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매너리즘 극복하기(시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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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7월 9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영적 매너리즘 극복하기
본문 : 시편 23:1-6
결단 :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시선
# 설교 전 중보기도 제목
1) 예배를 위해서 : 주님의 말씀을 기뻐 받아 누리는 시간 되게 하소서
2) 기도모임을 위해서 : 12일 한 번 남은 기도모임을 통해, 수련회를 향한 하나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1. 매너리즘에 빠지다
1) 매너리즘에 빠진 내 영적 상태
요즘 여러분들의 삶은 어떤 삶이 신가요? 매일이 즐거우십니까? 아니면 똑같은 일상과 업무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진 채 살아가고 계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매너리즘에 빠진 지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 걸로 압니다.
그래서 매너리즘에 대해서 좀 찾아보니까, 그거 아십니까? 매너리즘이 긍정적인 단어였다는 걸 말입니다. 또 저는 이게 심리학 용어인 줄 알았는데, 보니까 미술에서 사용한 용어라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 단어를 누가 처음 사용했는가 보니까, 제가 방금 미술에서 사용한 용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처음 사용한 사람도 화가인 ‘첸니노 첸니니’ 라는 사람이 먼저 사용했다고 합니다. 매너리즘의 원어는 이태리어 ‘마니에라’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인데, 이 ‘마니에라’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첸니노 첸니니’ 라는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는가 보니까, ‘미술가들이 보고 따를만한 방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고, 이 뜻이 중립적이라면 중립적일 수 있지만,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내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매너리즘의 시초는 긍정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이 매너리즘의 해석은 결코 긍적적이지 않습니다. ‘틀에 박힌 방식이나 태도에 젖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이게 오늘 날 매너리즘을 향한 해석입니다. 이제 매너리즘은 미술을 넘어 우리 삶 속에서 들어와 쉽게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고,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침투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 반복되는 패턴 속에 무료함을 느끼고, 발전이 없어 정체됨을 느낄 때 "내 삶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 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렇게 또 물어볼까요? “여러분들의 영적 상태는 매너리즘에 빠져 계시지 않으십니까?” 어떠십니까? 내 영적인 상태가 날마다 더 뜨겁고, 매일 매일 주님을 찾는 것이 재밌고 기쁘십니까? 그런 삶 살고 계십니까?
2. 영적인 상태를 매너리즘으로 이끄는 요소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오늘 본문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허락된 장소가 나옵니다. 그곳이 어디냐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라는 곳이에요. 그곳에 거할 때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뜨거워지고, 매일 주님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는 자들의 행복을,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싫어할 자가 있지요. 바로 사탄이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지요. 그래서 이들이 방해를 합니다. 우리를 고난 가운데로 던져 놓는다는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매너리즘으로 이끄는 요소 두 가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라는 말이 세 개의 어두운 단어들로 조합된 것 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사망’과 ‘음침함’과 ‘골짜기’라는 좁고 어두운 단어들로 조합이 되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이 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찾아보니까요, 정말 가고싶은 장소는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같이 한 번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려볼까요? 먼저 큰 틀로써 계곡을 그려보세요. 그리고 햇빛이 차단된 아주 어두컴컴한 장소입니다. 그곳에 계곡 물이 졸졸졸 흐릅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아주 가파른 절벽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골바람에도 절벽에 놓인 자갈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려옵니다. 가끔은 아주 큰 바위도 떨어지기도 하는 곳이지요. 뿐만 아니라 아주 사나운 맹수들이 그곳에서 길 잃은 먹잇감을 시시콜콜 노리고 있어, 나무 틈 사이로 맹수들의 눈빛들이 비춰보여집니다.
어떻습니까? 상상만 해도 그곳에 가기도 싫고, 쳐다보는 것 조차 거부감이 드는 장소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날 꼭 그런 곳에 가야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매너리즘에 빠지는게 아닙니다. 각자 우리게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거예요.
가정 내에서 내 상황이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 같고, 직장에서 또 교우관계에서 그 상황이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에 놓인 것만 같다는 거에요.
고3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제 인생에서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저는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라 말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학내사태로 인하여서 학생 전원이 데모를 하는 상황이였지만, 저는 그건 핑계였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1년이라는 시간을 기도와 말씀 붙들고 살기보다 정말 열심히 볼을 찼습니다. 주일 저녁에 기숙사를 들어가 풋살을 했고, 월요일은 수업이 원래 없으니 풋살을 했고, 화요일은 모두가 모인 날이니 풋살을 하고, 수요일은 모든 축구 동아리가 볼차는 날이라 겸사겸사 축구를 하고, 목요일은 내일 집에 가기 아쉬워 풋살을 하고, 금요일은 주말 잘 보내보자는 의미로 아침에 간단하게 풋살을 했습니다.
그니까 어떤 말을 하고 싶냐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이 크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이 우리를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스멀스멀 인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정에서는 정말 별 것도 아닌, 티비 리모콘 소유 싸움이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또요, 평소 지나갈 수 있겠다 싶은 친구의 농담이, 내가 조금 기분이 좋지 못할 때 그 농담을 듣게 된다면, 그게 또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충분히 인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탄은 그렇게 우리를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내몰아요.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적 상태가 매너리즘에 빠지도록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거예요.
2) 원수의 목전
또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매너리즘으로 이끄는 두 번째 요소는 ‘원수의 목전’ 이에요.
목전, ‘지금, 당장, 곧’ 이라는 뜻으로, 원수의 목전은 ‘나를 괴롭히는 자가 곧 내 앞에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윗에게는 원수가 참 많았습니다. 우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의 가장 큰 원수 아니었겠습니까? 또 누가 있습니까? 사울과 사울을 추종하던 자들이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녀들이 다윗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으니, 자녀들 또한 원수가 된 것 아닙니까?
다윗의 원수들을 카테고리로 정리해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원수였고, 자국민도 원수였고 심지어는 가족들조차 다윗의 원수였다는 거예요. 그러니 다윗이 하루라도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었겠습니까? 사방이 적인데.
이게 지금 남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원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차고 넘쳐요. 보이는 원수들, 보이지 않는 원수들 각자의 삶에 결코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겁니다.
3. 영적 매너리즘 극복하기
1) 안내된 경로로만 걸어라
그러면 여러분.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에 놓인 우리가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건강한 신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매너리즘으로부터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한 사람이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너무 목숨 걸지 말아라. 당신이 맡고 있는 일에 100% 최선을 다하지 말아라. 둘째, 깊게 생각하지 마라. 그저 시키는 것 까지만 해라. 덜 하려고, 더 하려고 하지 마라. 셋째, 우선순위를 세우고 잔가지를 쳐라. 물론 그 우선순위는 나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가장 최고는 돈이다. 돈 되는 일을 해라. 금융치료가 가장 현실적이다.
공감은 되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방법인지는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방법과는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제시한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안내하신 경로로만 걸어가라는 겁니다.
여러분, 운전하시는 분들 네비게이션 정말 많이 쓰실 겁니다. 내가 향할 목적지를 검색하고 안내를 시작하면, 직진해라, 우회전해라, 좌회전해라 때로는 유턴해라 안내를 하지요. 그런데 직진하라는데 우회전을 합니다. 그럼 어떻게 안내합니까?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라고 안내합니다. 물론 이탈해도 다시 경로를 재탐색해서 안내해 줍니다. 하지만 도착 예정시간이 늘어나죠.
그럼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안내 받은대로 가는거에요. ‘이 샛길로 빠지면 더 빠르겠지?’, ‘저 우측길로 빠지면 더 빠를 것 같은데?’ 내 생각대로 운전하는게 아니라,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대로 가는게 가장 빠르다는 거에요.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가장 안전하게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방법은 내 생각대로, 내 판단대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거에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죠.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가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요.
그래서 우리 삶에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 끊김이 없어야 하는 훈련이 있어요. 뭡니까? 바로 말씀과 기도에요. 말씀과 기도가 끊기면 안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케 하시고,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힘들 때 말씀이 생각나게 하셔사 다시 일어나게 하시자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내 고통을 들어주시고, 내 간구를 받아주시고, 내게 지혜를 주시자나요.
우리의 삶에 말씀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장담합니다. 절대요. 절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아요.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안내를 따라 나아가야만 해요. 그게 곧 푸른 풀밭으로 가는 길이고, 쉴 만한 물가로 가는 길이거든요.
세상은 100% 하지 말아라. 최선을 다하지 말아라. 그런데 여러분. 말씀과 기도는 100%로 해야 해요. 말씀과 기도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이번 한 주, 정말 우리 100%로 하나님 앞에 절실해져 봅시다. ‘하나님, 그 음성을 내가 듣고, 목자의 지팡이가 인도하시는대로 제가 따르길 원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한 주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2) 과정에 낙담하지 말고 결말을 보며 기뻐하라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과정에 낙담하지 말고 결말을 보며 기뻐하라’는 겁니다.
4절을 볼까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분명 다윗이 처한 상황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였는데, 그런 그곳에서도 그는 낙담하지 않고 반드시 자기를 보호하시고 안위하실 하나님을 보며 인내하고 기뻐합니다.
5절도 볼까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저는 이 5절을 보면서, 하나님 폼 미쳤다 생각이 드는거에요. 왠지 아십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원수를 눈 앞에 두고 두려워 하거나, 신경을 곤두세우는게 아니라 하나님은 잔치를 여셨어요.
내가 처한 상황은 음침한 골짜기같고, 내 현실은 원수를 목전에 둔 것 같이 숨을 죄어 오는데, 정작 내 인생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너무 여유로우신 거예요. 나는 너무 너무 힘든데, 하나님이 너무 편하신거에요. 왜요?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선포하셨고, 우리의 삶을 통해 승리를 계획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어느 추운 겨울, 미국인 가정이 차를 타고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다 길을 잃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날은 어두워졌고 또 장소도 낯선 숲이기에 두려움이 커져갔다고 합니다. 설상가상 자동차의 기름도 떨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이대로 차 안에 있다간 얼어 죽겠다 싶어 아빠가 차에서 나와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미 두려움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시야는 좁아졌고, 그렇게 앞으로 걷고 또 걷다 끝내 추위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안타까운 이야기로 남음이 뭐냐면, 죽음 자체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지만 기다리다 지쳐 나온 엄마와 자녀는 조금만 눈을 들어 보니 옆으로 4km 떨어진 곳에 어느 한 오두막이 보여 걸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고난이라는 과정에 놓이면 그 고난만 봅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라도 어두컴컴한 숲 속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기보다 눈을 들어 불빛을 본 모녀처럼 ‘저 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춥고 어두움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늘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고난에 대한 고통과 기억이 훨씬 큰게 우리의 삶입니다. 또 우리는 그런 고난 속에 낙담하여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영적 고난 속에서도 낙담하고 자책과 원망과 비난하기보다 이미 승리를 허락하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두어 나아가는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시선]
#말씀을 가지고
1) 주님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
2)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한 주 보내게 하소서
#수련회를 위해서
3)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의 눈 열어 보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4) 그 날의 환경과 상황이 은혜로 나아감의 부족함 없는 나날들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어떤 상황에도 주님과 함께함에 그곳이 푸른 풀밭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주 발자취 따라 걷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성장과 회복 그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새생명 얻길 원하며 이번 수련회를 그러한 기쁨으로 참예하기로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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