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신의 성품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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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23- 3장8절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예배자로 이 자리에 나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가 죽고 그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신 은혜 감사드립니다.주님!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주의 나라가 이 곳에 임하고 주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부족한 자가 말씀을 들고 섭니다. 오직 주의 능력만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은 거듭남, 부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다! 입니다. 제목 한번 같
이 읽어볼까요?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제 인생에 역사적인 날에 서 있습니다. 살
아 오면서 강의와 강연은 많이 해봤지만 설교는 처음 해봅니다.그것도 나의 생각
과 관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떨
립니다. 제가 오늘 첫 설교를 한다고 하니 몇일전부터 잠 못 자고 걱정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누굴 일까요? 제 아내요? 그분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담임목사 님이요?과연 그럴까요?사실 첫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으로
몇 번이나 주제와 본문을 바꾸고 다시 썼는지 모릅니다.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을 하거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때 대부분의 부모가 가장 걱정하고 염려하면
서도 응원의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까? 설교 준비를 하며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마음이 제게 느껴지는 겁니다. 태형아! 내가 너를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불렀고 너
를 사용하려고 한다. 너의 시작을 내가 응원하고 격려하고 함께한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자 바로 평안이 제게 임했습니다.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많은 성
도님 들의 기도 덕분입니다.감사합니다!. 저를 부르신 주님이 지금 이자리에 함께
계시기에 좀 담대한 마음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제목 거듭남(‘신의 성품의 참여하다’)는 말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앞부분 ‘거듭남’ 이라는 말은 호감을 주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듭남’ 이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속에 “죽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듭남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게네땐 아노쎈’’으로 ‘다시 태어남’ 이란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born again’입니다.여기서 태어나다 라는 ‘게네땐’ 이라는 동사는 원형이 “게나오”로 헬라어의 부정 과거 수동태 용법으로 ‘태어나게 되다’ 입니다. 거듭남은 “거듭나다’라는 자동사가 아니라 “거듭나게 되다” 라는 타동사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지 않고 외부 힘의 개입을 말합니다. 거듭남이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은혜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듯이 거듭남 또한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출생입니다.따라서 거듭남에는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근에 주변분들이 저의 변화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십니다. 그것은 제가 55
세의 나이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때의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은 은퇴를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자녀들의
뒷 바라지와 부모세대 봉양으로 바쁘고 힘들게 삽니다.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의 숙제 앞에 직면하고 있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어
삶의 변화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잘하던 사업까지 내려 놓고 요즘 젊은 세대들도 잘 안가서 미달인 신대원을 가서 전도사
를 한다 하니 여러분의 궁금함은 참으로 정당합니다.그동안 제가 목사님을 비롯
하여 성도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디를 가나 듣는
질문이 바로 왜? 갑자기? 입니다.여러분도 궁금하십니까? 오늘 저의 첫 설교이니
말씀과 함께 그 비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눈치 빠르신 분들은 그
비밀이 거듭남의 비밀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잠시 오늘의 본문속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속에는 “니고데모”라는 유력한 유대인 관리이자 바리새인 지도자가 나옵니다. “니고데모”란 뜻은 정복자라고 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당시 유대인 70명의 리더 가운데 한사람 입니다.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높은 신분의 소유자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사람으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오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가 왜 예수님을 찾아 왔는지 정확한 기록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정황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신 것이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유월절은 1년에 한번 있는 유대인의 절기이기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라는 추정이 여기서 가능합니다. 3번의 유월절 중 오늘 본문은 첫번째 유월절로 추정이 됩니다.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하시고 많은 표적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2장 2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으로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므로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그럼 그는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어떠한 문제가 그를 출교의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했을까요? 이것이 오늘 아주 핵심적인 질문일수가 있습니다. 본문 3장 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본문 2장 24절 말씀에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대답에서 유추해 보면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궁금해서 왔을 겁니다.실제로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였습니다.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의 시작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인 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나라에 살면서 전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그 소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니고데모는 율법적 의로움을 지키며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살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몰랐고 그런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궁금했으며 자신이 믿고 살아가는 신념 체계 너머에 다른 무엇인가를 있을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 예수님에게 나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와 같은 유력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은 어둠과 밤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밤이라는 표현은 시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공간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의 영혼은 밤이라는 공간에 있었던 것입니다.우리가 읽었던 3장 2절의 ‘니고데모’의 첫인사말은 그런 배경속에 나온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인사말은 매우 사교적이고 부드럽습니다.보통 우리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네며 다가오면 호감을 갖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면박을 주십니다.”너는 거듭나지 않았기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런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예수님의 대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그가 어디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보았겠습니까? 이후 나오는 니고데모의 엉뚱한 질문을 보면 그는 매우 당황하여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오늘 수요예배를 참석해서 은혜롭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을 찬양 드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여러분의 귓가에 이런 말씀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단도직입적으로 하셨던 대답입니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니고데모는 이 당시에는 거듭나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의 당황함은 허를 찔릴 정도로 직설적인 화법으로 다가온 예수님의 화법에 있다면, 이미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런 단정적 음성을 듣는다면 큰 충격을 받지 않을까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거듭나셨습니까? 다시 태어나셨습니까? 이런 질문은 불편한질문 입니다.제 경험은 그렇습니다.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거듭남은 반드시 죽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죽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죽는 것을 싫어한다는데 있습니다. 자아가 죽는 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죽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가요?(1)여러분이 철석같이 옳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생각을 거스르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 여러분 반응은 어떤 가요? (2) 운전하고 가는 중 누군가 ‘빵’하고 클랙슨을 울리고 지나가면 여러분 마음은 어떤 가요?(3)아내가,남편이,자녀가 내 마음을 몰라주며 우리가 틀렸다고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지적을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참기가 힘듭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자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죽은 것 같다 생각하면 다시 살아나고 더 강해지고 더 교묘한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죠? 그리스도인 중 신학교에 가면 더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요?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려고 신학교를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런데 그 좁은 길에서도 사람은 넓은 길을 찾아가려고 하는 존재입니다.내가 좁은 길을 걷는다고 방심하는 순간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좁은 길 가운데서도 넒은 길을 찾아 가고자 합니다. 큰 교회 목회 하려고 하고 도시에서 사역하려고 하고 조건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다시 자아가 살아난 것입니다. 여러분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갈라디아서 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시 태어나게 되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
는데 거듭났지만 이전의 자아가 다시 살아난다면 거듭남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표현합니까?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예정과-택하심/그리고 부르심(거듭남을 말합니다)-회개-칭의-성화-영화로 이어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거듭남을 도착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도들의 삶의
시작이고 회개와 칭의를 거쳐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그리스도인
이 여전히 거듭남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회개와 칭의”의 단계를 건너 뛰었
다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별력 있는 성도는 자신의 영혼이 거듭남을
통해 회개를 이루고 그를 통해 얻은 믿음으로 칭의를 넘어 성화에 단계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두번째로 거듭남은 철저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듭남 이후 회개의 단계는 오늘 주제 중 하나인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께 대하여 살아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1:21에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합니다. 오늘날 많
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죽였다가 시퍼렇게 다시 살아나는 자아에 놀라는 이유는
내가 죽었다가 내가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나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에 우리가 연합하여 살아나는 것입니다.나는 날마다 죽은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는데 왜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지요? 주님은 부
유하신 분인데 우리는 왜 부유한 삶을 살지 못하나요?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를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생명을 누리지 못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나는 원리,우리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
께 연합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도적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
이고 멸망케 하려는 것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
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가 부끄럽게도 바로 그런 사람 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
며 거듭났지만 그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예수님과 연합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하신 자유와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늘 죄책감과 자
기“교만”사이를 오갔습니다. 오랜 믿음생활을 했지만 육체의 현저한 일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하고 살았습니다.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양심에 가책과 부끄
럼에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떨 때는 믿음에서 파선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울면서 물었습니다. “아!하나님! 저는 언제쯤 이 습관적으로 범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정말 믿음의 삶이 이렇게 죽을 때까지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건가요?그럼 하나님 말씀에 있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요한일서1장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한일서 3장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절 “ 하나님께 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너무 힘듭니다.” 기도 중 주님이 또 다른 말씀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시편 53:1-3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 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 최후 만찬 장면이 그려지는 것입니다.그때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말씀 하시자 제자들이 서로 “주님! 저는 아니지요?” 물었던 장면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그 장면속에 저를 오버랩 시켜 주면서 저의 죄를 조명해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사실 저는 제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책감이 있고 그래서 반성 하고 후회하고 양심이 괴로 왔지만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 였습니다.왜냐하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저는 저의 ‘교만’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잠언 30장 12절 말씀에 “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바로 제 모습입니다. 몇가지 양심에 걸리는 부분만 해결하면 누구보다 선하고 바른 사람이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한 제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제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고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바로 회개에 이르렀습니다.내 안에 부패함의 썩은 냄새와 악취가 진동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사람을 보면 내 안에 선한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안에 선은 없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 하나님 앞에 거룩함 입니다.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철저히 교만한 자신과 자기 사랑의
부패한 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 거듭난 이후 회개와 칭의 그리고 성화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 입니다.
시편 19:12절 말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편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러분! 사람은 고쳐서 쓸 수
가 없습니다.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칠수도 죽을 수도 없는 존재입
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겁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야 하는데 무엇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여
러분! 회개했다고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죄를 발견하게 됩
니다. 주체 할 수 없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이 회개입니
다. 죄는 성화의 과정에서 천천히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것을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십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지식이 믿음이 되는 과정을 경
험해야 합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이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간구하고 은혜를 날마다 구하며 그에 의존하
여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갈라디아서 2:20 말씀이 우리 고백이 됩
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삽자가에 못 박혔 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
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
듭남을 통해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으로 방향을 돌렸다면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자신이 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
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있지 않
다면 아직도 사탄의 나라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성경은 우리에게 중간 지대
는 없다고 말씀합니다.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죄 용서함을 받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옮겨 졌음을 믿으십니까? 네! 그 믿음은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로 예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는 이런 류의 믿
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남이란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무능력을 고백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빛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남보다 조금 더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외적으로 성공한 삶, 정서적으로 건강한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온 우주의 창조주, 통치자의 측량할 수 없는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로 연합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셨습니까? 자녀들의 진학과 취업과 결혼으로 마음이 힘드십니까? 부부관계속에서 아니면 사회적 관계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물질적 부족과 건강상의 어려움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가요? 주님 앞에 겸손히 간구하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십시오!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롬8:38-39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쯤 되면 궁금한 것이 과연 니고데모는 거듭났을까요? 성경에는 이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두 번 더 등장하게 됩니다. 7장 50절 이후로 예수님을 변론하는 장면이 나오고, 19장 39절에는 예수님의 장례 용품을 가지고 나옵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거듭남은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불가능 합니다. 3장 5.6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임을 알게 함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롬8: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처음에 들었던 거북한 질문을 지금 다시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그리고 회개 하셨습니까? 의인
인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하게 산다는 종교인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제 삶이 변화된 이유를 말씀 드린다고 앞에서 했는데요, 저는 23세 청년의 때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거듭났지만 그후로 3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정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늘 후회와 반성과 돌이키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니 였던 겁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죽음, 완전한 자기 포기가 없는 것은 “칭의”에 이르게 하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마음에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죄책감과 자기 “교만”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하나님은 제게 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시면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아들을 징계하듯이 끓임없이 징계하셨습니다. 고후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 도리어 너희가 근신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진정한 근심을 주신다면,성령님이 여러분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면 오늘밤 여러분 은혜 받을 때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저는 주님의 은혜로 마지막때에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임을 압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에 더욱 열심히 하는 것은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빌1:6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
회개하고 성화의 발걸음, 예수님 안에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도 너무 감사하고 좋은데 주님은 저를 향하신 또 다른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그 부르심을 받아서 신대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3번의 질문이 나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이 저는 제게 하는 질문으로 들리더라고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이 주신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젊어서는 스스로 네가 원하는 곳을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입니다. 요3:8절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제 저는 돗 을 펴고 바다로 출항하는 배와 같습니다. 지난 30년을 믿음의 도전 없이 항구에서 배수리만 하고 사라질 사람을 주님이 출항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바람에 따라 흘러 가는 것이 저의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항해를 끝까지 파선하지 않고 주님 오실 그날까지 부르시고 보내는 그곳에서 주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게 하소서!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기도 하시겠습니다.
성령님! 오늘 우리의 처지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간절히 주여! 한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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