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은혜

다시보는 룻기 시리즈➉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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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4:13-17
저는 오늘 여기 계신 성도님들을 이렇게 축복하며 말씀을 시작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처음 들어보시는 말 아니시죠?) 은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을 은혜로 수놓아 주시는 그 전능자의 손길 안에서 오늘도 예비하신 말씀의 은혜를 우리 성도님들에게 부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57년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존 리이터 교수가 실행하던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물이 있는 물통에 여러 마리의 쥐를 넣고는 뚜껑을 닫고 빛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그러자 쥐들은 3분여 만에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 실험에서는 모든 조건들을 동일하게 하되 희미한 빛이 통 안으로 스며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쥐들은 평균 36시간을 헤엄치면서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 갇힌 쥐들은 살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했지만, 한 줄기 빛을 보았던 쥐들은 무려 750배나 되는 시간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리이터 교수는 ‘과연 쥐들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을 버티게 하는 의지 같게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한 가지 실험을 더 진행하는데요. 쥐들이 헤엄치며 안간힘을 쓰는 그 절망적인 순간에 쥐를 건져 올려주는 절차를 몇 번 반복해 봤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쥐들을 가지고 다시 뚜껑을 닫고 빛을 차단한 채로 같은 실험을 반복했더니 놀랍게도 모든 쥐들이 평균 60시간을 버텼다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에서 750배의 의지를 발휘하고 20배 이상 버티게 했던 힘은 다른 게 아니라 한 줄기 빛과 구원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빛을 의식하고 이 구원의 팔을 의지하는 것, 저는 이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10주째 나누고 있는 이 룻기의 말씀이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삭 한 에바를 통한 한 줄기 구원의 빛과 보아스를 통한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혜 넘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룻기 이야기가 대단원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장인 4장에서 보여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만일 저에게 룻기 4장의 별명을 지어보라고 하신다면, 저는 ‘세 가지 은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은혜는 각각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그 첫 번째 은혜는 따라 해 보십시오. ‘반전의 은혜’입니다. 룻기는 완벽한 반전의 은혜의 기록입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어떤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룻기는 죽음으로 시작하는 성경입니다. 절망과 실패로 시작하는 성경이 바로 룻기 아닙니까?
1장 3절에서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고, 5절에서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되거든요. 단절되고 끝났을 것으로 생각됐던 곳에서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장례식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혼인 잔치로 끝나는 것이죠. 4:13-14 화면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룻기 1장 20절과 완전히 대조되는 말씀이거든요. 1:21-21 화면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이것이 나오미에게 주어진 대반전의 은혜입니다. 1장에서 울며 참담한 고백을 했던 나오미는 4장에서 주님의 풍성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하게 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어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보다 5년 뒤, 10년 뒤가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우리 당대보다 우리의 자녀들이 더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이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반전의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붙잡는 확신이 임하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내 인생에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그런 기대감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 은혜는 ‘사명 회복의 은혜’입니다. 4:14-15 합독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룻에게 이런 회복의 은혜를 주셨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사람 다음에 이어서 말씀을 보세요. 16절입니다.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이 아이를 낳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오미는 아이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기쁨이 회복되면서 바로 사명으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15절만 누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16절의 사명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룻기가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룻기는 사사기와 한 세트로 읽어야 합니다. 사사기 마지막 말씀을 보십시오. 삿21:25(화면)
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룻기의 마지막은 사사기의 이 문제 제기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4:22(화면)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왕이 없어서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에 룻을 통하여 다윗 왕의 혈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해답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아이를 잘 키우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은혜받아 반전의 역사를 경험한 룻과 나오미에게 주어진 사명이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제일 많이 하고 이 지역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는 것만이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보내주신 내 자녀를 잘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한 사명이고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유아유치부 어린이부 청소년부를 영적으로, 또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강영우 박사님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이미지) 이분은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까지 오른 분이십니다. 이분의 아들 강진영 박사님도 오바마 정부의 입법 관계 특별보좌관으로 지내셨다고 하는데요. 대단한 아버지에 대단한 아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있게끔 뒤에서 헌신한 분은 다름 아닌 아내이자, 어머니셨던 석은옥 여사님이십니다. 예전에는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이 참 많은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은옥 여사님은 당시에는 무명의 한 인물에 불과한 강박사님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습니다.
남편을 독려해서 미국 유학을 하도록 했고요. 헌신적으로 그의 공부를 도왔습니다. 강박사님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남편의 박사학위 70%는 아내의 몫이라고 합니다. 강의를 전부 녹음하고 점자로 옮겨주고 책을 읽어주는 등 아내의 역할이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학위를 받은 후에도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그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둘을 낳고 네 식구가 길거리로 내몰릴 정도로 경제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박사님이 얼마나 실의에 빠졌겠습니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자책감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그를 지탱해주고 지지해서 일으킨 사람이 바로 아내 석은옥 여사였습니다.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의 빛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까? 정말 대단한 사명 아닙니까?
제가 초보 담임목사이다 보니 간혹 저에게 좋은 충고의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교단 소속 목사는 노회원으로서 이런저런 활동도 하고 교제도 해야 한다는 모두 좋은 말씀들입니다. 물론 그분들 말씀이 옳지만, 저는 제게 맡겨진 하름교회를 담임목사로서 잘 섬기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아니어도 노회나 총회는 얼마든지 섬길 분들이 많지만,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정작 섬기는 자기 교회는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담임 목회자들이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교회를 살려내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 곧 노회를 살리고 총회를 살리는 일이고 한국 교회를 살리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비장한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를 잘 길러야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내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하여 일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나오미가 그 아이의 양육자가 되었다는 16절의 말씀을 보면서 인생은 두 종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하나는 생존을 위해 사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만일 룻과 나오미가 2장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그냥 생존을 위해 사는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룻기 2장의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마치 엘리야가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을 본 것처럼 그분의 작은 역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일할 만한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무덤에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의식하고 그 사명을 이루어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을 출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는 되는 멋진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는 ‘한 사람 철학의 은혜’입니다.
룻과 나오미에게 주어진 대반전의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 두 여인에게 하나님의 손길은 유일하게 버티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기를 읽을 때 “엘리멜렉이 저지른 잘못을 범하면 안 되겠다, 룻과 나오미가 회복을 위해 애쓴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라고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도덕책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룻기에는 엘리멜렉도 나오고 룻도 나오고 나오미도 나오지만, 룻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엘레멜렉의 실패를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룻과 나오미를 건져내시고 그들을 통하여 끝내 다윗의 계보를 잇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룻기를 보면 한 사람의 회복에 집중하시는 ‘한 사람 철학’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함께 읽어야 할 사사기와 비교해보면, 사사기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다루고 있는 반면, 룻기는 보잘것없는 한 가정과 한 개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사기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삼손과 기드온처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거목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룻기에서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사기에는 놀라운 이적들이 많지만, 룻기에는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데요. 여러분, 이런 점들을 비교하면서 발견하는 은혜가 있더라고요. 하나님은 사사기에서처럼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 역사에도 관심을 두고 일하시지만, 작은 한 여인의 눈물도 외면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실패한 한 인생에게 다가가셔서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막 느껴지시지 않나요?
제가 종종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 목회에 가장 영향을 준 분은 옥한흠 목사님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선교단체에서 유행하던 제자훈련을 기성 교회에 적용해서 제자훈련 목회와 탁월한 설교로 큰 대형교회를 이루신 분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목사님은 늘 한 사람 목회 철학을 갖고 계셨습니다. 만 명을 목회하더라도 한 명 목회하듯이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작은 예수와 같은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룬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서 생전에 후배 목사들에게 늘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가 “작은 자를 주목하는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옥한흠 목사님을 닮고 싶은 부분은요. 사사기처럼 큰 대형교회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아닌, 룻기의 한 작은 여인에게 집중하는 한 사람 철학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름교회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분이 계시면, 한 사람 철학이라고 대답해 주세요. 우리 하름교회가 빵이 돌아온 베들레헴과 같은 풍성한 빵집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작은 자를 주목하는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룻기 1:14(화면)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러분, 나오미의 두 며느리 중 오르바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는데, 룻은 왜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을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오르바의 판단이 옳게 보이지 않습니까? 모압 여자인 오르바가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갔다면 그녀는 모압 사람에 대한 편견과 수모를 다 겪어내야 했을 것입니다. 생계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룻이 나오미를 붙좇았던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장래에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게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을 때문에 나오미를 붙좇았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한 사람 철학입니다.
신학교 시절 한 교수님에게 들었던 말씀이 언제나 제 마음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만약 하나님이 오늘 심 훈이라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면, 그분은 기꺼이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의 자리로 가실 것이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구원 역사를 위해서도 일하시지만 나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저같이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씀이 있거든요. 사60:22(화면)
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한 명을 마치 천 명을 보는 것같이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누군가에게 돌려주고자 몸부림칠 때 이 말씀이 실체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작은 자 한 명이 천 명의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 하나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나 영혼에 낙심이 온 분들이 아무런 부담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교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등을 두드려줄 수 있는 교회, 마음이 상한 성도 한 명을 외면하지 않고 그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러분, 옆에 있는 분들 보시고 이렇게 선포해 주세요. “한 영혼이 귀합니다. 한 사람을 주목합시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왜 상처 있는 사람이 없겠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많은 것을 주목하시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영혼을 주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바로 그런 한 사람 철학을 가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면에 있는 요엘서 2장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얼어붙은 겨울내내 생기 없이 죽어 있던 생명들이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생명을 회복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없이 죽어야 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 바로 하나님의 음성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저런 실수와 판단 착오로 살아온 인생이셨습니까? 혹은 궤도 이탈을 하며 혼탁한 상황으로 빠진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겨울철 죽은 것 같은 나무가 봄에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은혜의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헤세드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붙드시고 결코 놓지 않으시는 세 가지의 은혜를 주시는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 이 찬양 함께 힘차게 불러보겠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찬양하나이다.” 가사를 생각하며 함께 찬양합니다.
❙결단찬양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합심기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도 나오미와 룻에게 주셨던 세 가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반전의 은혜, 사명 회복의 은혜, 한 사람 철학의 은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 오늘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연약하기만 한 우리의 인생을 전능자의 손길 아래에서 은혜로 수놓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낙심된 상황에서도 한 줄기 빛과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750배의 의지를 발휘해서 다시 일어서게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내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질 않았다고 믿으며 룻과 같은 대반전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쁨이 회복된 후에는 사명으로 연결되는 사명 회복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룻이 나오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의 회복에 집중하는 한 사람 철학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하름교회가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든든히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의 세 가지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길 다짐하는 우리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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