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문 좁은길
Notes
Transcript
마태복음 7장:13-14절입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누가복음 13장 23-30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오늘 제가 세번째 수요 예배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들을 보니 항상 수요 예배를 나오시는 분들이네요! 여러분 얼굴만 봐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시는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를 다 들으신 분들이지요? 제 첫 설교는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다시 태어남, 즉 중생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권면 했습니다. 두번째는 고린도전서 8장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저와 매우 아주 친한 어떤 권사님은 설교 후 제게 찾아와 야단을 맞은 느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의 미숙함을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니 또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입니다. 아하! 오늘도 듣기가 거북한 말씀이 선포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회개를 선포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같이 유명한 말씀을 설교로 전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여러분이 한두번은 모두 들었던 설교이고, 설교로 유명한 목사님들의 내용들이 유튜브에서는 물론이고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서 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설교자의 입장에서 결코 하고 싶은 설교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설교를 이제 막 신학교에 간, 배우고 있는 초보 전도사가 계속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참 역설적이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역설이 그렇게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우리가 종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찾고 부르면서 누구보다 자유 한 자라고 말합니다. 신기 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복음을 깊게 이해하면 할수록 자유로워 집니다. 죄에서 자유롭다 하고 승리했다고 하면서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인이라면서 여전히 죄 짓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는데 아직 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는 세상이 말하는 이분법의 기초 학문이 아닙니다. 흑백, 선악,진보/보수 이런 양자택일의 진리는 더 더욱 아닙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 너무도 궁금하여 성경을 보고 주석을 보고 원어를 찾아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진리는 사람이 만든 사상과 이념과 관념이 아니구나! 라는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주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좁아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문으로 표현합니다.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이 예수님을 말합니다. 도적은 문으로 다니지 않고 목자는 양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요 14:6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언 하십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 입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주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24절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그것을 구하여도 얻는 자가 많지 않다. 말하십니다. 이를 볼때, 좁은 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음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찾아도 그것을 얻는 자가 많지 않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이것은 저의 평생의 싸움 이였음을 여러분 앞에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저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찾는 반역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아멘 했지만 돌아서서 나의 삶으로 들어가서는 정작 믿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상상 속에 있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실제라고 성경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놋 뱀에 대하여 기억 나시죠? 민수기 21장 9절 말씀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 이 배경이 기억 나시죠! 이스라엘 백성의 1세대가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고 이제 38년 광야를 유리하다가 드디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와 똑 닮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길을 돌아가는 일로, 시작하여 40년동안 먹이신 하나님의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불평합니다. 이 만나는 말씀이고 예수님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 이스라엘을 징벌 하십니다. 그때 또 모세가 중간에 나서 하나님 앞에 중보 하여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놋 뱀을 장대에 달아 들고 진영을 다녀라! 그리고 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는 자는 모두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는 모든 백성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쉽지요?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재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고 말씀하십니다. 바라보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이것은 대단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어렵지 않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 없는 단순한 과정이지만 그것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바라봄”입니다. 소망과 기대와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구약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놋 뱀과 같이 장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우리의 물질과 시간을 들여 선한 일에 쓰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롬4:5절: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 지시나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아니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중독에서 해독이 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죄의 중독과 모든 불의와 악에서 자유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삶에 날마다 때마다 기억되며 증거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좁은 문입니다. 이 진리를 찾기가 왜 이리 어렵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생명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좁은 문은 그리스도를 말하며 십자가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다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의 관심은 좁은 문을 들어온 우리에게 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에 들어간 사람들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 앞에 나온 ‘적은 무리’인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 문은 들어 가기를 원하여도 얻는 자가 많지 않다고 누가복음 13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좁은 문까지 우리가 잘 왔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배회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육에 속한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1절-23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좁은 문 앞에 도착했는데 들어가기가 힘듭니까? 남들이 찾지 않고 협착한 길을 찾아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왔는데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 거리다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고 주님을 찾습니다.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22절 말씀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좁은 문 앞에 왔으나 좁은 문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 문을 들어가지 못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어떤 자들이 문이 닫히고 문을 두드리고 주님께 항의를 한다고 말하고 있나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열매 없는 자들, 행악하는 자들은 좁은 문에 와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놋 뱀과 십자가는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요?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는 선행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했는데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는 선행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구원을 얻는 데는 이런 것들이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는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뜻과 의지와 능력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힘과 새마음으로 선하게 살아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 한 일을 맡기고 그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고 조금도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시편 14편1절, 어리석은 자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말씀 혹시 들어 보셨는지요? 갈라디아서 3:3절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돌아가 자기 의를 세우는 갈라디아 교회에 주는 경고 입니다. 그런데 이 경고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오늘 본문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그래서 잘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 처럼 좁은 문을 찾고 잘 들어 오신 분들에게는 이제 좁은 길이 눈 앞에 놓여 있습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면 좁은 길이 나옵니다. 좁은 길은 십자가이고 좁은 문은 예수님이며 영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삶입니다. 자 좁은 문을 찾았으니 설교가 여기서 마쳤으면 좋겠지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야기가 좁은 문을 찾는 것에서 마무리가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으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과 희락과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아직 입니다. 먼저 은혜로 좁은 문을 들어선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걸으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말씀 하십니다.그때까지 좁은 문을 들어온 자들은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 지식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살면 살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제자들의 실패를 언급함)
반대로 좁은 길을 걷는데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저 또한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좁은 문 까지 잘 왔는데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넓은 길을 찾았습니다. 반복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또 후회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데도 사람들 앞에서는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나는 담배 안 피지!,술 안 먹지! 바람 피지 않지! 교회도 빠지지 않고 나가며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헌금도 많이 내고 교사로 몇 십년을 봉사 했어!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과 비교하며 숨겨진 우월감과 교만함으로 살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어 그 은혜에 감사와 감격으로 열심을 내고 살다가 어는 순간인지 기억도 안 나게 “나의 의지와 자기 의가’ 되살아나서 믿음이 아니라 나의 의지로 선한 행실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 3:3절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의 경고는 우리가 날마다 새겨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열매는 없고 보여지는 행위만 드러나고 다시 넓은 길을 찾아 헤매기 시작합니다. 생명으로 시작했다가 종교로 끝날 뻔 했습니다. 이 길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윤리를 강조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어도 도덕적 성취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가능합니다. 분명히 증언하지만 도덕적, 윤리적 행위로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생명이 오고 영으로 살아가면 죄의 길에 서지 않게 됩니다. 시편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도다” 좁은 문으로 들어 왔으면 계속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날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과 타협의 삶을 살아가면서 넓은 길을 걸어 갑니다. 그 길이 쉬운 길입니다. 안전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내가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되어 통제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 주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멸망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 왔다고 안심하다
가는 넓은 길로 다시 걸어가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라” 내 생각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선한 일을 노력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그것은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고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자기 의를 세우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을 들어와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은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되어지는 삶을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인 된 인생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 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굳게 잡은 운전대를 놓고 하나님의 자율주행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협착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하는 삶입니다.
제 자신의 지난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면 모태신앙이 아니던 저는 도덕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며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멋있는 모습, 사랑, 대속 이런 모습,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하는 모습에 마음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면 대부분 실망하고 믿음을 떠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교회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악하고 부패했으며 전적으로 타락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이렇게 편협하고 좁은 편견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예수님은 넓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기도교인들은 도대체 뭐를 믿는 거지! 진절머리가 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저도 청소년기에 그렇게 교회를 바라보았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가고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세상을 살다가 지치고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는 과정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며, 그때서야 왜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는 것이 무엇이고 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아가게 됩니다. 저는 이때부터 좁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나아가야 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노력과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 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과연 그럴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그럴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고 그분이 최선이며 최종이며 궁극적 모든 충만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온 몸을 내던지는 실천이 없다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도 우리 신앙 여정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 한걸음이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들어 좁은 문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너무도 힘든 선택의 길이지만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는 하나님이 전부이기에 다른 것들은 반딧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좁은 길을 걷는 실례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신명기 15장은 읽으면 면제에 대한 율법이 나옵니다. 매해 7년째 되는 해에는 형제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종들도 해방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거나 형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허물어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고 합니다. 네가 꾸어 주는 삶을 살아도 꾸지 않고 네가 다스리는 자가 되어도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쉽지 않죠? 가난한 자들은 주변에 언제든지 있습니다. 시대를 국경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형제는 바로 지금 여러분들 옆에 있는 분들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발을 앞으로 내딛기를 저는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내딛는 이 걸음이 이후로는 뜀박질이 될 것입니다.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선행은, 착한 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안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내적 갈등이 오는 상황이 은혜 받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한걸음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선행과 자기의지는 댓가를 바라는 것이기에 믿음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그 속을 살피십니다. 그분에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면제의 7년주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 집니다. 저를 돌아보니 벌써 8번의 주기를 돌았습니다. “내 날이 연기 같고 소멸하여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나 이다” 시편 102:3,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허무합니다. 앞으로 제게 남은 주기가 4번 많으면 5번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절반입니다. 그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얼마나 지나온 시간이 빠릅니까?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음이 울적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립니다. 덧없이 보낸 세월이 한탄스럽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낭비한 시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죠?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제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요 21장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아멘! 앞으로 남은 삶은 지금보다 3배는 더 채우며 살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버킷 리스트를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분의 뜻을 구하며 온전히 그분에게 붙잡힌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02: 11-13, 23-25 “내 날이 기울어 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 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나 이다”
1.좁은 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좁은 문은 구원을 말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을 반역한 반역자이기에 그분 앞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도 없고 방법도 모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 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고 좁다는 것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길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하지 왜 누구 밑에 종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주 인 된 삶을 내려 놓고 살아가시나요? 주님의 주되심을 날마다 선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하고 화평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한번 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좁은 문에 들어 서는 것입니다. 문 안쪽의 세계와 문 밖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형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은 좁은 문을 들어온 사람의 고백인 것입니다. 좁은 문을 들어온 사람은 날마다 죽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생명을 구원 받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날마다 죽습니다. 자신이 주인 되어 살려고 하는 자아를 죽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이 들어올 때 우리의 자아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을 걸어 가게 됩니다.
2.또한, 좁은 문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반성하여 이제부터 잘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전과는 본질적인 다른 삶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전적으로 완전하게 부패되었음을 인정하고 완전히 죽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거듭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참된 성품의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깊은 영혼을 만져 주셔야 합니다.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거듭남의 교리에 반감을 가집니다. 인간의 부패함은 거듭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100% 성인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 하지만 100% 썩은 타락한 자라고 말한다면 화를 내게 됩니다. 스스로를 고쳐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쓸모없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 대상이 하나님이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부패함을 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으면 새생명도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용서 하셨습니다! 그러니 맘 고쳐 먹고 새 출발하세요! 만약 메시지가 이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완전히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와 머무신다고 복음은 말합니다.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갑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좁은 문이 있고 그 뒤로 좁은 길이 있습니다. 예전에 도착하신 분들이 여전히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 문을 들어가 좁은 길을 걷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 문을 넘어서 좁은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문의 이쪽과 저쪽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좁은 문 너머에는 믿음의 성장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문 이쪽에는 과거의 신앙 고백과 차갑게 식은 심장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을 걷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