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9_주일예배_삿7:4-8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Notes
Transcript
300의 의미
300의 의미
본문: 사사기 7:4-8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기드온의 3백 용사' 이야기로 알려진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힐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쟁을 치를 용사들을 모았는데, 그 수가 처음에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가 너무 많으면, 전쟁의 공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할까봐 그 인원을 줄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자발적으로,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군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들을 시험해보고 고를 테니 군사들을 물가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가에서 개처럼 혀로 물을 핥은 사람과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이들을 구별하게 하시고, 물을 개처럼 혀로 핥아먹는 사람들만 데리고 전쟁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수가 300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그 3백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과 싸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 본문을 인간의 눈으로 읽다보면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선 어떻게 겨우 300명으로 미디안의 대군을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듭니다. 8장 10절에 보면 미디안 군대의 전사가 12만명이고 살아 도망한 사람이 15,000명이라 했는데, 이 어마어마한 숫자에 대항해 겨우 300명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전쟁은 사람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의문꺼리를 갖습니다. 자발적으로 돌아간 22,000명은 겁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지만, 도대체 개처럼 혀로 물을 핥아먹은 사람과 점잖게 무릎을 꿇고 물을 떠먹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은 혀로 핥아먹은 사람만 골랐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은 논란을 거듭합니다. 본래 종교사와 인류학 연구 결과를 놓고 볼 때 동물과 같이 물을 마시는 것은 주의가 깊지 않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반면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뒤에서도 공격해 올 수 있는 적에 대해 대비하는 태도를 갖춘 주의 깊은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본문이 와전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다른 학자들은, 그게 아니라 개처럼 물을 핥아 마시는 사람은 용기 있고 과단성이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반면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은 소심한 사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아야 본문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나타나는 의문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판단이 옳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300명을 택했다는 사실이요, 그 전쟁을 하나님이 이끌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더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만으로도 10만이 넘는 적과 대적하여 승리하였다는 것입니다. 10만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아니 버금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체면유지는 할 정도라면, 아마도 본문에 나오는 32,000명 정도에 해당할까요? 그 정도 되어야만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에 상관없이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어도 의당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전쟁이 단순히 물리력의 대결, 군사적 대결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해냈다고 으스댈까봐 하나님께서 그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였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은 바꿔 말하면, 그 숫자에 상관없이 설령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야 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숫자의 대비를 대단히 과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과 유사한 사실을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도 발견합니다. 단 12척의 배로 수백 척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 해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 전투를 군사력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해명이 잘 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친 경우도 해당할 것입니다.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친 것은 군사적 차원의 승리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민심의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의 의미와 똑같은 동기를 지닌 본문들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우리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결국 멸망하고 만, 창세기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성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아브라함은 간절히 하나님께 청합니다. "이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50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50명만 있으면, 그 죄 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긴박한 줄다리기는 계속됩니다. '50에서 다섯을 뺀 숫자...'에서 다시 40명, 30명, 20명, 이윽고 '10명이라도...' 하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 열 명마저도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멸망에 이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우리는 똑같은 동기, 아니 오늘 말씀의 의미를 더욱 더 본질적으로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겨자씨 비유의 본질을, 작은 것이 엄청나게 커지고 확대된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춰 이해합니다. 그것도 잘못된 이해는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초점은, 그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가장 귀찮아 할 정도로, 그 작은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해 땅을 차지해나간다고 합니다.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그마한 분량의 누룩은 반죽해 놓은 밀가루의 성질을 아예 바꿔버립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바꾸기 위해 반죽한 밀가루만큼의 분량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작은 분량만으로도 충분히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이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것입니다만, 재미있는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20대 80의 법칙'(파레토의 법칙)입니다. '20대 80' 하면 부유한 20%와 가난한 80%의 사회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 마치 그 현실이 정당한 것처럼 용인한다든지, 또는 소수 엘리트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남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다윈이 진화론을 확립했을 때 사회적인 적자생존의 원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그렇게 남용된 것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현상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일정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상의 80%는 20%의 상품과 20%의 고객이 맡고, 범죄 건수의 80%는 20%의 범죄자가, 교통사고의 80%는 20%의 운전자가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면, 옷이나 카페트가 손상되었다고 할 때 20%가 손상된 경우이고, 자동차 엔진 연료의 80%는 낭비되고 20%만으로 가동시킨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일본 어느 섬의 원숭이 이야기입니다. 원래 그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씻어먹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떨어져 살고 있는 그 주변의 모든 원숭이들의 보편적인 행동양식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법칙이 사람의 행동양식에서도 나타난다고 하는 점입니다.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을 따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그것이 보편적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한복→양복 / 양복→생활한복).
이 법칙은 사람들의 동기유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의 행동양식의 변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에 매우 낙관적인 근거를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곧잘 쉽게 포기합니다. '에이 나 하나 바뀐다고 해서 뭐가 바뀌나...?' 하고 포기합니다. 또는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또 다른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바뀌는 것으로 이 사회가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해. 구조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야지...' 하면서 개인의 변화, 마음과 정신의 변화에는 효율적인 측면에서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그리고 방금 예를 든 법칙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재고하도록 요구합니다. '내가 바뀌면 다른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사람, 이어서 그 밖의 또 다른 사람이 바뀌면 어느 순간 모두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합니다.
저는 이 사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커다란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들뜨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많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일이 생각하는 대로 척척 된다면 인내가 필요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일은 항상 일정한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바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 일은 더더욱 더딘 법입니다. 교회는 효율적인 조직도 아니오, 기능적인 조직도 아닙니다. 물론 교회라고 다 더딘 것은 아닙니다. 금방 성장하고 금방 부흥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비결을 결코 선망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한 그 '비결'은 대개가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교회는 정도를 가야 합니다. 교회는 효율적인 기능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정성으로 마음을 쓰며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더딥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록 소수이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 정성으로 함께 했습니다.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들이 변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만 명의 군대를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300명을 요구했습니다. 10만 대 300입니다.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 믿음을 지킵시다. 그래서 이 교회가 정말로 이 사회에, 이 세계에 꼭 필요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