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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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종교개혁자 루터라는 사람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답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이를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보기에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나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는 서신으로 보였습니다. 바울서신과 비교하면 더욱 이 차이점이 강조되어 드러나는듯 합니다. 때문에 그는 야고보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학창시절 제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신 한 교수님께서는 야고보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참으로 지푸라기 서신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지붕을 올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짓는 집이 초가집이라고 했을 때에 그 집의 지붕이 바로 지푸라기로 만들어집니다. 지붕은 눈과 비를 막아주고 햇볕을 막아주는 등 집을 집답게 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구원이라는 집을 짓는 토대는 바울서신에서 나와있듯 믿음이고 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집을 세운 뒤에는 지푸라기로 지붕을 올려야 합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안의 교회는 교회 안에 지붕이 무너져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눈과 비에 그대로 노출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교회들을 향해 지붕을 수리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 속에도 교회로 부르심받은 우리의 삶 속에도 집은 멋지게 지어졌으나 지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곧 장마철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라는 교회 안에 지붕의 상태를 점검하여 누수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서론

기록으로 남아있는 초대교회의 증언들과 대부분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형제이자 사도인 야고보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야고보는 ‘흩어진 열 두 지파’를 향해 편지합니다.
이 흩어진 열 두 지파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언뜻 열두 지파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쓴 편지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때에 정통적인 유대 열 두 지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이 단어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해석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핍박과 박해를 피해서 실제로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포로기 이후 성경 안에서 열 두 지파는 종말의 날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실 ‘새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지곤 했습니다.
‘흩어지다’는 뜻은 우리에게 친숙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인데요, 핍박을 피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참된 본향인 하늘로부터 흩어져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는 단어로 쓰여졌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서는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회들, 저와 여러분에게 쓰여진 서신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흩어진 열 두 지파인 줄로 믿습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피해 흩어져야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사방으로 살기 위해서 흩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열악했고 사회, 정치적인 지위도 낮았습니다. 매일매일이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초창기 교회는 믿음을 기틀로 한 견고한 집을 짓고 그 시험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그런데 점점 지붕에 물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속에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속으로는 부자들을 부러워하며 부와 물질을 쫓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교회 내에는 서로 간에 판단하고 비방하는 말들이 오고갔고 차별이 만연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욕심이라는 비가 교회를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교회를 향해 집의 상태를 좀 보라고 편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험에 대하여

야고보는 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은 시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년 365일 교회라는 집에는 눈과 비가 세차게 내리며 우리의 지붕을 두들깁니다. 시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죄를 짓게 하는 내적인 유혹으로 말미암는 시험이 있고 두 번째로는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이나 어려움으로 말미암는 시험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여러 가지 시험에는 이 두 가지 시험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시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험의 이유는 성경에서 ‘의의 고난'이라고 말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보통 ‘우리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때로는 우리의 부족함이 시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부족함이라는 벽 앞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슬퍼하고 무너집니다. 그 부족함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는 환경과 세상적인 부족함이 있습니다. 가난과 궁핍, 질병, 능력과 실력 그리고 주어진 상황들이 이러한 부족함에 해당됩니다. 또한 인격적인, 영적인 부족함도 있습니다. 원망하고 비방하며 시기하며 질투하기도 하는 등 여러 유혹들과 충동들에 쉽게 넘어가는 것들이 이러한 부족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외에도 부족함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시험에 처했을 때에 ‘기뻐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보통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됩니까? 기뻐하십니까? 말씀에 써 있으니 순종은 하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종의 결과가 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험을, 부족함을 마주하는 일은 결코 기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왜 시험을 당하는지에 대한 영문을 모르기도 합니다. 보통 시험에 대한 당연한 반응은 기쁨이 아닙니다. 내가 밉고 또 상대방이 밉고 나아가 하나님이 밉고 대체 내가 이렇게 힘든 가운데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시험을 기쁘게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기뻐하는가?

야고보는 3절에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알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이렇게 설명을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제가 강도사고시라는 시험에 답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준비했을까요?
여러분, 시험을 기뻐하려면 시험과 그 답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차게 비가 오는 시험을 맞닥뜨렸습니다. 이 시험을 기쁘게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집에서 창틀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풍경을 보며 커피와 음악을 틀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저를 상상하면 참 기쁩니다. 특별히 더 기쁜 이유는 조금만 기다리면 비가 그치고 곧 화창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라는 시험을 만났을 때에 내어놓는 답은 비라는 시험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붕이 튼튼한 집에서 비를 피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아무리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언제 그칠지도 모르고 그 비를 어떻게 피할지도 모른다면 기쁠 수 있을까요? 조금도 기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에는 답이 있습니다. 다만, 그 답을 정답으로 제출하느냐 오답으로 제출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과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보통 우리의 마음대로 시험에 답을 달면 틀립니다. 시험은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고 지혜를 얻습니다. 인생의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을 위해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가 바로 말씀이자 성경입니다. 성경이 시험과 답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첫 번째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을 만났을 때에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험과 시련을 통해 만나게 되는 우리 스스로의 부족함은 나의 바닥, 민낯이 보이도록 만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평소에는 별 차이 없는 삶을 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험 앞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보이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물론 초반에는 양측 모두 자신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부족함을 원망하고 절망하는 등 같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이 계속되어 갈수록 그 차이가 보이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답을 내어 놓습니다. 이는 오답입니다. 시험을 견딘다기 보다는 굴복하거나 회피하거나 포기합니다. 부족함을 어떻게든 채우려는 나머지 자신의 도덕성이나 존엄성 심지어는 목숨마저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부족함의 구렁텅이에 빠져 계속해서 원망과 절망에 빠진 안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한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시험 가운데 아무리 채우려해도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패배자로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잠깐 절망의 늪에 머무를 수는 있지만 이들은 곧 일어서게 되고 이어 가득찬 기쁨과 기대로 가득해지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서 발견하게 되는 믿음과 그 믿음이 주는 소망을 답으로 제시하며 이들은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을 정복해 냅니다.
다윗의 시편에 이러한 흐름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에 다윗은 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뒤 즐거워하며 찬송하기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는 삶 자체가 시험이셨습니다. 그 시험의 정점인 십자가라는 시험에 예수님께서는 절망하시고 두려워하셨으나 그 앞에 있는 기쁨,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으로 인하여 시험을 참으십니다. 그리고 결국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시험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제자들 또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참고 기쁨으로 이겨내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속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우리 또한 시험 가운데 절망과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알아야 할 사실은 그 어둠이 우리를 잠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반짝이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과 절망의 골짜기라는 시험 가운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능히 주어진 길을 기쁨으로 걷도록 합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 결코 하나님이 나를 악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믿음, 부족한 내가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시험 중에도 우리를 일으켜 기쁨으로 견디게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발견한 우리는 자신이 ‘믿음’이 있는 사람임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악으로, 멸망으로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기쁘게 인내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왜 인내할까요?
윤성이는 팔을 꼬집는 시련을 인내합니다. 운동선수들은 힘겨운 훈련들을 기꺼이 인내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들로 인해 겪는 많은 시련을 인내합니다. 시련에 인내하는 이유는 이 시련 가운데에 기대하는 끝이 있고 또한 인내의 끝에 기대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이를 3절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걸음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걸음 가운데에 ‘목적’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시험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시험과 시련을 겪는 순간이 무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시험을 견뎌냈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쁨으로 인내함이 만들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더욱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시험에 인내하면 그 시험의 결과가 선하다는 것이 예정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사람들은 불확실함 가운데에서도 잘 될 거라 믿고 인내합니다. 여러분 만약 그 인내의 결과가 확실히 잘될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 인내는 더욱 기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함이라는 결과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더욱 큰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에 있어 인내함에는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함에 목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내의 목적은 바로 4절에 있습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시험의 원인은 부족함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험을 당할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시련과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단편적인 모습과 상관없이 마침내 저와 여러분을 ‘온전하고 구비하여(완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이끄시기로 목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견인받는 성도의 삶의 한 순간은 시험으로 가득해보일 수 있지만 마침내 돌아보면 한 찬양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은혜, 은혜일 것입니다.
장인의 손에 의해서 태어나게 되는 걸작들의 첫 모습은 참 볼품없습니다. 그러나 제련되고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고 마침내 나오는 작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련되고 다듬어지는 동안 재료들은 그 시련을 인내합니다. 아니, 인내하게 된다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왜냐하면 재료들은 장인의 손에서 장인의 뜻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볼품없고 한없이 부족하던 것들은 걸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내와 결과가 이와 같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하심과 인도하심의 능력이 있고 그 힘으로 우리가 인내라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실패할 일이 없는 매커니즘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부족하던 우리는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걸작품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재료들에게 자아가 그것도 ‘아픔을 싫어하는 깨어진 자아’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깨어진 자아는 죄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의심입니다. 죄책감입니다.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까? 이러한 의심들은 하늘의 지혜가 아닌 땅의 것, 땅의 지혜, 귀신의 지혜라고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시험에 대한 오답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눈 앞에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오답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지혜

야고보는 이 오답 대신에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가 있다면 모든 부족함은 곧 만족함으로 변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만약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없다고 덜 주시고 부족하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그런 하나님께 지혜의 부족함을 구하라고, 기도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지 않으십니까?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지혜를 예수님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가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고 궁핍하셨고 낮은 자리에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부족함으로 시험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주어진 것을 부족함이 아닌 만족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이 이 땅이 아닌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부족함을 만족함으로 여기도록 하셨고 시험을 견디고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수님의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을 때 깨어진 저와 여러분의 자아가 온전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는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서, 제련되고 모난 곳을 깎이는 고통을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이 불쑥 드러나 다시 우리의 믿음의 눈을 흐리게 하고 의심의 구름이 드리워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부족함을 보게 만든다면 그 때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만족하시며 기쁨으로 순종하신 그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때에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부족함에서 다시금 만족함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부족함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마다 우리는 오답을 찾고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답을 압니다. 시험의 정답은 기쁨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위로부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만족함으로 여기도록 하는 예수의 지혜가, 하나님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안에 ‘나'라는 소망을 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품은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이를 향한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부모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가 부족한 것 없이 온전하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이는 부모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부족함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과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하이가 아무것도 없고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에 부모님은 하이의 온전함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온전함을 보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 지혜가 우리의 시선을 당장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도록 하고 부족함을 만족함으로 바꾸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 가운데 지혜를 구하십시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라는 지혜를 얻으십시오.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어머니 품의 아이처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포도와 같이 하나님께 붙어있으십시오.
시험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 구하고 성령님께 의지하여 예수로 쓰십시오. 그리하면 몰아치는 비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의 터를 세우고 비가 새지 않는 튼튼한 지붕에서 언젠가는 끝날 그 비를 느긋하게 맞으며 여유롭게, 기쁘게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 비가 그치게 되면, 흩어진 교회가 모이듯이 온전케 되어 우리의 본향 천국에 도착해있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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