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_09:57-09:62_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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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57–62 NKRV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intro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이제는 전세게 어디에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독특한 자신의 현실조건 속에서 주님을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
미국, 프랑스, 몽골, 키르키즈스탄 등등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 위에서 주님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천차만별입니다. 예배순서도 다르고, 가정생활도 각양각색입니다.
농경문화부터 IT첨단AI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신앙고백 한 가지 빼고는 모든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는 본인의 고정관념은 다양한 문화를 열린마음으로 접하다보면 점차 완화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동기전도사님들과 하던 농담 중에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도사는 책 1권읽고, 진리를 깨달아 확신에 차있는 전도사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말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확신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맞는 말을 맞다고 하는게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지내다보면 옳고 그르냐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지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날을 세워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를 얼마나 잘 따지느냐에 있지않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친구로 지낼 수 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과 친구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 나랑 성향이 안맞는 사람. 나랑 입맛이 다른 사람. 어쩌면 나보다 더 잘난 우수한 사람,혹은 나보다 한 참 못한 찌질한 사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 등등 어디까지 같이 지낼 수 있는가가 신앙의 관건입니다.
사도바울은 왠만한 사람들과는 다 친구로 지냈습니다.
로마서 1:14 NKSV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주님께서 세싱천지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친구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천차만별이라고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신앙의 현실이 있습니다.

1_point)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 편한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1_reason)왜냐하면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주님께서 마음 편한 날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57–58 NKRV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기롭게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진심어린 고백은 참 좋지만, 현실적으로 각오는 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따라 살든지 말든지는 각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르겠다고 한다면 그 때부터는 얘기가 복잡해집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꿈이 있고, 각자의 욕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종종 물어보셨습니다.
마가복음 10:36 NKRV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서슴없이 본인의 기도제목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0:37 NKRV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의 대답은 내 인생에 하나님의 영광이 좀 나타나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님 옆에서 후광이라도 좀 받아서 남들 과는 다른 본인만의 특별한 은혜를 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어차피 섬기는 인생, 더 많이 가져서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좋지, 자기 굴 하나없는 여우처럼 구질구질한 인생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왕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폼나게 지내는 것이 좋지, 자기 집이 없는 새들처럼 머물 곳이 없어 떠돌아 다니는 처량한 인생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디 머리 둘 곳도 없고, 마음 편안할 날도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를 수시로 일으키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늘 풍족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매끼니마다 배부르게 먹고, 또 남는 것은 주위에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름답게 지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병이어는 단 한번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들판에 남들이 추수하다 남겨 놓은 밀이삭을 비벼먹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온 천지의 금은보화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1년에 한 번 내는 성전세가 없으셔서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겨우 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이시면서도 무엇때문에 현실을 그렇게 어렵게 지내셨을까요?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현실적인 각오를 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주님의 관심은 온통 사람의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인격적인 새로운 변화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든지 말든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따르겠다고 결정을 한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을 사로잡으십니다. 그 때부터 마음편할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7 NKSV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성령이 가슴에 찾아오셔서 끊임없이 정신을 흔들어 일깨우시고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각종 내면훈련으로 고된시간들을 보내게 하십니다. 내면생활은 곧 광야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고독한 시간들이 많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언제나 내 입장에만 관심이 쏠려있지만, 성령께서 내면을 붙잡으시면 내 앞에 사람이 나랑 똑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 관심이 생깁니다. 지금 내 아내의, 내 남편의, 마음이 어떨까. 지금 저 권사님의 마음은 어떨까. 집사님, 장로님이 지금 마음이 어떨까에 관심이 생깁니다. 상대방을 헤아리는 연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면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가는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입니다. 내가 동의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초장에 배척하지 않고, 어떻게는 관용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면에 하나님 나라보다 자기욕망이 우세한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 말이 맞지’입니다. ‘내가 틀린말 했어?’ 입니다.
내면의 싸움은 나를 주장하던가, 나를 부인하던가의 기로에 서는 것입니다.
내면싸움은 치열합니다. 혼자 마음 속에서 하는 싸움같지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나.하며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밀어내고 분노로 끌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이 성령을 밀어내면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다툼과 깨어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편할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에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내 자연스러운 육체의 본성을 거스르는 현실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내 안에, 내면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내야 합니다. 그 사람 발밑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종주먹을 치실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끝까지 버틸 것입니다. 그런 굴욕을 당하느니 성을 갈거나 장을 지지는 것이 낫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댈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는 강력히 요구하시지만 결코 강요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섬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에 자발적으로 순응할 때, 살아계신 주님과 교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본인의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주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입니다.
동시에 모든 예배의 목표는 우리의 내면을 지성소로 삼아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본인의 본성이랑 맞지 않아서, 마음이 짓밟히는 것이 같이 괴로우면서도, 주님의 요구에 순응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일수록, 그 상한심령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51:17 NKSV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아직 결정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내면에 싸움은 없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면에 육체의 욕망도 싸울 상대가 없으니 오히려 잠잠합니다.
이생의 자랑에 따라 마음이 끌리는 대로 마음 껏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그냥 놔두십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교육정도에 따라 교양있고 품위있는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언제든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정을 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께서 가만이 놔두시지를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향해 굳어 있는 마음을 갈아없으시고, 말씀을 듣고 순응하는 감각을 열어주십니다.
예배에 감격을 회복해 주시고, 기도에 눈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공유하는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나날이 섬세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고, 정욕을 물리치라고 하시고, 이생의 자랑에 현혹되지 말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실제로 주님의 우편에 앉기까지, 이 땅에서의 날들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_point)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편할 날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자리가 수치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겨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가진 것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 된 나라이기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능력있는 사람들일수록 전부 주님을 따라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섬겨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알아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면, 사람들은 우리를 능력없고 힘없고 초라한 사람들도 여깁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실제로 능력도 없고, 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낮은 자리에 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세상의 것들로 위로하려고 할 것입니다. 위로는 항상 고맙지만, 낮은 자리에 간다고 낮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들어 올리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 안들어올리시면 다음 생에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해주면, 사람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할 것이고, 만만하게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렇게나 세워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본성이 죽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아무도 모르게 주님과 함께 서 있을 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매일 밤마다, 매일 새벽마다,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세상 속에서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결심은 3일천하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하셨다면, 마음 불편하게 살아갈 각오를 하십시오.
같은 처지에서 견디셨던 주님께 위로를 받으십시오. 내가 너를 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들 욕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욕을 하고, 다시 힘을 얻어도 하나님 앞에서 힘을 얻으시는 굉장한 분들이 되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습니다.
그 억울하고 살떨리는 시간을 입을 꾹 닫으시고 견디시면, 주님의 위로가 그 상한 마음 위로 덮이게 될 것입니다.
찬양 한 소절을 부르기도 전에 이빨을 깨물고 울음을 참아야 할 감경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단어 하나에도 다시 잘 살아봐야겠다는 소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왕 주님을 따라 여기까지 지내왔다면, 내 삶에 마지막 날까지 주님께 모든 것을 걸고 끝내 영광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지만,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두번째는

2_point)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각자의 독특한 현실 조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먼저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먼저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9:59 NKRV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당장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아버지 장례식이야기를 합니다. 주님께서 이제 막 초상난 사람을 성급하게 부르신 것일까요? 사실 이 핑계는 당시에 유명한 예의상 거절표현입니다. 아버지가 실제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주님 면전에 대고 거절할 수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며 예의있게 거절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에게는 지금 당장은 주님을 따라 다닐 수 없는 독특한 현실 조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전부 대가족으로 모여 살았습니다. 지금처럼 한 가족에 3-4명인 핵가족이 아닙니다. 최소 100명정도 되는 대가족으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도 일찍나는 시대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부터 고손자까지 5대정도가 함께 지냈습니다.
이 당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100명도 넘는 본인의 가족공동체에서 뿌리를 뽑아서, 지금 주님과 함께 몰려다니는 새로운 제자공동체로 뿌리채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의있게 거절한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좋았지만, 개인적인 독특한 현실 조건이 있어서 당장 공동체를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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