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신때문에 결국 내가 망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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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신때문에 결국 내가 망가집니다
우리는 혼자있을때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혼자있을때 속으로 기쁨과 안정을 얻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다음 질문입니다.
주로 어디에 돈을 쓰고 계십니까?
가장 지출이 많은 곳이 어디입니까?
다음 질문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하거나 깊은 절망에 빠지지는 않습니까?
마지막 질문입니다.
내가 가장 통제하기 힘든 감정이 무엇입니까?
좀처럼 제어하기 힘든 감정이나 잘못된줄 알면서도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은 무엇입니까?
제가 한 질문들은 모두 우상을 식별하는 법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내가 만든신’이라는 팀켈러의 책에 나온 질문들입니다.
우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상이라고 말하면 나무나 돌로 깎아놓은 신상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우상들의 본모습은 인간의 욕망이지 보이는 그 나무나 돌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은 나쁜 것들이 아니라 대부분 꼭 필요하고 심지어 좋은 것들입니다.
삶에 꼭 필요하고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우상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팀켈러는 자신의 책에서 우상들로서 자신의 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것들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고, 자연스럽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것들이 내 삶에 절대적인 것들로 변하여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십계명에서 제 1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2계명도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십계명중에 첫번째 두번째 명령이 우상숭배에 관련된 것일까요?
그만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데 있어 우상숭배는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상에 빠지기 너무나 쉽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우상들이 주님 앞에 드러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특히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그 우상숭배때문에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실까요?
첫째, 우상숭배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20절입니다.
참으로 너는 옛적부터, 너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너를 묶은 줄을 모두 끊어 버리면서 ‘나는 신을 섬기지 않겠다’하고 큰소리를 치더니, 오히려 높은 언덕마다 찾아다니며 음행을 하고, 또 푸른 나무 밑에서마다 너의 몸을 눕히고, 음행을 하면서 신들을 섬겼다.
여기서 주어는 ‘너’입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 번역본들을 보면 ‘나’라고 나오는 곳들도 있습니다.
만약 주어가 새번역처럼 ‘너’라면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럼 여기서 ‘멍에와 묶은 줄’은 이스라엘의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 땅을 경작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의무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멍에나 묶이는 줄로 여깁니다.
그래서 종교를 갖지 않으면 아무것도 매이지 않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이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에게 매이게 됩니다.
욕망이 있는한 인간의 마음은 본래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상들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죄의 노예로 전락할 뿐입니다.
그럼 만약 주어가 나’라면 어떨까요?
‘나’라면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였을때 그들의 멍에와 묶은 줄을 풀어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배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높은 언덕에서, 푸른 나무 밑에서 음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밑은 우상을 숭배하던 장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선왕당같은 곳은 산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치 마을 전체를 지배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상들이 높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푸른 나무 밑에서 하는 음행은 바알신을 숭배할때 행하던 성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알신은 폭풍의 신이자 비를 가져오는 신으로서 가나안 지방에서 오랫동안 숭배되어온 신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알신이 농작물, 동물, 인간의 생산력을 증가시켜준다고 여겼습니다.
풍요와 다산이 부와 성공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바알신전에서 일하는 창기와 하는 성행위는 바알신을 흥분시켜 더욱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준다고 여겼습니다.
바알신이 가진 풍요와 성적 쾌락은 그당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천수답, 즉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지을수 없는 땅입니다.
그만큼 모든 농사의 풍요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알신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매혹적인 신인 것입니다.
그 유혹에 이스라엘은 넘어갔고,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부로 부르셨는데 어느 순간 간음을 한 창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만큼 친밀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사이는 영 촌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죄가 있는데 그게 바로 간음입니다.
상대방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간음을 하면 그 관계는 깨지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부부가 서로의 간음을 이해해줄수 있습니까?
제 주위에는 간음으로 인해 모든 신뢰가 깨져 이혼한 부부들이 여럿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유일한 이혼사유중에 간음을 듭니다.
간음은 서로간의 약속과 신뢰를 깨뜨린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우상숭배는 바로 영적인 간음에 해당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실까요?
둘째, 우상숭배는 우리의 영혼을 점점 병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
하나님은 농부로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최상품의 포도나무로 심으셨습니다.
당연히 농부이신 하나님은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 들포도나무로 변질되어 나쁜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 이방민족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자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민족처럼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민족으로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처럼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수 있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23절에 보시면 그들이 골짜기에서 행한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골짜기란 ‘힌놈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자식을 산제물로 바치던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시는 것이 바로 인신제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몰렉 신을 섬기던 이방민족들이 하던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두가지 동물로 비유하십니다.
24절입니다.
첫번째는 어린 암낙타입니다.
어린 암낙타는 야생말처럼 이리저리 날뛸때가 있습니다.
발이 빨라 종잡을수 없이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날뜁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자기 욕망대로 날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번째는 발정난 들암나귀입니다.
발정난 들암나귀는 욕정이 솟구쳐서 주체하지를 못합니다.
사방으로 수컷을 찾아다닙니다.
이미 온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에 수컷은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마치 이성을 잃고 욕망에 충실한 짐승처럼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짐승처럼 변해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25절입니다.
맨발로 이리저리 암 낙타처럼 뛰어 다니느라 발 다치지지 않게 조심하려무나.
발정난 나귀처럼 뛰쳐 날뛰다가 목마르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조롱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일까요?
매일 집을 나가 방탕하게 놀고 다니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도저히 아들을 막을수 없어 밥이라도 잘 먹고 다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것은 아버지의 조롱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의 사랑일까요?
조롱이어도 아버지의 사랑이고 조롱이 아니어도 아버지의 사랑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의 반응은 차갑기만 합니다.
이방신이 좋으니 계속해서 쫓아다니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신들에게 푹빠져 영적인 분별력과 절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최근에 마약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습니다.
20대 젊은 미혼모인데 어쩌다가 마약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약을 끊으려고 해도 끊지를 못합니다.
어린 자식이 혼자 집에 내버려두고 밖에 나가 마약을 찾아 다닙니다.
정상일때는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이라서 자기 목숨까지 줄수 있다고 말하는데, 마약을 찾을때는 그 아이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약처럼 우상에 중독되면 우리의 영혼이 심각하게 병들게 됩니다.
우상은 나도 모르게 그 힘에 이끌려 스스로 통제할수 없게 됩니다.
그런점에서 우상은 가스라이팅, 중독과 비슷합니다.
지배당하는 것이고,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스라이팅 당하면 어느 순간 가스라이팅 당하는지도 모르듯, 우상도 그렇습니다.
서서히 마음을 차지하여 어느 순간 그 선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깨닫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또한 우상은 중독과 같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쉽게 끊을수가 없습니다.
중독의 동기가 숨겨져 있듯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만 봐서는 제대로 그 뿌리를 파악할수 없습니다.
돈을 숭배하는 듯보이지만 진짜 우상은 돈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정이나 두려움일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실까요?
셋째, 우상숭배는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3절입니다.
네가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 신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고, 감히 말할수 있느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우상숭배한 적이 없다며 부인합니다.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어떻게 낯짝 두껍게 부인할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단서를 출애굽기 32장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금송아지를 뭐라고 부르냐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하나님인데 본질은 우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어느 순간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현재 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지만 바알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 섬기는 신은 바알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단지 자신이 위로받는 도구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을 내 성공의 발판으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것만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바알신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름만 하나님이고, 본질은 바알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우상숭배를 쉽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입니다.
네가 잿물로 몸을 씻고, 비누로 아무리 몸을 닦아도, 너의 더러운 죄악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잿물과 비누는 더러운 것을 지우는데 사용되는 도구들입니다.
여기서는 각종 종교적 제사와 의식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저지르고 나서도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그냥 죄가 없어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종교적 의식과 엄청난 헌신들이 자신들의 죄를 덮어준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이런 행위를 토할것 같은 위선으로 여기십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일주일에 한번씩 예배드리는 것을 마치 목욕탕에 가서 때를 벗기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에서 아무런 죄책감없이 죄악을 저지르고나서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으로 퉁치지는 않습니까?
헌금하고 찬양하고, 성찬식하는 것으로 내 죄를 덮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마치 면죄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예배 그 자체가 우리를 죄악에서 깨끗하게 해줄수 없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눈감아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하는 상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실까요?
넷째, 우상숭배는 결국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와 돌을 우상숭배하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릅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자신들이 나무나 돌을 깎아서 만들고 자신들이 숭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낳은 하나님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우상들에게 빌고, 어려움에 처할때는 진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룰때는 우상이 필요하고, 곧 죽을거 같을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수 없는데 그들은 어리석게도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위기상황에서 거짓신들에게 아무리 빌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알과 아세라같은 가나안의 많은 신들이 이스라엘을 구해주겠습니까?
그때가 돼서야 이스라엘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바람핀 아내가 다 망하고 나니까 그때서야 남편을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의 본질은 28절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성읍의 수만큼 많은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들도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지 못합니다.
무능력합니다.
모두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섬기는 신들, 즉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우리는 우상공장답게 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우리 영혼의 방에 모시고 있습니다.
아무일 없을때는 그 방에 들어가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마치 하나님이 필요없는 것처럼 세상의 우상들을 쫓아다닙니다.
돈과 인정, 성취, 권력을 쫓다가 망할때 쯤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며 어리석음의 끝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도둑에 비유하십니다.
특히 왕들, 고관들, 제사장들, 예언자들같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도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들의 배를 불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잡힌 도둑처럼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바벨론에 끌려가는 수치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 디도서에서 거짓 복음, 거짓 가르침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러한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은 성도들의 삶을 망쳐 놓습니다.
거짓 복음과 거짓 가르침은 은밀하게 가장해서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 안에 이방신이 은밀히 들어와 섞이게 된 것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바알을 섬기는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뿌리는 죄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어야 하는데 그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들이 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에 어떤 우상이 앉아있습니까?
그 우상을 방치하면 어느순간 우리를 하나님 사랑에서 끊어놓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수치를 당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의 위험성을 깨닫고 내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결코 우상에게 내어놓지 않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