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9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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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주를 만나고

Acts 9:1–9 NKRV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우리는 언제 구원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생일을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여러분들의 생일이 정말 여러분들이 태어난 날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확신 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이 태어나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는가? 여러분들이 태어난 날은 부모님에게 들었고 우리는 그 부모의 말을 믿는 것이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언제 구원 받았는가?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떻게 단번에 구원을 확신 할 수 있겠는가?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때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구원을 맛 볼 수 있는 것이고 믿어지는 것이다. 내 의로 내 힘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닌 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오늘 본문에는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이 등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당시 바울이라는 존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기에는 다시말해 구원을 얻기에는 ‘절대 불가능' 한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에게 주님을 찾아오셨다. 그래서 바울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은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박해를 할 수 있겠는가? 바울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 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바울에게 처음 하신 예수님의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지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지금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예수님 자신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도와 교회에 대해 갖고 계신 정체성이다. 우리 모두는 작은예수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지체가 바로 예수님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모두는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작은 예수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에 치중하고, 내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에 치중한다. 물론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되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아니라 나를 지금도 이끄시는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주님이 받지 않으시면 그만인것이다. 아무리 많은 수가 모인다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헌금이 걷힌다 할지라도 그 안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고 나를 위한 열심만 있다 한다면 주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사용하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다할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왜 바울을 그때 거기에서 부르셨을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기 전에 부르셨다면 어땠을까?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표를 던지기 전에 그를 불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그 놀라운 뜻과 계획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그 때가 바울이 회심할 최고의 타이밍 이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당시 바울은 자신의 행동에 해한 확신에 차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 과 같이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 다시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였다. 그것에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구원 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까지 진출하려 했다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만큼 교회가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당시 바울은 자신의 의로 가득 차있었다. 주님은 그러한 바울의 의를 꺾으신 것이다. 바울을 수정과 보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바울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그 주님을 온전히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더나아가 그분의 뜻과 계획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일본 선교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 우리가 리셋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얻을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열심이 선교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열심과 상관없이 주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셨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옆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잠잠히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주님보다 앞서지도 말고 뒤쳐저 있지도 말고 그저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한발짝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다.
결과를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하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와 걱정을 가지지 말고 늘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그 충격에서 회복되지 전에,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이것이 그가 순종해야 할 많은 그리스도의 명령들 중 첫번째 이었다.
사울의 시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최악의 신성모독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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