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

요한서신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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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 서로를 경계하는 세상. 원자화. 개인주의. 스마트폰의 영향.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꺼려함. 거짓. 선동. 가짜뉴스. 괴담. 사람들끼리 분열을 조장하는 중심에는 거짓이 있음. 거짓이 난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전적인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인간의 가장 큰 유혹은 발전. ‌이러한 현실은 우리를 현실주의자로 만듦.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함. 발전하기 위해서는 착취도 가능한 현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음. 성경은 사랑을 안하면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 솔직히 우리 중 사랑을 하며 산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교회에서는 서로 축복하며 사랑한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이런 인사 하기 어색하다', ‘빨리 벗어나고싶다', 이런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사랑은 인간에게 어색한 것이고 맞지 않는 것임.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물론 비신자들 중에서도 진솔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랑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즉 정말 남을 위하여 사랑하는 경우는 드묾. 우리에게 문제는 남을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에 정말로 남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임. 하나님의 희한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갖게 된다는 역설. 사도들이 경험한 것. 예수님을 갖는 방법은 그가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 화목제물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것이 본질. 즉 사랑. 하나님이 원래 세상을 사랑하는데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음. 이것이 죄와 현실. 그러나 화목제물의 목적은 단순히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임. 그가 단순히 사도들을 위해서만 화목제물 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건이 이를 증거함. 죄 없음은 곧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가 죽으심은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함.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갖는다는 역설적인 명제는 세상에게 이미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뉨. 세상의 현실은 택자와 불택자가 아니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뉜다는 것. 그러므로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아는 자는 그의 계명을 간직하는 사람. 아는 사람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 아는 자들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책무. 그러나 그렇게 못사는 것 같다고 정죄가 아님. 왜?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이 advocate가 되어주시기 때문. 그러므로 이 책무를 다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님. 실패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 그러므로 실천을 안할 이유가 없는 것임.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변호자가 되어주신다는 것. 말할 수 없는 탄식. 이것은 불변함을 상징. 사랑은 불변함. 사람은 발전되려고 하고 변화(진화)하려고 함. 그러므로 사랑이 될 수 없음. 변하기 때문. 사랑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 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혼탁함.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도록 하심.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아는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을 아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확신.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게 되면 내게 믿음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 원리의 비밀은 2절에 있다.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하여도 대언자 예수께서 변함없이 존재하시기에 지속적 행동이 가능하다. 존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매이셨다는 것이다. 우리와의 관계에 매이셨다. 언약에 묶이셨다. 그 증거가 2절 화목제물이다. 죽음이다. 이 때문에 지속적인 행동이 가능하다. 보증이 있기 때문. 행동 안할 이유가 없음. 행동을 안한다면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 밖에 말이 되지 않음. ‌ 이것이 신자의 불변성이다. 이것이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요한이 말하는 계명은 일반적으로 새 계명인 ‘사랑'이다. 사랑을 해야 사랑의 실패를 겪는다. 그래야 대언자 예수를 경험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건 많이 경험함. ‌ 아내가 유튜브로 어떤 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부부가 서로 웬수처럼 느낀다면 사랑하는 거라고 했다. 사랑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나는 나름 로맨티스트고 이상주의자라서 “그래도 우리는 나이 먹어도 서로 웬수라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좀 슬프다.” 이러니까 아내가 “여보,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할말이 없었다. 만약 행복하기만 하면 어떻겠나? 예수님이 필요 없다. 사랑을 실천한 결과가 결혼인데 이후에 녹록치 않음을 경험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언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에 매여있으니 지속적인 실천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내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 이것이 불변성이다. 이 상태에서 발전적이거나 변화될 수 있을까? 그럼 이상해진다. 여자가 남자처럼 되면 발전적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남남 여여 부부를 본다. 또는 혼자 애 낳는다. 툭 하면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세상에 매여있는 것? 그래서 힘든 것? 이것을 느낀다면 예수님이 대언자 되어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매임을 다르게 해석하라는 것. 그것은 마치 부부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로 매여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결혼시켜야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매이셨다. 그 상징이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예수를 가진 자로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 앞에서는 뻘짓을 못하지. 선생님 앞에서도 장난치지 못하지. 그 이뉴는 부모님, 선생님이라는 인격자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언자이신 예수님을 알면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실패하면 예수님이 책임지신다. 이것이 2절에 나오는 ‘아버지 앞에서'라는 것.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자. 아이가 넘어졌으면 아버지는 안일으키나? 아이가 거짓말했으면 아버지는 그 아이를 버리나? 훈계하고 다시 안아준다. 세상과 하나님을 결혼시키는 것, 예수님의 사명이자 우리의 사명. 그 방법은 사랑을 행하는 것. 사랑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 이걸 어떻게 아냐면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음.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으시고 생명까지 포기하심. 없어지셨음. 그러나 부활하심. 세상이 혼탁해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기를. 혼탁하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미혹하는 자를 안아주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공격하는 자와 손잡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비된 마음을 갖는 것. 여러분은 청소년이지만 아비된 마음 가능하다. 교리가 완벽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사랑해야 예수님을 안다. 사랑해야 교리를 알게 된다. 여러분 가족과 친구부터 사랑하라.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사랑하라. 그럼 무조건 실패하는데 예수님이 책임지신다. 우리 축복할 때 서로를 향해 손 내미는 것도 어색하지 않는가. 그것도 일종의 실패다.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그러나 계속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축복하면서 어색해하는 과정이 귀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축복하는 마음의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서로가 되길.

Notes
Transcript
본문: 요일 2:1-6
제목: Just Do It!
주제: 혼탁한 세상에서 미혹당하지 않는 방법은 불변하는 사랑이다.
목적: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을 사랑함으로 믿음의 확신이 생기게 하소서.
평형깨기
우리나라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용어가 있는데, ‘가짜뉴스’입니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는 괴담, 선동 등이 있죠. 이런 용어들이 관심을 받고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거짓으로 혼탁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서로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현상의 중심에는 바로 이 거짓, 괴담, 선동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이 난무하는 큰 이유는 자신이 인류에게 발전적인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 본문 요한일서의 배경입니다.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큰 특징은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 발전된 가르침을 자신들이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엇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에서 듣는 가르침 전체가 발전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익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경적 가치관을 벗어나는 주장은 모두 사회를 혼탁하게 하며 교회의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전’, ‘진보’는 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표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갈등심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겪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교회가 위협받고 있는 이러한 현실이 우리를 현실주의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살아야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인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하는 자이고, 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여러분,솔직히 우리 중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럴 때마다 우린 거짓말쟁이이며, 진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분열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단들 보세요. 그들은 대부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요한일서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극복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희한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무엇이냐면, “죄를 지을 때 예수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 읽어볼까요?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있죠. 하지만 곧바로 “만일 죄를 범하여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만약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변호인이 계시는데 그분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겁니다. 어떤 변호인이냐면, 롬 8:2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을 설득시키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말이 안 된다고 느껴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죄를 안 짓고 신실하게 살면 예수님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변호하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변호하셨냐면, 2절입니다.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란, 구약의 제물의 형태 중 하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 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끊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용서의 목적은 단순히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라고 하는 것이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 사랑이 회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죄와 거짓으로 가득한 온 세상을 변호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 미뤄지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죄와 연약함과 아픔과 눈물도 함께 하시고 심지어 거짓말쟁이로 몰려서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김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이 고통스러운 사랑이 우리 죄를 해결하시면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회복하신 겁니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사랑을 보여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랑의 관계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핵심입니다. 3절입니다.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계명은 ‘사랑’을 뜻합니다. 동일한 저자가 쓴 요 13:34에서 새 계명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명령을 요약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준수하면, 내가 예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믿음의 확신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순서를 잘 보세요.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면 내게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고 확신을 가지려면, Just Do It! 먼저 행동부터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게 용기가 있든 없든, 믿음이 부족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죠.
보세요. 죄악 만연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쉽나요? 여러분, 옆에 친구 얼굴을 한 번 쳐다보세요. 사랑할 수 있겠어요? 무조건 실패합니다.
그런데 1절에 따르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오히려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이 변호인이 되어주시기 때문이죠. “아버지 하나님, OO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려다가 힘들어서 잠시 넘어진 겁니다. 이해하시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변호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성화된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우리가 죄를 짓고 실패하면서 예수님이 책임져 주시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책임져 주시니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건 마치 고도 1,000m에서 낙하산이 있는데 뛰어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안 뛰어내리면 멍청한 것이죠. 낙하산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뛰어내렸겠죠. 자기가 무서워서 뛰어내리지 않았으면서 낙하산이 부실해 보여서 못뛰어내린 것이라는 둥 낙하산 탓을 하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뛰어내려 봐야 낙하산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Just Do It! 사랑을 실천하세요. 자신의 용기나 믿음이 아니라, 낙하산이신 예수님을 믿고 계명을 실천하라, 사랑하라는 것이죠.
실수할까봐 말씀을 안지키나요? 망신 당할까봐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죄를 화목제물로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확신을 얻고 싶으면, 용기가 없어도, 믿음이 부족해도, 실수를 경험해도, 괜찮으니 Just Do It! 그저 사랑하면 됩니다.
복음선포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려고 해야 실패를 겪습니다. 형제를 사랑을 하려고 시도를 해야 사랑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변호자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경험하는 거예요.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내 믿음이 연약해서 실패와 절망, 심지어 죄를 짓게 되더라도 예수님을 경험하고 믿음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만약 강한 믿음이 있어야 삶이 바뀌고 변화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는 이상, 답이 없는 겁니다. 내가 잘 믿지 못하는 책임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게 되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이미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내 믿음이 연약해도, 먼저 실천하면 낙하산이 펴지는 유익을 얻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확신이 생겨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 아내가 유튜브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부부가 서로 웬수처럼 느낀다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이 말을 듣고 저는 나름 이상주의자라서 “그래도 우리는 나이 먹어도 서로 웬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좀 슬프다.”이러니까 아내가 “여보,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라고 말해주더군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 말이 완전 맞기 때문이죠.
만약 행복하기만 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을 품기 때문에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보여주셨죠.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물론 행복하지만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혼에 매여있으니까 지속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죠. 저는 아내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고 아내도 제게 맞춰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면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죠. 이렇게 사랑의 불변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 상태에서 발전적이거나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혼란스러워집니다. 요즘은 여자가 남자처럼 되면 발전적이라고 합니다. 동성부부, 비혼임신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정말 실패와 고통이 수반되는 진정한 사랑을 지향한다면, 결혼제도를 바꾸려고 했을까요? 아니죠. 고통스럽지 않으려고 동성애 또는 비혼임신을 선택하는 것이죠. 그래서 참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해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다 변하고 진화하는데, 고통을 품는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이럴 때 어떤 사람들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걸 기적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랑만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세상에 매여 있습니까? 그래서 힘드십니까? 이것을 느낀다면 예수님이 변호인이 되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매임과 고통과 힘듦, 실패, 죄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맞춰주느라 힘들지만 관계가 발전하는 것처럼, 세상이 버거운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해 보세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변함없는 사랑을 세상에게 보여주면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전제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여러 정의가 나와있지만 오늘 본문과 동일한 요일 3: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한 마디로 형제를 위해서 죽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교회를 멸시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고,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툴툴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미혹하는 자를 안아주라는 겁니다. 여러분을 미워하는 친구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물론 교회를 공격하는 자와 손잡는 것은 불가하겠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이단이 위협적이죠. 그래서 교리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저도 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교리가 완벽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예수님을 압니다. 사랑을 시도라도 하면 실패해도 교리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부터 사랑해 보세요.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려고 시도라도 해보세요. 그럼, 무조건 실패할텐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책임지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축복할 때 서로를 향해 손 내미는 것도 어색하지 않나요? 이것도 일종의 실패예요. 진심을 담아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반은 농담이지만, 우리가 축복도 계속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불변하신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서로 축복하면서 어색해하는 과정도 귀한 것이죠. 그러다가 정말로 축복하는 마음이 생기가 그때 하나님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교회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랑함으로 교회를 지키고 여러분의 믿음의 확신과 신앙을 지켜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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