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기쁨이 아닌 통증을 느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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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쁨이 아닌 통증을 느끼십니다
[서론]
이 노래는 1990년대 중반 가장 유명한 힙합 노래중 하나였습니다.
저도 이 후렴구가 입에 붙어 대중가요처럼 흥얼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곡은 그 의미가 매우 깊습니다.
그 당시 흑인 빈민사회의 비정한 현실과 절망을 잘 표현한 곡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힙합은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뿌리를 갖고 탄생한 음악입니다.
이런 음악은 클래식에도 있습니다.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비제의’카르멘’,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와 같은 많은 오페라들이 모두 당시 사회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저항정신은 시에도 있고, 연극이나 영화, 코미디에도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나팔수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예레미야라는 예언서에도 다양한 장르가 등장합니다.
시, 내러티브, 노래 온갖 장르를 통해 온 몸으로 그 시대의 질서를 비판합니다.
사회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무감각해져서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통증을 자신들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통증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론]
예레미야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집중하는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은 망할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이 질문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에 의해 쓰여진게 아닙니다.
바룩이라는 서기관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 적은 것이죠.
그들은 유다가 멸망하자 모두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아마도 그때쯤에 예레미야서는 책으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멸망한 후 이 책을 읽게 될 백성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라가 멸망한후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포기할수 없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19절입니다.
예레미야야, 그들이 ‘무엇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모든 일을 하셨는가?’하고 너에게 물으면,
여기서 ‘이런 모든 일’이란 유다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망하고난 후에야 이 질문을 하게 될 것을 예상하신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왜 망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성전도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을 계속할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망할거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망한 후에야 백성들은 깨달았습니다.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들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 거짓 예언자들이었고, 예레미야만이 참 예언자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게 된 이후에 다시 예레미야의 예언들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가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 되었는가?’
제가 한국교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영국이나 독일같은 유럽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 아름다운 예배당을 자랑하던 교회들이 무슬림 사원, 술집,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수천, 수백년의 믿음과 전통을 자랑하던 유럽의 교회들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100여년이 좀 넘은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요?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세대, 미래세대의 감소 추세는 너무나 심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 위기의 원인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교회의 모습 때문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들보다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처럼 애통해하며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물든 교회들, 대형교회의 타락한 모습들, 성공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진 목회자들을 비판합니다.
기복주의에 빠져 세상의 복만 구하는 성도들의 모습도 비판합니다.
반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목사님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도 많이 하고 열정이 있어서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평양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기쁨을 느끼실까요?
아니면 통증을 느끼실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 유다 사회를 지배하던 두가지 질서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질서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입니다.
19절 후반부입니다.
‘너희가 너희 땅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남의 나라 땅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상의 노예가 되어버린 유다백성들을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의 노예가 되게 하십니다.
우상이 그렇게 좋으면 우상섬기는 나라에 가서 노예로 살라는 것입니다.
랩 가사처럼 하나님의 조롱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우상숭배 한가지로 압축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모든 죄악의 출발점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때 그들이 싸워야할 진짜 싸움은 가나안 민족들과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의 우상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십계명의 1,2계명에 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모든 죄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란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들이 앉았습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평안과 만족, 기쁨을 다른 것을 통해 얻는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죄는 거기서부터 자라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단 한번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긴 것입니다.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들은 우상에게 자신들의 자식까지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뒷방 늙은이처럼 대접하고, 원래 하나님이 계시던 자리에는 우상을 앉힌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도 바로 우상입니다.
칼빈의 말대로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과 같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찾던 골룸처럼 우상을 쫓아다닙니다.
하나님이 밀려난 마음의 자리에는 거짓 신들이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그것없이는 도저히 못살것 같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삶의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될수 있습니다.
음식, 섹스, 성취, 사랑, 심지어 가족도 우상이 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일수 없습니다.
수많은 우상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들을 섬깁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수 없는데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1순위인척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우상들이 1순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들을 깨뜨리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면 우상들은 자리를 비켜줘야만 합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우상들이 주는 거짓 평안과 거짓 만족과 거짓 기쁨에 저항하고 거부할수 있습니다.
둘째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유다의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거짓 예언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먼저 그들은 고도로 숙련된 종교 전문가 집단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왕과 나라를 위해 점을 치고 신비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미래를 예측할때도 있고, 꿈이나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Prophet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느냐 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엄청난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들은 평안을 말합니다.
12절입니다.
이 백성이 주님을 부인하며 말한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재앙도 우리를 덮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란이나 기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니 절대 망할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이나 기근같은 하나님의 저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누가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 분별할수 있을까요?
13-14절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야, 이러한 예언자들에게는 내가 아무런 예언도 준 일이 없다. 그들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였으니, 보아라, 내가 너의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겠다. 불이 장작을 모두 태울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예언이 실현되는지 아닌지 보면 됩니다.
진짜 이뤄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이뤄지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거짓 예언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은 허풍, 거짓말일 뿐입니다.
여기서 허풍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바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인 ‘성령’도 히브리어로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왔다가 사라지는‘바람’일뿐입니다.
이것 역시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랩의 언어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한 말들은 잘못된 자기확신, 자기세뇌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전통에서 나온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 믿고 싶어하는 말을 해줬을 뿐입니다.
그들은 고칠수 있는 약을 주지 않고 일시적 위로를 얻는 마약을 파는 자들입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불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불이 되어 온 백성을 장작처럼 태울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반드시 이뤄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15-17절은 예레미야의 말이 불이 되어 어떻게 백성들을 태울지 보여줍니다.
먼곳의 한 민족이 유다 백성들을 칠 것입니다.
그 민족은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처럼 유다를 침공하여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것입니다.
말도 알아들을수 없는 이방민족이 전쟁과 기근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양식도 가축들도 나무들도 모두 불타 사라질 것입니다.
유다가 그토록 의지하던 견고한 성읍도 무너져 불에 타고 말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은 거짓 우상과 거짓 예언자들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그 메시지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가 참예언자 거짓 예언자인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이뤄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이 선포되는 이 순간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누가 참 예언자라고 생각할까요?
두 부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망한 제사장 가문의 보잘것 없는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입니다.
반면, 다른 예언자들은 국가에서 공인한 숙련된 전문 예언자들입니다.
우리가 그 당시 백성들이라면 누구의 말을 믿고 싶습니까?
겨우 초라한 한 명의 예언자가 나라가 망할거라는데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안 망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듣고싶은 말, 믿고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따릅니다.
그럼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목회자 역시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정말 목회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우리 주위에도 거짓 예언자와 같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인양 포장해서 전합니다.
자기 생각을 전하기 위한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은 말씀만 전합니다.
공감과 위로, 격려의 말씀만 전합니다.
믿음만 강조합니다.
죄에 대한 책망은 어쩌다 한번 전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설교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진실을 마주할수 있게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은 영적 몽둥이가 되어 우리 삶의 실체를 볼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우상이 무엇인지, 우리를 이끄는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기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아, 너희는 저 언덕으로 올라가서 내 포도원을 망쳐 놓아라. 전멸시키지는 말고, 그 가지만 모두 잘라 버려라. 그것들은 이미 나 주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유다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완전히 물들어버린 유다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절대로 이길수 없는 강력한 적을 보내 유다를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 적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유다를 혼내주시기 위해 드신 하나님의 몽둥이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셔놓구선 멸망까지 하게 하신 것은 너무 하신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변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고칠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진실한 사람도 찾을수 없는 수준입니다.
완전히 죄악에 물들어버려서 다시 고쳐쓸 수준이 아닙니다.
집이 너무 망가져서 리모델링할 수준이 아니고 재건축을 해야만 하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도원에 있는 가지를 모두 잘라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매번 저질의 포도만 맺는 그 가지들을 잘라버리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무를 아에 뽑지는 않으셨습니다.
뿌리와 줄기는 남겨두십니다.
다시 살아날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부모의 매가 아무리 매서워도 그 매의 끝에는 긍휼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몽둥이도 그렇습니다.
18절에서도 하나님은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점은 이스라엘에게 아에 기회가 없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지금이라도 온전한 회개를 하면 그 심판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시는 이유도 그것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아직 조금의 시간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괴로워합니다.
바뀌지 않는 유다백성들과 마지막 기회라도 붙잡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도 어떨까요?
우리에게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통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망하길 바라는게 아닙니다.
너무 늦지 않게 지금이라도 돌이켜서 다시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혹시 유다백성들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해야 하는 이유도 이러한 세상질서에 저항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통증을 우리도 느끼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이 주는 우상들과 거짓 가르침에 중독된 우리에게 해독제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삶의 불이 되어 우리 안의 모든 우상들을 태우고 거짓 가르침을 드러낼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통증,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통증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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