무엇이냐? 타인의 생명에 관한 존중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6계명이 가르치는 바이다. 인간에게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고상한 목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명의 안전’이라는 인간의 최소한의 보장 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은 사치가 될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만 급급한데, 어떻게 가치를 실현하겠나?
예를 들어서 창세기 19 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12 장부터 한창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를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의 다른 수많은 죄악된 도시들은 그대로 두시면서 유독 소돔과 고모라에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불로 심판하시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일까? 창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 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은 어떤 울부짖음일까? 소돔과 고모라 땅의 수많은 죄인들의 죄를 참소하던 사탄의 외침일까? 아니면 그 땅에서 살아가던 힘없는 약자들의 탄식과 고통과 눈물의 울부짖음일까? 물론 두 가지가 복합적이겠지만, 결국에는 약자들의 탄식과 눈물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친히 확인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 땅의 죄악을 저울질 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심판하기 위해 찾아온 천사들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들의 눈은 육체적인 쾌락에 완전히 잠식되어 그 천사들을 동성애로 범하고자 했다. 그 땅의 약자들의 탄식과 괴로움의 눈물은 바로 이런 상황들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기초로 소돔과 고모라를 판단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아니라 실제 나그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가? 꼼짝없이 그 무리들에게 잡혀가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인권은 처참하게 짓밟혔을 것이다. 롯의 집 앞에서 많은 무리들이 천사들을 끌어내기 위해 소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 성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떠한가? 이러한 죄악을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기는 커녕 소돔 성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몰려들며 롯의 집을 에워쌌다고 성경은 말한다. 노리개로 유린당하는 것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는 약자의 인격과 생명이 파괴당하고 조롱당하던 것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던, 철저하게 부패하고 악랄하며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는 역사 가운데 존재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공동체가 서로의 생명에 대하여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셨다. 오늘 함께 읽었던 출20:13 의 여섯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 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점점 죄로 인하여 세상이 부패해 갈 것이고, 점점 죄는 더 많은 죄악들을 만들어낼 것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것만큼은 지켜라, 이 선을 넘지는 말라는 하한선으로 여섯 번째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 계명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경험들을 했던 약자들이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2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버리게 했고, 강한 힘에 굴복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약자 중 약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여섯 번째 계명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던 그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약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생명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6계명은 그들에게 일종의 소명과도 같은 명령이었다. 생명이 보호받는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지면 출20:13 “살인하지 말라” 라는 이 단순한 명령에는 어떤 조건도, 설명도 없다. 이는 조건명령이 아니라 무조건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제6계명의 근거나 당위성에 대한 설명보다, 오히려 이 짧은 명령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어디인지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지난 저녁에 십계명의 서론에 대해 잠시 언급했었는데, 십계명은 주로 “-하지 말라" 라는 금령, 금지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라' 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 라는 명령이 훨씬 많다. 따라서 ‘금하신 것만 안하면 돼’라는 식의 태도는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지 금하신 것을 안하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십계명을 절반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이것을 금하신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와 뜻을 파악한 후 적용을 통해서 성장과 성숙을 이뤄가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과 문화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더욱 고상하고 깊은 형태로의 법을 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 혹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후에 ‘그럴지라도 이래서는 안된다' 라는 식의 명령으로 기본을 깔아두신 것이다. 사실 십계명이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겨우 문자적으로, 글자대로 지키는 선에 머문다면 이것은 정말 초보적인 수준 밖에 안되는 것이다.
6계명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타인의 생명에 대해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문화와 역사가 깊어질수록 생명에 대한 가치, 생명에 대한 의식과 사상도 함께 깊어져가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보라.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에 대해 알고 있다. 분명 그는 이방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와 부름을 들었고, 이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말씀과 함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나아갔던 민감했던 자였다. 또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의 선택권을 먼저 양보할 정도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엄청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기꺼이 평강을 위해 조카에게 좋은 것을 양보할 수 있었던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라함도 자신의 생명이 위기에 놓이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남에게 내줘버린다. 이게 소위 시대의 한계라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한 인격을 갖추고, 아무리 영적 예민함을 소유한 자라고 할지라라도 그가 속했던 사회와 문화, 역사적인 흐름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구원하시는데 아주 무섭게 개입하셨다. 남의 아내를 빼앗는 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쉽게 내어주는 아브라함에게도 교훈을 주신 것이다. 아무리 여성 인원이 무시받는 사회적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시대적인 한계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 성숙함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기에 계명과 법도를 내리실 때,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주시지 않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사기 19 장이다. 이 때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로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이다. 어떤 레위인이 첩을 두고 있었다. 레위인이 본 처외에 첩을 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 우스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첩이 자기 남편을 두고 간음을 저지르고 도망을 간다. 그러자 레위인은 바람을 피우고 도망한 그 첩을 데리러 가서 되찾아온다. 그렇게 첩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기브아' 라는 지역을 지나가게 되는데, 날이 저물게 되자 머물 곳이 없던 차에 그 지역 한 노인이 레위인과 첩을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지역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으로 달려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와 동성애 행위를 하기 위해 문밖으로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린다. 이에 레위인은 자기 첩을 대신 내보내어 자기 대신 불량배들의 희롱을 받게 한다. 그렇게 첩은 밤이 새도록 폭행을 당하다가 결국 아침이 되니 죽어 있었다. 이스라엘 안에서 약자의 인권을 무시한 폭력이 일어났고 생명을 해하는 데까지 간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7계명에도 걸리지만 기본적으로 6계명도 무시된 셈이다. 이 일로 베냐민 지파 전체가 거의 몰살을 당하는 무서운 결과가 이어지지 않던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가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한 것이다.
또 보라.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라는 인물은 사사였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사라는 직책은 종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권위있던 자였다. 그런데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하던 도중에 하나님께 서원을 한다. “하나님! 만일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다면, 누구든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와 이번 승리를 축하해 주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세상에.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불살라 바치겠다는 것이다. 당시에 사사만큼이나 권력자, 권세자는 또 없었다. 그러니 그가 내뱉은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었다. 아니 세상에 누가 자신을 축하하러 나올지 아는가? 그리고 축하하러 나올 그 사람의 생명이 입다 자신의 소유물이던가? 타인의 생명에 대한 일고의 두려움이나 존중의 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것이 나름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낸다고 내뱉은 서원이었다는 것이다. 수준이 이러하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고상하고 높은 수준의 법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당시 문화적인 수준, 역사적인 수준이 이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타인의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취하지 말라! 강자라고 해서 함부로 남의 생명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이정도 수준으로밖에 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이런 면에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십계명을 토대로 파생되는 율법에서도 사람이 죽었다면 고의로 죽인 것인지 아니면 과실치사였는지 그 정도는 구분해주어야 한다. 이런 수준으로밖에 더 말씀하실 수 없던 수준의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은 때가 기원전 1400-1500년경으로 추측하는데, 그로부터 15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이해가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이후로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들의 신앙적 수준에는 특별한 진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찾아보자. 마5:21-26 이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펴두라.
그 시작점을 보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하신다. 십계명 그대로이다. 옛 사람이 들었던 그대로이고, 예수님 당대에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쳐왔던 대로이다. 이어지는 다음을 보라. “누구든지 살인을 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지금 이 부분은 해설이다. 그동안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던가. 그런데 고작 6계명에 대한 이해와 적용에 있어서 “살인하면 벌받는다"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산상보훈 말씀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여신 새 시대의 백성들을 부르시면서 6계명을 새롭게 해설해 주신다. 새롭게 해설하신다는 것은 이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 해석을 주신다는게 아니라, 옛 가르침에서 그정도 밖에 못 배웠다면 훨씬 더 성숙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금 주님께서 “나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주목하라. 주님은 지금 자신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신다. 주님 자신이 옛 법과 적용을 더욱 깊게 재해석할 새 시대의 법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22절이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여기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재판소로 넘겨진다는 것이다.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말씀처럼 근신하질 않고 형제를 “라가”, 우리 말로 “바보 멍청이" 라고 업신여기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된다 말씀하시는가? 중앙재판소인 산헤드린공회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래도 멈추지 않고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 곧 존재 가치가 없는 자라고 함부로 ㅁ라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져지게 되리라고 경고하셨다. 점점 주님은 강하게 말씀하신다.
옛 율법이 십계명 돌판에 새겨져 그들의 행동을 통제했다면, 이제 주님의 법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근원적인 부분에서 동기를 살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6계명을 살인이라는 행위에서만 생각해 볼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에서부터 적용하라 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분노를 품게 되면 이미 생명을 상하게 만드는 살인행위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그렇게 분노하는 마음을 쉽게 잠재우거나 털어버리지 못하고 그 마음이 통제되지 않은 채로 입술을 통해 모욕으로 이어질 때, 그것도 지나서 한 인간에 대해 임의로 판단해버림으로 “너는 가치가 없어! 너는 무쓸모야!” 라고 단정하는 것을 통해 살인은 심화된다. 이러한 내면의 과정들을 살인의 매커니즘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6계명은 단지 물리적인 폭력을 넘어서서 정신적이고도 내면적인 것에서부터 살피라고 가르치신다. 이러한 가르침은 심판자께서도 그런 것까지 판단하시겠다는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주님께서 반대하고 계시는 것은 성경 전반적인 내용과 일맹상통한다. 타락 이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강자 중심의 논리이다. 힘 센 자들의 자기 합리화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주님은 생명을 해하는 행위로 규정하신다. 소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갑의 횡포, 갑질, 이 모든 것들이 다 살인행위라는 것이다.
낙태
낙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어쩌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생명"과 관련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첫째는 낙태이다. 태 중에 있는 생명, 아무런 힘도 없고, 자신을 지킬 만한 어떤 방법도 없는 연약한 생명체이다. 전적으로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생명들의 운명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함부로 난도질하고 있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다. 생명 자체의 의지와 판단이 아니라 더 힘센 자들의 논리와 입장에서 빼앗는 것이다.
일전에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자매가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상처인데 임신까지 하게 되었으니 주변에서 뭐라 말하겠는가?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낙태할 것을 권했다. “너 인생 망친다, 미혼모로서 이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이 조언들을 모두 교회 사람들이 하더라. 그래도 이 자매는 달랐다. “어쨌거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 아이가 나에게 찾아왔으니 나는 낳아서 기르겠다" 그렇게 아이를 낳았다. 그 교회가 이 자매의 행동을 칭찬했느냐, 아니다.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그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어린 생명을 해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살아가는게 지혜인가? 정녕 그것이 생명을 사랑하셔서 6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인가? 지금 이 땅의 교회 역시 생명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식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바닥 수준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더 추악하고 더 더럽고 더 불결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낙태반대운동은 지극히 소수의 교회들,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근근히 버티며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는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고, 여성의 자유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태아보다 상대적으로 힘을 가진 자의 삶의 질을 위해,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교회는, 적어도 세상의 이러한 가치관을 따르지 않아야 하지 않겠나. 달라야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더 높은, 더 거룩한, 더 아름다운 법을 세상에 나타내어야지.
자살
자살
두번째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자살이다. “자살하면 지옥간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들어왔을 법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한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끊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세상의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교회는 뭐라고 소리를 내는가? 한 인격, 한 사람의 삶을 향해 가해지는 외부적인 압박과 무형의 폭행 등에 대해서 오늘날 교회는 얼마만큼이나 예민한가? 스스로 지키고 방어할 수 조차 없도록 철저하게 망가지고 짓밟힌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살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는가?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인가? 우리는 간혹 인터넷 뉴스에 무자비하고도 잔혹한 댓글세례, 각종 SNS에 댓글로 온갖 폭언과 저주라는 칼날을 휘두르는 만행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런 것들을 읽으며 많은 유명인사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그렇게 자살을 선택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인가? 해괴하고 악독한 세대가 익명성 뒤에 숨어서 한 영혼, 한 생명, 그의 인격을 향하여 아무런 가책 없이 저지르는 사회적 살인행위인 것은 아닌가?
뉴스에도 가끔씩 보도되지만 연말이 가까이올수록 수험생들의 자살 소식들이 뉴스를 통해 들린다. 학업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 초등학생이 학업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 당사자들의 잘못된 선택인 것인가?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늘 남보다 앞서여만 하고, 남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이기는 것임을 강조했던 윗세대의 책임은 정녕 없는 것인가? 혼자서 헤어나올 방법을 찾지 못해서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마는 꽃다운 아이들의 현실을 과연 우리는 “자살하면 지옥간다!” 라는 단순한 논리로 판단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회적인 구조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나? 불합리한 구조와 사회적인 압력 속에서 자기를 지켜내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해 교회는 어떤 구체적인 섬김과 보호대책을 가지고 있나?
주님께서 6계명에 대해 성장하지 못하던 이스라엘을 한탄하시고 새롭게 가르쳐주신지도 2천년이 지났다. 오늘날 교회는 칭찬받을 수 있는가? 은근슬쩍 수백년 전 종교개혁 시절에 만들어졌던 교리적인 문구를 나열하면서 실제적인 상황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백년 전에는 없었던 구조와 악이 오늘날 존재하는데, 교리 책에는 없으니 나도 모르겠다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명이 상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는 약자들의 아픔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공감하고 참여하며 그들을 구원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 한국 사회 도처에 널려있는 미혼모들, 장애우들, 고아들,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전쟁과 기근과 분열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주변의 이웃들에게 과연 여러분들은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정말 여러분은 6계명 앞에서 과연 떳떳하다 말할 수 있는가?
공동체 안에서 6계명을 지키는 법
공동체 안에서 6계명을 지키는 법
주님께서는 제6계명을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작은 것에서부터 생명을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요청하셨다. “분노의 단계에서부터 마음을 통제하라!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도 살인죄로 지방재판소에 넘겨질만한 일이다" 주님은 제6계명의 적용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물을 드리려다가 불현듯 하나가 생각이 났다.
‘아!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뭔가 불편한게 있구나! 나는 유익을 위해 뱉은 말이었지만, 선을 위한답시고 한 말이었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했던 말이었지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자리에서 생각해보니까 그로 하여금 나를 원망하게 했겠구나!’ 이 마음이 들 때 예배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예배 순서에 따르면 예배자가 자기 제물을 제단에 올리는 일은 제사의 절정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라도 이런 일들이 떠오르거든, 중단하고 먼저 돌아가 화해하고 다시 오라는 것이다. 왜?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그만큼이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이 문제가 그토록 시급한 문제인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라. 이러한 화해의 과정은 나 자신을 위한 과정이기 이전에, 나를 원망하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떳떳해서 예배의 자리에 잘 앉아있지만 지금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품고 있는 그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겠냐는 것이다. 내가 형제로 하여금 온전한 예배자로 서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면 나의 예배인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냐는 것이다. 그 책임을 나에게서 묻지 않으시겠는가?
여러분, 마음 속으로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청년부 안에서 이 50명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 안에서도 복잡한 관계들이 얽히고 섥혀 있어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티를 내면서 저 사람을 미워하진 않아도 나와 한 몸된 지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되도록 가까이 교제하고 싶지 않고, 되도록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독생하신 아들을 내어주셨건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의 작은 기득권조차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제6계명은 바로 이 부분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내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했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친말한 관계로 그를 용납해주지 못한다면, 내가 형제의 실수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다 할지라도 그를 나와 한 몸된 지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가 형제의 허물에 대해 참아주었다 할지라도 그를 한 공동체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찢는 행위요, 이것 또한 6계명을 어기는 살인 죄이다.
여러분, 6계명을 어디까지 생각해보셨는가?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관계를 이어나가며 스스로를 통제하라고 말이다. 분노가 일어나는 단계에서부터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 혹 모르고 넘어갔다면 예배의 중간에라도, 예배의 절정의 시간에라도 먼저 가서 화해하라는 것이다. 이미 2,000년 전에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이 내용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가정해보라. 예배는 중간 정도 지나서 한창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시는 중이다. 그런데 설교를 듣던 중에 계속해서 설교말씀으로, 또한 내 마음 속 성령님께서, 누군가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을 생각나게 하신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배 도중 바로 일어나 나갈 수 있겠는가? 쉽지 않다. 왜 이것이 쉽지 않은가? 우리들의 종교 체제가 이미 그렇게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저 빈말로 “먼저 가서 화해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고 안다는 것, 교리를 공부하고 익히는 것은 단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줄줄 외는 정도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2천년이나 묶은 교훈이다. 2천년 전 문구나 표현대로 아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그 의미에 대해서조차 모른 채로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교훈의 깊이에서 자라가야 한다. 우리들의 시대 속에서 이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자.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관들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가득 채워져야 한다. “이 정도는 죄가 아니겠지" 정도로 만족하며 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악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가득 채워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을 채워주셔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셔야 한다. 우리에게 품으신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각 사람을 채우시고 붙들어 주셔아만 한다. 우리 이시간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