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15 양청] 27-28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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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분의 태어나심과 그것도 낮은 여건으로 태어나신 것과, 율법 아래 사신 것과, 이생의 여러 비참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저주된 죽음을 겪으신 것과, 묻히신 것과,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입니다.
28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그리고 마지막날에 세상을 심펀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배우는 부분까지가 기독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배우는 마지막 내용이고, 다음주부터는 성령론 혹은 구원론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2번을 보라.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영광의 자리에 있었던 우리가 떨어진 것이 바로 타락이고, 그 결과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낮아지심의 상태로 내려오셨고, 그래서 우리의 낮아진 상태, 곧 죄의 비참함을 주님께서 해결하시고, 이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떤 영광을 누리게 될지를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승귀로 우리의 영광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생각해보자. 주님께서는 성육신, 율법 아래 사신 것, 이생의 비참함을 다 가지고 사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고, 묻히셨고, 음부의 권세 아래에 얼마간 계셨다. 그리고 높아지셨다는 것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장차 재림주로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빌2 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낮아지심 중에서도 먼저 성육신에 대해 생각해보자. 3번을 보라. 주님은 그냥 태어나신게 아니라 가장 낮은 여건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다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었다. 이러한 성자하나님께서 유한한 인성을 온전히 취하시고, 시공간의 제한 속으로 들어오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서 그분의 영광과 불변하심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심이라는 속성을 스스로 제한하신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는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 자유로우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심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책, 곧 죄의 댓가, 죄의 형벌, 죄의 오염 등,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죄가 이 세상에 가져오고, 죄가 인간 가운데 가져온 죄의 결과물들을 고스란히 다 겪으며 사셨다. 그것이 어떤 것들인가? 인간이 가지는 연약함이다. 또한 고난이나 괴로움, 그리고 죽음 등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성육신을 하시며 왕족의 화려한 여건에서 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상류층이나 부유층의 자제로 나시지 않았고, 그분이 왕족의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비천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나라만해도 약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것이 불과 60년 전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아버지였던 요셉이 왕의 계보를 가지긴 하지만 사실은 몰락한 가문이었고, 당시 목수라는 직업 자체가 매우 천한 직업이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나셨다는 것, 주님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셨다는 것은 이러한 비천한 삶의 수준들을 모두 이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4:15 를 찾아보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겪어본 아픔을 동일하게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수 있다. 누구보다 잘 위로해줄 수 있다. 내가 겪어봤으니까.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인생 가운데 겪을 수 있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천한 삶을 살아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해하지 못하는 인생은 있다? 없다?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율법 아래에 사셨다. 교재 4번이다. 본래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다. 율법의 수여자이다. 그럼에도 그분이 율법 아래로 오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갈4:4-5 를 찾아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율법 아래에 있든, 율법 위에 있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런데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이고, 율법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율법 아래에 오셨다는 것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주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주님이 율법 아래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을 예수님이 순종하며 사셨다는 것이다. 현대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율법 아래에 계셨다는 부분을 생략하고, 오직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만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최근 예장합동측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곧 성육신과 죽음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그분께서 자발적으로 율법 아래에 계셨음을 비성경적인 교리로 공포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이 땅을 사시면서 구약성경의 모든 율법을 완벽히 다 지키신 인류역사상 유일하신 분이셨음을 말씀한다. 예를 들어서 마5-8 까지를 산상보훈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난 수련회를 통해서도 간략히 생각해봤지만,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심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셨다. 주님은 이런 수준으로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런 수준으로 지키신 이유가 있다. 자신의 의를 얻기 위해 순종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이미 그 자체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주님이 왜 율법에 이렇게까지 순종하셨나? 타락한 우리에게 없는 의,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의를 순종을 통해 이루시기 위해, 그분께서 얻으셔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철저하게 복종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5번을 보라. 주님은 이생의 여러 비참을 겪으셨다. 아담의 범죄로 저주받은 세상을 경험하셨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 늘 인생 가운데 나를 넘어지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드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생들이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내 죄의 결과로 생겨나기도 한다. 내 잘못 때문에, 내 죄의 결과로. 그러나 굳이 내 죄 때문이 아니더라도, 타락의 결과로 이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모든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타락한 인생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주님께서도 이 땅을 살아가시며 이 부분을 동일하게 겪으셨다. 특별히 사53 장은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우리 주님께서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잘 아는대로, 주님은 조롱과 증오와 핍박과 배신과 피곤함과 배고픔, 고통, 고난 등을 다 겪으셨다.
그러면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낮아지심과 비참함을 겪으신 것일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하시기 전 30년 사셨던 삶 자체가 우리를 위해 낮아지시되 지극히 낮아지신 것이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만이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평범한 목수로서, 평범한 그 시대의 노동자로, 그것도 가장 가난했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셨다는 것이다. 그 시대 팔레스타인이 얼마나 가난했느냐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그냥 돌아가게 하면 다 실신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 시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루 1끼 먹는 경우도 극히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온 세상의 창조주되시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그들과 동일한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6번을 보라.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겪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주님께서 기도하신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땀이 핏방울 같이 떨어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 주시길 간구하셨단 부분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마르틴 루터는 인류 역사적으로 예수님만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였던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왜 이런 기도를 하셨는가?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얼마나 맹렬한지를 알고 계셨다. 단지 죽음 자체가 두려우셨던 것이 아니라, 모든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철저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저주를 친히 당하셔야만 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인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창2 의 말씀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이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 아담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알았을까? 그가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이 경험적 지식은 아니었겠지만. 저와 여러분들도 죽음을 경험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돌아가신 분들을 통해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죽음을 알지언정 우리가 죽음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의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지옥을 경험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죽음은 그 시간부터 예수님께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도 이러한 죽음에 대해 경험적으로 아셨던 것은 아니셨지만 그럼에도 하나 분명하게 아셨던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누리시던 그 무한한 영광, 그 무한한 거룩의 주께서, 이제 택한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공의로우신 성부하나님과 단절되시고, 죄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주님은 아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틴 루터는 주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의 뜻대로,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신다.
7번을 보라.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다.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겪으시고 이제는 십자가의 저주된 죽음을 당하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저주의 죽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율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나무 위에 달리셔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여러분 잘 아실 것이다. 마27:46 을 보라.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말씀을 펴두라.
평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성부 하나님을 뭐라고 칭하셨는지 아는가?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을텐데, 아람어로 “아바” 라는 말, 아버지를 지칭하는 친밀한 차원의 단어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실 때 성부하나님을 가리켜 아바 라고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유일하게 성부 하나님을 ‘아바’ 라고 부르시지 않은 때가 바로 방금 읽은 구절이다. “나의 하나님[데오스]” 이라고 부르신다.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어 십자가 위에 달리심으로 성부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죄인으로서 모든 진노를 자신의 몸에 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 아버지와 성자 아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넘치는 복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비참한 자리까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우리의 비참한 형편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명예를 잃어버리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 영광스러운 지위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절규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씀처럼 성부하나님께서는 나무 위에 달리신 성자하나님을 버리셨다. 버리셨다는 것이 어떻게 증명이 되었는가? 12시 대낮임에도 해가 빛을 잃어버렸다. 3시간동안.
8번을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성경은 묻히셨다, 장사지낸바 되셨다고 말한다. 이는 죽음의 확증을 표현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실제적으로 이뤄진 일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장례식을 하고, 관에 시신을 넣고, 그 관을 동굴에 묻고, 그 입구를 밀봉함으로서 이 죽음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가현설주의자들, 곧 예수님은 인성을 입은 것처럼 보이셨을 뿐이지 실제로는 신성으로 오셨다는 그들의 주장을 배격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쇼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영원 불멸의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셨다는 것,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교재 9번을 보라. 죽음의 권세 아래에 거하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신경의 원문을 보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다. 우리 번역본으로는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이어서 “음부에 내려가셨다” 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이 논란이 많아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표현을 뺐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아니라 지옥을 체험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무엇인가? 죄의 궁극적 결과이다. 죄책의 궁극적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함께 달린 강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너가 이틀하고 몇시간 뒤부터 나와 낙원에 있을거야" 라고 하셨나? 아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예수 믿는 자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몸은 비록 관에 눕게 되고 땅에 들어가게 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죽는 순간 바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리고 안식을 누리며 주님 재림의 날에 일어날 내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는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여러분들은 로마카톨릭의 연옥의 개념을 아실 것이다. 그들이 성경에 없는 연옥교리를 정당화 하기 위해 면죄부라는 개념도 만들어내고, 면죄부 교리를 정당화 하기 위해 계속 어떤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몇년 전에 우리나라 영화 “신과 함께” 가 엄청난 히트를 쳤다. 이 영화속의 개념들을 우리의 신앙 가운데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 살아생전에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3일동안 예를 들어서 나태지옥에 들어가서 고난 받으며 죄값을 치루고 다시 천국에 올라가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로마카톨릭적인 개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생략하게 된 것이긴 하는데.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잘못된 해석관으로 오해하는 학자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셨다" 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으실 때에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저주의 절정인 지옥을 주님이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한 것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의 의미이다. 영광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고백하는 바처럼 주님은 당신의 피로 하늘의 성소에서 이 제사를 완벽하게 끝내셨다.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셔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고백인가? 그래서 9번의 B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지옥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영광 가운데 즉시 들어가며 육신은 부활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주님의 비천에 대한 내용이다.
이어서 높아지심을 보자. 10번을 보면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한다. 이는 사도신경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A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부활의 몸은 영광스럽고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이라고 가르친다. B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죽음을 죽이셨다, 이 표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17세기 청교도 목사였던 존 오웬이 정리한 개념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으로서 죽음 자체를 죽이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사망이 사망선고를 받았다. 우리 옛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딜로 가야 하나? 호랑이 굴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죽이시기 위해서 죽음의 자리에 가셨다. 왜? 죽어야 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이 더이상 우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C를 보라.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보여준다. 지금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승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장차 저와 여러분이 누릴 지극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니 잘 알아야한다. 내가 누릴 것이니까.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이 끝이 아니었다. 요한도 보았고, 베드로도 보았고, 500여 형제들도 주님의 부활의 몸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도 요한이 다시 목격한다. 언제? 요한계시록에서. 승천하신 이후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다. 그때 요한은 어떻게 하는가?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그분 앞에 경배했다. 그런데 승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을 보자 그가 죽은 자와 같이 그 앞에 엎드려졌다고 한다.
그 영광의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앉아계신 보좌 오른쪽에 예수님의 상석이 마련되어서 거기 앉아계시다는 걸 말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영이신데 하나님께 우편이 어디있고 좌편이 어디있겠는가. 이는 하늘에서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방식이다. 성부하나님께 하늘과 온 우주에 대한 통치권을 받으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13번에, 부활승천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주,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것이다.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했다. 재림하신 주님으로부터 악인은 영벌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생의 심판을 받는다.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이 낮아지심을 다 겪으셨다. 주님이 겪으신 비천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이 받으신 높아지심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혜택을 다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왕, 제사장, 선지자)로써 친히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의 비천함을 그대로 겪으시고, 이제 그분의 높아지심으로 우리가 받을 영광이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내셨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부족함이 없다. 완벽하다.
이제 적용을 보자.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낮아짐과 비참을 겪지 않고 영광을 영원히 누릴 존재가 되었다. 영원히 이런 복락을 누릴 존재가 되었다. 비록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이생의 비참함,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을 우리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릴 영광은 이런 가시덤불과 엉겅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영광이다. 착각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 주님이 이생의 비참을 다 겪으셨으니 이제 우리는 병도 없고, 가난도 없고, 성공만 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잘못된 가르침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이라는 것은 천국가면 누리게 될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이 고난에 의해 사라지거나 증발하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살아가는 것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다" 라는 책을 우리 작은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다 읽어봤음 좋겠다. 예수믿는 삶에 대한 영광이 무언지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천과 승귀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여긴다. 종말처럼 여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별게 아니다. 죽음 그 자체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잠시 이별하는 것이니 아쉽고 슬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왜? 내가 주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모든 죽은 신자들이 영광의 부활로 살아날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죽음을 환영하는 자세로 살았다. 고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할 고난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시고, 또한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더 하나님의 백성 답게 빚어가신다고 한다. 따라서 고난 중에도 침착하게 당황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배운 그리스도의 비천과 승귀가 왜 중요한가?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두려워할 수 밖에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당했어야 할 온갖 비참과 저주와 죽음과 고난을 주님께서 친히 겪으심으로 내가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그리스도께서 버림받고 끊어지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장사되신 그리스도를 성부께서 다시 살리시고 영광 가운데 맞아주신 것처럼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도 이와 같다. 이 사실을 확신하며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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