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

예레미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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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깊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세상을 혼동과 공허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reset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온 창조기사가 담고 있듯이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재창조의 기반을 만들고,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질서를 일으시키셔서 새로운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Notes
Transcript
예레미야 4:19–31 (NKRV)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29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 답답한 마음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탄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슬프고 아프다"라는 한글 번역을 히브리어 문자 그대도 해석으로 보면 "내 창자여, 내 창자여"입니다. 이스라엘 온 땅이 탈취당하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이 재앙을 멈출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런 탄식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당할 끔찍한 징계를 미리 느끼면서 답답한 마음을 끌어 안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본문에 나타난 탄식의 내용들은 예레미야의 답답함 보다도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에 남유다의 왕이었던 요시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중단되었던 이스라엘의 절기와 성전 제사의식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개혁은 외형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을 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변한게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 보다도 더 답답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

아무리 절기가 회복되고, 제사의식이 회복 되어도 마음에서 부터 일어나는 근원적인 순종과 헌신 없이는 하나님을 떠난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겁니다. 묵은 땅 밭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려봐야 아무런 소산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과 외형적인 개혁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형식적인 종교개혁이 아닌 마음의 개혁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그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진정한 회개에 이르려면 육체의 가죽을 베어내는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서 굳은 것을 제거하는 마음의 할례가 필요했습니다. 외형적인 개혁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내적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경고 가운데서도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 무지(無知)가 죄(罪)

하지만 이스라엘의 현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명은 바로 무지(無知)입니다. 유다가 불행하게도 파멸을 당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2절). 유다 백성들이 진정한 회개, 마음의 개혁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無知)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알면' 그 사람의 인성과 생활 방식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정∙의! 지성, 감성, 의지에 영향을 주고, 그 삶에 침투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제대로 몰랐습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데는 능숙했습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징계와 심판의 이면에는 무지와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 다는 것은 죄입니다. 표현을 바꿔보면 죄는 깊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순결이 무엇인지, 또 공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안다면 감히 죄 짓는 생활을 계속 하지는 못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 여러분, 무지(無知)와 정욕(情慾)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적 무지는 욕망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무지(無知)는 욕망(慾望)의 모체가 됩니다. 그게 죄인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는 무지한 상태로, 악을 행하기에는 능숙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와 어리석음은 우리를 끝없는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갑니다. 그렇다고해서 죄인 줄 몰랐다는 변명이 우리를 변호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육체의 욕망이 성령을 거스른다"는 걸 알고 에베소서 4:22에서 "너희는 거짓된 욕망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성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4:22)고 했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답답한 선지자가 ‘언제까지 이런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답변은 한마디로 "그들이 나를 알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진정한 회개란 마음을 개혁하는 것,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우리 삶이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사는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파멸의 모습을 혼돈('토후')과 공허('보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마치 창 1장에서 창조 이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의도적으로 묘사합니다. 왜요? 이제 심판으로 이뤄지는 무질서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세우시고, 그 질서를 따를 백성을 세우시는 의도입니다.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않을 것이라"(27절)는 말씀을 통하여 그런 엄중한 심판 가운데서도 부분적으로는 보호를 받는 '남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들이며,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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