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9. 주일3부예배. 살아나고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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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7장
17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2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서론
서론
주제 설명 : 살아나고 살려내라
우리는 예배하며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교제하며 주님의 몸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우리는 선교하며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해갑니다.
청년부는 이 사이클이 끝없이 순환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예배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모든 것이 살아난다. 예배가 살아야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예배가 먼저다. 예배는 심장이고 엔진이다.
역대기 개관 -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따르는 흥망성쇠. 하나님을 잘 예배할 때 부흥하고, 하나님을 잘 예배하지 않을 때 쇠퇴하는 내용들.
역대기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페르시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남유다의 백성들이 1차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다. 당시 백성들을 이끌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를 따라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다. 이후 아닥사스다의 칙령에 따라 남아 있던 남유다의 백성들이 2차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다. 당시 백성들을 이끌었던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서 율법을 다시 회복하였다. 역대기는 이때쯤 기록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와중에 지난 과거를 살펴보았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의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또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도 없고 오히려 바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겪은 끔찍한 일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저자는 역대기를 기록함으로써 일차적 독자인 당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역사가 제시하는 근본 방향과 목적을 향하여 돌이키게 할 뿐아니라,그 역사의 의미에 따라 신실하게 살 것을 권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명심해야 할 내용이며, 세상 역사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말씀대로! 여호와의 말씀, 주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약 70번 반복해서 등장.
대상 11:3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여호사밧 시대상 - 남유다의 전성기 중 하나.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렸을 때. 30만 + 28만 + 24만 + 20만 + 18만 = 120만. 주변국들이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고 조공을 바치던 때. 매해의 조공.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는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리며 은으로 조공을 바쳤고 아라비아 사람들도 짐승 떼 곧 숫양 칠천칠백 마리와 숫염소 칠천칠백 마리를 드렸더라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하여 유다에 견고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유다 여러 성에 공사를 많이 하고 또 예루살렘에 크게 용맹스러운 군사를 두었으니
군사의 수효가 그들의 족속대로 이러하니라 유다에 속한 천부장 중에는 아드나가 으뜸이 되어 큰 용사 삼십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지휘관 여호하난이니 이십팔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시그리의 아들 아마시야니 그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자라 큰 용사 이십만 명을 거느렸고
베냐민에 속한 자 중에 큰 용사 엘리아다는 활과 방패를 잡은 자 이십만 명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여호사밧이라 싸움을 준비한 자 십팔만 명을 거느렸으니
이는 다 왕을 모시는 자요 이 외에 또 온 유다 견고한 성읍들에 왕이 군사를 두었더라
비결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여호사밧은 말씀대로를 실천하는 개혁을 일으켰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중 첫째로 예배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그가 예배의 회복을 위해 무슨 일을 하였는가? 우상숭배를 근절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예배를 세울 때 회복과 부흥이 일어난다.
본론
본론
우상숭배란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신상 앞에 절하는 고대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는 도시마다 선호하는 신이 있어서 신전을 짓고 신상을 숭배했다. 바울이 여행했던 도시마다 이런 신전들이 가득하였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전쟁의 신 아레스,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등 온갖 신이 광장과 신전마다 가득했다.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서 고대와 같은 신상들은 사라졌지만, 우리 현대 사회도 근본적으로는 고대 사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오늘날에도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나름의 제사장과 의식이 있다. 우리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절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여성이 외모와 몸매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절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이 돈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있지 않은가? 세월이 흘러 신전과 신상이 사라졌을 뿐 외모와 몸매, 돈과 성공 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우리가 탐하는 것을 주겠다 약속하는 우상들에게 코가 꿰어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똑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탐심의 문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우리 주변의 모든 매체들이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고 탐심에 이끌려 살아가도록 부추긴다. 사도 바울은 탐심이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꼬집어 말하였다. 즉, 우리가 탐하는 대상들은 신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돈은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돈에 마음을 빼앗기면 자유는 사라지고 숭배와 복종의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아무리 갈망해도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을 채워보고자 더 크고 더 많은 모험을 불사하다가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된다. 결국 망하고 나서야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하며 후회를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돈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탐심에 자극을 받으면 그것을 움켜쥐고자 이성을 잃고 옳은 길을 벗어나고야 만다. 돈, 권력, 성, 명예, 인기 등등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대상이라도 우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우상 공장이라서 그렇다.
아직도 우상숭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눈에 보이는 신상만이 떠오르는가? 그래서 우상숭배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거리가 먼 얘기로 들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시대가 변하며 우상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우상숭배는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면 우상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한다면 우상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무엇이든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힘도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가짜 신이다. 우상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 탐심에 빠지면 모든 열정과 에너지, 돈과 정서적인 자원 모두를 거기에 다 쏟을 수 있다. 가정과 자녀, 직업과 돈벌이, 성취와 평판, 체면과 지위같은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이성 관계, 안정적인 환경, 외모나 능력, 도덕과 가치관, 심지어는 교회의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조차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곧 우상이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가 있어질 거야.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안정감이 들 거야.’ 이렇듯 우리의 행복, 우리의 삶의 의미,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하나님보다 더 영향을 끼친다면 무엇이든 다 우상이다.
여호사밧의 유혹.
예배는 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예배의 자리에서 시험하셨다. 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너무나도 결정적인 시험이었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아브라함의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겠는가? 하나님도 그것을 분명히 아셨다.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냥 “네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시험을 주신 것인가?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애정과 사랑이 우상숭배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삶의 모든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었지만, 이제 이삭을 사랑하고 이삭을 잘되게 하는 것에 삶의 모든 의미와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시던 자리에 이삭이 앉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정적인 의문에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삭이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답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산으로 걸음을 옮겼을까?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나아간 것이다. 아브라함이 산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에 대한 시험임을 알았다. 이 시험이 끝나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경외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12절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려하셨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중심을 꿰뚫어 보셔서 아신다. 그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용광로에 넣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결국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굳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분명 세상 무엇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이는 우상숭배이며,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혹한 방식으로 시험하신 것이 오히려 자비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실 의향이 없다면 이삭과 함께하는 것이 멸망으로 걸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들 중에서 한아를 선택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한 그는 자신의 사랑이 우상숭배로 변해버렸음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0:3 (NKRV)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