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향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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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views1. 요나를 부르심 2. 다른 방향으로 감 3.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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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를 부르심
요나를 부르심
오늘 함께 나눌 요나의 말씀을 통해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돌아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쉬고)
혹시 요나의 이름의 뜻을 아는 분 계신가요?
요나의 뜻은 비둘기 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죠. 노아의 홍수 이후 물이 빠졌고 다시 땅을 딛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비둘기처럼, 요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없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평화를 전해야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나는 또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긍휼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의미하죠.
요나는 이름부터 해야 하는 그 일까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전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소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쉬고)
요나가 정말 그 이름과 하는 일에 맞춰 행동하며 살았나요? 아니죠. 우리가 아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세상에 전하지 않고, 말씀에 거역해서 도망을 치죠.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소명을 이루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로써 부적합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실 요나는 이렇게 게으름을 피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딱 한가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니느웨. 즉 앗수로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요나에게 말씀하셨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죠. 하지만 요나는 가지 않는 것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있어 니느웨는 상처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대하는 앗수르의 대도시 중 하나인 니느웨가 만약 40일 후에 무너진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요나가 생각했습니다. 생각만해도 상처가 되고 힘든 니느웨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죠.
언제든 앗수르가 무너지기를 바라던 요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혹시라도 가서 전하다가 귿르이 돌이켜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게 되면 니느웨는 살아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요나는 “처음부터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말씀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쉬고)
요나서는 굉장히 독특하고 이상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게 요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만을 쏟아내고 불평하고 순종하는 척하지만 제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위협당하는 풍랑 속에서도 이방인들은 끝까지 요나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니느웨 왕과 시민들은, 자신들 밑에 있는 저 나약한 나라의 이방 선지자의 말을 듣고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면서 회개합니다.
박넝쿨이 갑자기 자랐다가 벌레에 의해 사라집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요나서는 정말 기존의 성경들과 다르게, 기존의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내용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나서는 참 매력있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는 1-5절까지만 읽었지만, 저는 1장 전체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요나서 1장의 전반적인 내용. 중요 키워드는 삶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지어 곧 삶을 마감하고 죽게 될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난 프로 선원들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배가 파손될 위기”에 쳐해 있습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바다에 던져집니다. 죽음으로 끝이 날 것 같은 그 순간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켜" 물속으로 사라지죠.
다른 방향으로 감
다른 방향으로 감
비둘기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전혀 온유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가는 요나에게 1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성경에서 ‘임하니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와 이어지거나 혹은 앞으로 어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겠다. 라고 받아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갑작스럽게 니느웨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준비해두신 특별한 계획을 세워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임하셔서 ‘니느웨를 살려야겠으니 가서 전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신거죠.
하나님은 요나에게 3가지 동사를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이 3가지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알려줍니다. 이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죄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심판에 대해 경고하여 돌이키게 하라!”라는 다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마음이 담긴 동사들입니다.
니느웨는 요나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약 9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저는 인천에 오기 전에 부산에서 사역을 했었는데, 부산에서 인천까지 약 330km입니다. 부산에서 차를 갖고 올라오는데 비가 오기도 했지만 7시간 정도가 걸렸었습니다. 120km의 속력으로 쉬지 않고 330km를 7시간을 달려왔습니다.
요나에겐 자동차가 없습니다. 900km 떨어진 니느웨로 가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40일을 훌쩍 지나 도착할 것입니다. 도착하면 니느웨가 이미 망해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리를 모르셔서 요나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니느웨 가까이사는 다른 선지자에게 말씀하실 수 없었던 것일까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요나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쉬고)
요나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만 귀하고, 이스라엘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모든 나라들은 다 망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자민족 중심주의는 사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지냈을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살았는데, 그 집 근처에 주택 공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달이 지나도, 3개월이 지나도, 6개월이 지나도 10개월이 지나도 뭐 바뀌는게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멘트를 들고 나르고 그것을 잘 반죽하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공사가 정말 더뎠습니다.
그 때 저는 필리핀 사람들이 굉장히 게으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 공사 속도는 정말 말이 되지 않았거든요. 작은 2층집을 짓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서는 안된다 생각했거든요. 결국 제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집은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시간이 지나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은 정말 더운 나라라서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새벽 일찍과 저녁에만 공사를 할 수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속도가 더뎠는데 저는 ‘자민족 중심주의' 제 관점과 생각으로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죠.
요나는 니느웨만 무너지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힘이 쇠약해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니느웨는 정말 큰 도시였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다 죽어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만 행복하기를 바랬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이미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났어요. “니느웨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괴롭히니 저들은 지옥에 가야 한다"
(쉬고)
하나님은 이런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고 편협된 시야를 갖고 있는 요나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특정 민족.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리 없는 요나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니느웨는 요나가 살던 곳에서 900km 떨어져 있었다고 말씀 드렸죠. 다시스는 더 멀었습니다. 약 3,000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려면 굳이 3,000km나 되는 다시스로 가려고 일년 반동안 배를 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집에 들어가거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40일을 버텨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오히려 더 멀리 도망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혹여라도 가게 될까봐 아예 갈 수 없는 먼 곳으로 1년 반동안 배를 타고 도망을 가기로 합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것은 여호와 앞에 서있는 것을 포기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요나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람데오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을 가진 코람데오를 우리는 늘 생각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전부였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뒤를 돌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을 치며 적극적으로 말씀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방향으로의 도망을 선택한 요나 앞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나타나십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라고 시작하는데, 원래 히브리어 문장은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보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이라고 문장이 되어야 하는데, 동사가 아닌 하나님이 먼저 등장합니다. 이 것은 반역하고 도망가는 종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를 가르치기 위해, 더 성숙함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그를 따라가고 계심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며 그를 따라가셨는데 그 바람이 얼마나 강했는지 “배가 거의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람과 바다는 지금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나를 끝까지 따라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바람과 바다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의무와 소명이 있는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나요? 아니죠 그는 배 아래에 내려가 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자연과 배보다 못한 선택을 지금 선지자가. 비둘기라는 이름을 가진 요나가 하고 있는 것이죠.
(쉬고)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배 위에 있던 선원들과 사람들을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내적으로는 극도로 위기감을 느끼며,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 두려워합니다.
외적으로는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실려 있는 모든 것들을 바다로 내 던지는 행동을 보입니다.
(쉬고)
요나도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신에게 매달리며 바다로 물건들을 버리고 있을 때 요나는 배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자리에 눕습니다.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그냥 잠을 청합니다.
어쩌면 폭풍우에 죽어도 좋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죽으면 니느웨에 말씀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고 그들도 다 죽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 태풍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도 알고,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는 회개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배 밑바닥에 내려가 잠을 잡니다.
그는 계속해서 도망칩니다. 욥바로 내려갔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고, 풍랑을 보고 배 아래로 내려 가 잠을 잡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합니다.
(쉬고)
배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선장이 배 밑층에 내려간 후 기가 막힌 장면을 봅니다.
천하 태평하게 자고 있는 요나를 보았거든요. 그래서 선장이 한 마디 합니다. “여기에서 뭐하고 있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어!! 당장 올라가!!!” “당신의 신에게 살려달라 외쳐!!!!”
여러분 배 선장이 요나에게 “일어나! 가라! 외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임하셔서 하셨던 그 세 가지 동사가 지금 선장의 입을 통해 요나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가지 말고 일어나 올라가 외치라!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고 계신가요? 어느 자리에 서 계신가요?
풍랑이 몰아쳐서 배가 부서지기 직전이고, 요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요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숨거나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자리,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방향이 아니었다면 혹 내 삶에 여러 어려움과 난관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은 나에게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여러 모습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떠올리며 붙잡고 찾아달라고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요나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풍랑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선 이 상황은 절대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아무리 내 힘으로 그 일들을 해결하려 해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눈을 감고 침묵합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제비를 뽑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찾아보자"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제비뽑기가 진행됩니다.
우리가 아는 그런 제비뽑기와는 좀 다릅니다. 작은 돌맹이에 염색을 하여 한 쪽은 까맣게 한쪽은 밝은 색으로 만듭니다. 돌맹이를 뽑아서 어두운 색이 위로 나오면 ‘아니오' 밝은 색이 나오면 ‘예’라는 표시입니다. 요나는 어두운 색과 밝은 색 중 무엇을 뽑았을까요?
(쉬고)
요나가 뽑히자 사람들이 질문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그 질문에 요나는 두 가지 대답을 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며,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바다와 육지” “섬기다"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다와 육지"라는 이 원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섬기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정말 요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정말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맞을까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쉬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도중 바다가 점점 더 거세집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요나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풍랑을 잠재우려면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급하게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해결된다"라고까지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와 함께 살아보려고 합니다.
요나 참 무책임합니다.
상황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거나 혹은 이 사람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차라리 죽겠다. 내가 죽어야 니느웨도 죽는다라는 그런 마음들을 여전히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던지라"라고 말합니다. 본인이 직접 뛰어들지 않고 선원들에게 던지라고 말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실제론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거나 혹은 그만큼 하나님에게 가지 않겠노라는 의지를 보여주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요나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요나와 다르게 선원들은 “비록 그가 도망자라 할지라도, 하늘의 하나님의 선지자이기에 바다에 던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나를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떤 해결책도 통하지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잘 모르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달라"요청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다신주의자들이 여호와께 죄값을 묻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은 1장 14절이 유일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풍랑이 멈춥니다.
그 것을 보
고 사람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
(쉬고)
요나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바다에 던져질 때까지 자기 자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방향으로만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면하고 자신이 바라봤을 때 좋은 곳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요나의 모습이 사실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만 삶의 방향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죠. 매일의 삶을 살면서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하나님에게만 내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정신없이 만들어 하나님을 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배 밑까지 내려가 숨었습니다.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쉬고)
그래도 저는 여러분들이 요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천국가면 요나 할아버지에게 저 혼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저는 여러분들이 요나보다 훨씬 더 낫다 생각합니다.
방향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피해 세상에서 더 마음을 쏟고 살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예배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해보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기도하며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는 분들이 여러분들이기에, 저는 요나보다 훨씬 더 낫다 생각합니다.
(쉬고)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이번 한주를 살아가면 우리의 삶에는 또 다양한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도록 만드는 사건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길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느낄 수도 있고,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잘 걸어가고 있다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혹 그런 마음과 생각이 들어 낙심이 되신다면 “오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요나를 찾아가셨던 하나님"을 떠올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신 부르신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용서, 은혜 소망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내시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원히 붙어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쉬고)
이번 한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감사를 고백하는 저와 모든 제2가족 되기를 소망하쳐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