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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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서론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술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술을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날은 미술시간이 되게 재미없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에 화장실을 갔었습니다.
화장실을 가니까, 반 친구 두명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친구들도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뭘 하고 있었느냐 하니까요. 그 당시에 학교 화장실 재공사를 한지 얼마되지 않았었는데 그 벽에 휴지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휴지를 물에 적셔서 이 벽에 던져서 붙이면서 장난을 치고 있던거죠.
저에게도 제안이 왔습니다. 자신들과 합류를 하겠느냐라는 것이죠.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겉보기에는 되게 장난을 많이 칠 것 같지만 태생이 겁쟁이라서 그런 용기는 없습니다.
저는 안한다고 말을 했는데, 한번만 해보라고해서, 제 기억으로는 엄지손톱만한 휴지를 던졌던ㄷ 것 같습니다.
결과는요. 선생님에게 불려가서 혼났습니다. 저는 제 안에 조금 억울한 마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결과는 결과인것이죠. 제가 잘못의 1%만 가지고 있더라도 잘못은 잘못이니까요. 함께 했다는 것에 있죠.
중학교 1학년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요. 자습시간에 친구들이 바깥에 종이 비행기를 적어도 100개는 날린 것 같아요. 저도 하나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떻죠? 저도 참여한 사람인것이죠.
이 두가지의 일이 저에게는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 준 의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제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도, 저의 작은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누구와 함께 있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사람은 결국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영향을 받게되죠.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때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수도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친구,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믿지 않는 자와 함께 가지 않는 거룩함에 이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배경은요. 바울과 고린도교회 관계를 망가트리는 거짓교사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 가운데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울과 일행들이 그들을 위한 참된 사역자이고,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관계를 막는 것 자들로부터 멀리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죠. 그것을 명령조로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여기서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은 문자적 의미로 다른 방향으로 멍에를 끌다라는 의미고, 이 단어는 잘못 짝을 이루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어있습니다.
레위기에도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요. 레위기에는 가축을 다른 졸유와 교미 시키거나,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거나, 두 재료로 옷을 직조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신명기에는 소와 나귀를 함께 묶어 밭을 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구약의 배경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을 거룩의 기본으로 여기는 거이죠.
그리고 이를 바울은 성도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은 불신자들과 교제하거나 함께 책임을 나눌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은 성도들이 사회적 활동이나 불신 이웃들과의 식탁 교제등을 통해,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비윤리적인 삶에 빠지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말씀 15절 16절을 보면요.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멍에를 함께 메지말라는 것. 그리고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을 중단하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성도들에게 도시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라, 그들과 모든 것들 함께하면 안된다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교도적인 윤리와 가치, 우상숭배로부터 분리시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나오는 5개의 질문들은 결국 삶의 체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의 체계이죠
성도가 살아가는 의로운 삶은 불법에 참여하지도, 삶을 불법과 나누지도 못합니다. 불신자와 함께 할 수 가 없습니다. 삶의 가치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공동의 이익추구도 없습니다.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사탄이 무엇에도 합의하여 같이 할 수 없는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16절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이야기하는데요. 이어서 그 성전이 건물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믿는 성도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 백성의 지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는요. 구별된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구별된 삶은요. 우상으로부터 멀리하고,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문화는 이교도적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 삶 가운데 바울은 구별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이야기하는데요. 18절에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인용구절 에스겔의 배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씻으시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상숭배적 관행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영저하여주셔서 자녀를 삼아주시는 약속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약속안에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처럼 우리 또한 과거에는 어둠속에서, 죄중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저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약속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에 근거하여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 결정해야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약속을 설명하며 결론을 내는데요 바로 7장 1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첫번째는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이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밖으로든, 안으로든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삶의 영역이죠.
그 가운데에 스스로를 정결케 하자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점점 더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결국 도덕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사람인 것이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기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운데 정결함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결케 하려는 거룩한 욕구가 형성되는 것이죠.
두번째는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루다라는 것은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하는 것은 두려워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두려워함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경외적 두려워함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죠.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그분을 슬프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염려하고 애쓰는 삶의 태도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 경외함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마음인 것이죠.
겨룩함은 우리의 마음의 타협을 버리는 것과 결부되어있습니다. 분리되어야 합니다.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고민해야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내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하는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장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삶을 흔들고 하나님을 떠나게하는 부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타협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두 약속안에 있는,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를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정체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동역자들과 함께 사랑과 화평의 관계속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분별해야합니다. 세상에서 살지 않아야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라는 말이압닙니다. 그러나 복음에 반대되는 상황으로 가는 교제가 삶속에서 계속된다면 피해야합니다.
죄로부터 멀어진 우리의 삶 가운데 지켜야할 것은 거룩함입니다. 구별된 삶이자,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늘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