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 서로를 경계하는 세상. 원자화. 개인주의. 스마트폰의 영향.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꺼려함. 거짓. 선동. 가짜뉴스. 괴담. 사람들끼리 분열을 조장하는 중심에는 거짓이 있음. 거짓이 난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전적인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인간의 가장 큰 유혹은 발전. 이러한 현실은 우리를 현실주의자로 만듦.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함. 발전하기 위해서는 착취도 가능한 현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음. 성경은 사랑을 안하면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 솔직히 우리 중 사랑을 하며 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교회에서는 서로 축복하며 사랑한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이런 인사 하기 어색하다', ‘빨리 벗어나고싶다', 이런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사랑은 인간에게 어색한 것이고 맞지 않는 것임.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물론 비신자들 중에서도 진솔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랑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즉 정말 남을 위하여 사랑하는 경우는 드묾. 우리에게 문제는 남을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에 정말로 남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임. 하나님의 희한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갖게 된다는 역설. 사도들이 경험한 것. 예수님을 갖는 방법은 그가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 화목제물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것이 본질. 즉 사랑. 하나님이 원래 세상을 사랑하는데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음. 이것이 죄와 현실. 그러나 화목제물의 목적은 단순히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임. 그가 단순히 사도들을 위해서만 화목제물 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건이 이를 증거함. 죄 없음은 곧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가 죽으심은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함.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갖는다는 역설적인 명제는 세상에게 이미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뉨. 세상의 현실은 택자와 불택자가 아니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뉜다는 것. 그러므로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아는 자는 그의 계명을 간직하는 사람. 아는 사람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 아는 자들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책무. 그러나 그렇게 못사는 것 같다고 정죄가 아님. 왜?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이 advocate가 되어주시기 때문. 그러므로 이 책무를 다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님. 실패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 그러므로 실천을 안할 이유가 없는 것임.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변호자가 되어주신다는 것. 말할 수 없는 탄식. 이것은 불변함을 상징. 사랑은 불변함. 사람은 발전되려고 하고 변화(진화)하려고 함. 그러므로 사랑이 될 수 없음. 변하기 때문. 사랑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 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혼탁함.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도록 하심.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아는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을 아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확신.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게 되면 내게 믿음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 원리의 비밀은 2절에 있다.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하여도 대언자 예수께서 변함없이 존재하시기에 지속적 행동이 가능하다. 존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매이셨다는 것이다. 우리와의 관계에 매이셨다. 언약에 묶이셨다. 그 증거가 2절 화목제물이다. 죽음이다. 이 때문에 지속적인 행동이 가능하다. 보증이 있기 때문. 행동 안할 이유가 없음. 행동을 안한다면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 밖에 말이 되지 않음. 이것이 신자의 불변성이다. 이것이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요한이 말하는 계명은 일반적으로 새 계명인 ‘사랑'이다. 사랑을 해야 사랑의 실패를 겪는다. 그래야 대언자 예수를 경험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건 많이 경험함. 아내가 유튜브로 어떤 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부부가 서로 웬수처럼 느낀다면 사랑하는 거라고 했다. 사랑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나는 나름 로맨티스트고 이상주의자라서 “그래도 우리는 나이 먹어도 서로 웬수라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좀 슬프다.” 이러니까 아내가 “여보,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할말이 없었다. 만약 행복하기만 하면 어떻겠나? 예수님이 필요 없다. 사랑을 실천한 결과가 결혼인데 이후에 녹록치 않음을 경험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언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에 매여있으니 지속적인 실천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내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 이것이 불변성이다. 이 상태에서 발전적이거나 변화될 수 있을까? 그럼 이상해진다. 여자가 남자처럼 되면 발전적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남남 여여 부부를 본다. 또는 혼자 애 낳는다. 툭 하면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세상에 매여있는 것? 그래서 힘든 것? 이것을 느낀다면 예수님이 대언자 되어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매임을 다르게 해석하라는 것. 그것은 마치 부부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로 매여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결혼시켜야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매이셨다. 그 상징이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예수를 가진 자로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 앞에서는 뻘짓을 못하지. 선생님 앞에서도 장난치지 못하지. 그 이뉴는 부모님, 선생님이라는 인격자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언자이신 예수님을 알면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실패하면 예수님이 책임지신다. 이것이 2절에 나오는 ‘아버지 앞에서'라는 것.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자. 아이가 넘어졌으면 아버지는 안일으키나? 아이가 거짓말했으면 아버지는 그 아이를 버리나? 훈계하고 다시 안아준다. 세상과 하나님을 결혼시키는 것, 예수님의 사명이자 우리의 사명. 그 방법은 사랑을 행하는 것. 사랑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 이걸 어떻게 아냐면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음.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으시고 생명까지 포기하심. 없어지셨음. 그러나 부활하심. 세상이 혼탁해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기를. 혼탁하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미혹하는 자를 안아주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공격하는 자와 손잡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비된 마음을 갖는 것. 여러분은 청소년이지만 아비된 마음 가능하다. 교리가 완벽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사랑해야 예수님을 안다. 사랑해야 교리를 알게 된다. 여러분 가족과 친구부터 사랑하라.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사랑하라. 그럼 무조건 실패하는데 예수님이 책임지신다. 우리 축복할 때 서로를 향해 손 내미는 것도 어색하지 않는가. 그것도 일종의 실패다.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러나 계속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축복하면서 어색해하는 과정이 귀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축복하는 마음의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서로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