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잘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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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같이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오늘 함께 은혜 받으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1절로 13절 말씀입니다. 제가 먼저 읽고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읽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초대 교회 중에서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던 교회였
습니다.당시 고린도는 상업이 번성한 항구도시로 많은 우상의 신전과 매춘이 성행한 곳
이였습니다.
각종 우상의 신전에서 드려지고 남은 제물을 성도들이 먹는 문제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서 바울이 답변하고 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오늘의 주제를 로마서 14장에서도
동일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기록된 것으로 추정
하기에 로마서는 이 문제를 오늘 본문 보다 정교하게 신학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습니
다.
당시 고린도에는 많은 신전들과 그 신전에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 인하여 남는 고기를
시장에 유통하는 일이 흔한 일 이였습니다.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고기)은 그 유통량
이 상당하여 먹고 남은 것을 냉장 보관시설이 없던 그 당시에는 시장에 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시장에 유통되는 고기가 우상에 바쳐진 고
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사서 먹는 경우가 있었고/ 어떤 이는 우상의 제물로 사용
되어진 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고기를 먹는 교인들을 정죄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과 함께 교회안에 있었다는 것은 실로 은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듯이 유대인이 당시 율법으로 이방인과 같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후5:17절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선포합니다. 이는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 우리의 신분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야만인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한 자는 죽음 이전의 삶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의 말씀과 참된 지식안에 거하지 않으면 이전의 관습이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하게 됨을 봅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이전의 관습이 우리 몸에 왕 노릇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고린도 교회안에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이전의 관습을 따라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사서 먹으면서도 믿음으로 그 일을 한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반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이전의 관습을 따라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고기를 먹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태도에서 신앙적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과 먹지 않는 것 모두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성도에게 걸림이 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중심이 되는 마음, 상대방을 부요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원리, 자신의 권리라도 형제에게 걸림이 된다면 단호하게 내려놓는 자기포기의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에 본질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비본질적인 문제를 내려놓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지식으로부터 가능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1절에는 “오늘의 주제가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 나니” 본문의 주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입니다. 4절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으로’ 주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됩니다. 본문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그러나 1절~3절까지의 도입부분은 우리의 시선을 주제를 넘어서 “지식과 사랑’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는 사도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이면에 있는 더 본질적인 것을 다루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다고 말합니다. 1절에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말합니다.이것은 특정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서 언급하는 ‘이 지식”과 비교할 때 1절에서 말하는 지식은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입니다.1절을 보면, 지식의 성격은 교만합니다.교만하다는 그 원어적 뜻은 “바람을 불어 부풀게 하다”입니다. 이는 속보다 겉을 강조한 용어입니다. 내면의 중심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중점을 두는 태도입니다. 갈6:3 말씀에”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은 불완전하고 단편적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의 시작부터 이 부분을 언급합니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지 않을 때 명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분명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불의함, 악함, 거짓됨,부정함을 깨닫는 일이 없다면, 언제나 우리 자신을 의롭고,올바르며, 지혜롭고 거룩한 것으로 보게 되어 있으니 이것 이야말로 우리의 타고난 교만이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성격은 교만입니다.
본문 3절은 지식에 대한 대칭어로 갑자기 사랑을 소개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사도는 사랑을 표현하면서 다소 의아한 말씀을 합니다. 사랑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알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성격은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그 대상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식과 사랑의 성격이 대조적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알려집니다. 지식은 나만 습득하는 것이지만, 사랑은 나를 남에게 습득 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사랑은 ‘알려진다’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자기자신이 중심에 있지만 “알려진다”는 상대방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자신을 부요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타인을 부요하게 만듭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하는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안다”는 지식이 아니라 “알려진다” 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에게 우리는 알려집니다. 하나님이 내 사랑을 통해 전달받은 지식으로 인해 만족 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하나님이 ‘아신 바’ 되는 사랑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4절-8절 본론으로 들어가면 바른 지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먼저 우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상은 사람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입니다. 따라서 매우 다양하고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우상의 형상들을 보십시오! 수만가지 형상들이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의 필요는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은 한분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인정됩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고전 8:6 “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성부 하나님과 같이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이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롬11:36말씀을 보십시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우리는 창조주안에 있을 때 목적을 따라 빛을 발현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반역으로 어그러지고 왜곡되었습니다.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말씀 요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롬4:5 절은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바른 지식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까? 7절의 말씀같이 이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의 지식입니다. 이 바른 지식이 없으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관습이 왕 노릇 합니다. 습관적으로 중생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8절을 보면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신앙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도 않으며,먹지 않는 것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설명합니다.음식의 섭취는 성도의 신앙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앞에서 살펴보았듯 바른 지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외에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이것이 바른 지식이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본질입니다. 음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방편입니다.그러나 음식이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부이시고 주님 되십니다.
9절말씀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서 자유 하다고 생각하는 너희들도 생각해 보라! 너희처럼 자유롭지 못한 (즉,믿음이 약한자들이) 너희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실족하지 않을런지 주의해서 행동하라!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지만 타인을 위하여 그 자유를 스스로 묶을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바른 지식과 자유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내가 혼자 존재할 때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한 지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전 12:25-27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아멘 입니까? 어느 지체가 아픈데 몸이 온전할 수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는 사랑으로 알려지는 공동체 입니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전13: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이에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0절부터 13절까지 말씀은 더욱 확증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사랑으로 제한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로 형제 자매가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게 된다면 그 결과가 상상이 되십니까? 주님이 그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를 받으셨는데 내가 누구 건대 나의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 주님이 보혈로 사신 형제 자매를 실족케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성도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문제에 개입하십니다. 형제를 파선케 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까지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거침을 당하는 자는 멸망하고 거침을 두는 자는 범죄하는 것입니다.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자유한자, 믿음이 강한자라고 이야기 한 것은 실제 그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우상의 제물이 시장에 유통되는 것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상의 신전까지 가서 그 제물을 사서 먹은 것을 봅니다. 얼마나 그 형제를 무시하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오히려 그들의 마음속 교만을 보고 있지만 사도는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사회에서 오랜 기간동안 컨설턴트로 기업에 자문 역할을 하다 보니 그 기업의 속사정을 살펴볼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어떤 조직이나 갈등이 없는 조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갈등과 어려움이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터뷰와 현장조사를 통해 파악한 대부분의 갈등의 원인제공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바른 말을 했습니다. 저는 정직한 사람입니다.한 것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코칭이 진행되고 심화될수록 관계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갑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끝까지 자신의 옳음만 주장하다가 시간을 다 버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도 그리고 자신의 경력도 끝장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속에 잠언9장8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높일까요?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거듭나지 않은 인생은 누구나 그렇다는 것입니다.언제나 자신이 옳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하고 항변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솔직하고 순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속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없거나 힘이 없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형제 자매에게 상처주는 일이 없나요? 안타깝게도 교회안에서도 세상과 같이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드러내 놓고 이야기는 하지는 않지만 그분들의 속 마음을 살펴보면 항상 이렇게 자문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입니다. 그 마음 중심에는 내 말이 옳아! 나는 내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야! 위선적인 사람은 질색이야!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쉽게 하면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무것도 안 하겠어요!” 마치 뒤로 물러서 갈등을 회피하며 평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이 말입니다. 교회안에서도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인간은 외식의 경향이 있어서 “의’ 그 자체가 없이 텅 빈 “겉모양의 의” 만으로도 얼마든지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왜 성경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 먹어라! 먹지 말아라! 먹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이 세가지 중 하나의 답이 아니라 지식과 사랑을 이야기 하고 바른 지식을 이야기 할까요? 복음을 이야기하고 종국에는 그리스도인의 권리 제한을 이야기할까요? 하나의 문제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충고라고 상대방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옳다는 문제로 성도를 정죄하고 수군거리는 문제는 어떤 가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용납하는 작은 이문제가 형제들을 실족하는 문제가 된다면 오늘 사도 바울의 결단처럼 여러분도 영원히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그러한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기”위한 것도 아니며, “어떤 사역들을 하기”위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 처럼 되기”위함 입니다. 바른 지식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경건의 능력을 옷 입기 위하여 다음 두가지를 주의 하시고 한가지를 집중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떠한 인간 관계이든 나와 관련되어 갈등이 있다면 그래서 내 마음속에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다 잘못했다” 로 생각을 전환 하시기 바랍니다. 롬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지식으로, 내가 옳다고 믿는 믿음으로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방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좁은 길,낮은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알려지는 자들입니다.복음은 내가 보기에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형제를 위해 그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둘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여러분을 하나님과 화평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대속이기도 합니다. 그 형제를 낙심케 하거나 실족하게 한다면 결코 여러분이 죄 없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절 말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 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모든 사람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되 더욱 주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더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집중할 한가지는 “모든 일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 집니다”. 중생을 경험한 우리는 성령님이 죄를 조명해 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우리 마음 가운데 만들어 가십니다. 그분이 일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도, 형제를 위하여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분을 근심케 하지 마시고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깨닫게 하신 죄를 회개하시고 거룩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빌2:13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롬14:17 “하나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아멘! 아멘!
이 시간 주님의 이름을 한번 부르시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시겠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