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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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자의 고백
두 제자의 고백
지난 주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1.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증언하는 자였고 그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참 진리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도 그의 말이 참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믿었던 요한의 증언된 삶을 살폈습니다.
해당 본문은 크게 35-42절까지 요한의 두 제자에 관해서 43-51절까지 빌립과 나다나엘에 관해서 기록된 본문입니다.이를 위해서는 1장부터 어떤 구성으로 기록자 사도 요한이 글을 쓰고 있는지 염두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태초에 이렇게 시작한 시간에 대한 개념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시간을 표현하는 용어가 어디즘 있는지 혹시 보이시나요? 29절에 이튼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선 1-28절은 전날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는 느낌을 갖겠죠. 태초와 이튼날은 시간차가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니까 19절 즘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첫째날이 되는 거겠죠. 그럼 1-18절까지의 구성은 마치 동화책의 처음에 ‘옛날 옛적에’ once opon a time 같은 늬앙스를 받는 거죠.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말씀 드리는 중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에 나오나요 35절에 또 이튼날 / 43절에 또 이튼날 2장 1절에 사흘째 되던날 /// 사흘이면 며칠이죠. 요즘 아이들은 사흘하면 4니까. 4일로 이해를 하더라구요.
먼저 스토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과 두 사람이 함께 있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렇게 말하니까. 두 제자가 “예수를 따’릅니다. 어어서 예수께 따르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묵고 계신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그날 거기서 예수와 머물렀는데 함게 네시 즘이었다.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서 그 중한 사람이 안드레 인데, 형 시몬(베드로죠)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의미.(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에수께서 시몬에게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 아니냐(아신다) 앞으로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 라고 합니다.
첫번재.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길래 세례 요한을 따르던 두 제자는 예수를 따랐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듣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러면 요한 사도는 무엇을 의미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있습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80-90년 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이유가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의 모든 성전을 지금의 통곡의 벽이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하면… 이제 제사도 못드리는데 무슨 어린양이람… 왜냐하면 ‘죄를 지고 간다고 ‘ 요한이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은 제사보다 앞선 사건이 있습니다.
기억하실 수 있을까요? / 출애굽을 할 때 백성들이 모두 어린 양을 잡아 먹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출12:3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출12:5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출12:11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린양이시다. 하면 자연스럽게 종되어서 430년간 이집트에 종노릇하다가 모세가 나타나서 10가지 재앙을 보여주고 결국에는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어린 양을 잡아서 먹었다는 것고 이것을 절기를 삼아서 영원히 지키는 것이죠.//
요한복음에는 바로 유월절이 3번이 나오는 건데 그만큼 유월절과 연관이 있게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이시다. 그렇다면 지금 로마의 압제에서, 성전이 파괴되었고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 두 제자에게는 소위 말해서 ‘필이 머리에 퐉’ 하고 온것이죠.
이제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겠구나. 정말로 예수께서 ‘메시아’구나. 하는 것이죠.
예수를 38절에 ‘랍비여’라고 호칭합니다. 그러던 형제 안드레가 시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는 그의 이름을 게바 - 베드로라 부르는 것이죠. 호칭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볼때 ‘랍비’ 예수님과 머물다가 시몬에게 소개할 때 ‘메시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하루가 다르게 뭔가 팍팍 지나갑니다.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고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을 데려오고 예수님은 시몬을 보고 앞으로 ‘베드로’라고 해라 하고. 다음날에는 빌립을 부르고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을 부르고 뭔가 하루에 엄청난 일들이 결정되듯 지나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가나 혼인잔치 기적이 벌어집니다.
듣는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 여러분이 창세기를 읽으면 7일 동안 빛이 잇으라. 하면 빛이 있고, 갈라져서 어둠으로 나뉘고, 땅이 있으라고 하고 막 이러면서 7일이 순식간에 흘러가는 것처럼...
반면에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어땠냐면 따르긴 해요. 하지만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제자들이 썩 좋은 모습이 없어요. 실패하는 모습도 많이 등장하고 그러는데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바로바로 믿은 것으로 글을 쓰고 있는거죠.
하지만 몇절 안되죠. 그 사건이 발생하고 제자가 되고 예수를 따르는 과정이 일종에 설명 없이 팩트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 같은거죠.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 너무 간단하게 말하니까. 의도 파악이 어려운거라고 말을 하는 거죠.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n차 관람을 하는 이유는 숨겨진 하나 하나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거예요.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의 증거와 설명으로 그가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이것만으로도 결코 쉬운건 아닙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여기 본문에 보니까. 동사가 3개가 나와는데 ‘가서, 보고, 거하니’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 이 문장은 헬라어 본문에서 조건적인 명령의 의미가 있는데 ‘만약 너희가 온다면(나는 너희가 오기를 바란다),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에 제자들이 가서, 보고, 거하니 언제까지 거했냐면 대략 오후 4시즘 입니다. 곧 해가 저물 때 즘 /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니 그날이 끝날 때즘 까지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 무엇을 보았을까요. 머물먼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새 번역은 ‘묵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공동번역 계시는 곳을 보았다.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계신 데를 보고(개역개정)
이들은 40절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소개 였습니다. 두 번에 이른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 그 앞서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소개를 받은 거죠.
신뢰할 만한 사람의 소개.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뢰 받을 만한 사람에게 소개를 받아서 ‘누구 누구’의 소개로 왔습니다. 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죠.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따라 ‘가서’, ‘보고’,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께서 메시아 인것을 알았습니다. 특이하게 사도 요한만 ‘메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의미로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이걸 아람어로/ 음역해서 당시의 말로 쓴거죠.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 대제사장, 선지자들 또는 특별한 일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될 때 기름을 붓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죠.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바로 저자 요한이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두 제자는 가서, 보고, 머물면서 = 3 동사는 우리 살아가면서 대부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고 소위말해 의식의 흐름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는 걸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고프니까 먹는 거죠. 둘에 차이가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차이예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밥먹은건 기억해요. 하지만 가족들끼리 평범하게 밥먹는건 그냥 자연스러우니까. 별로 기억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가족을 좋아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왜 그렇죠.
너무 당연해서 그런거예요// 예수님은 우리 곁에 너무 당연한 사람의 모습으로 있으니까 사람들은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줘요. 막상 뭘 보여주면 믿을 것 같은데 안그래요. 오늘 두 사람은 예수님과 머물렀어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백이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예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이죠.
요한사도가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믿기 위해서는 이들처럼 ‘가서, 보고, 머물면서’ 깨닫게 된다는 의미를 두는거죠. 그들은 예수께서 구약의 유월절, 곧 유월절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믿고 에수께 나왔고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가서, 보고, 머물러’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기본이 되는 건데. 그냥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가서 멈추는 사람, 가서, 보고 딱 보면 안다고 머물르지 않는 사람, 가서 , 보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지만 ‘의미’가 없는 우리는 ‘시간 때운다’라고 하는거죠. 그러니 가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게 됩니다.
대단하걸 말하는게 아니예요.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일도 그렇게 시작한다면 우리 사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지혜는 성경뿐만 아니라 고전 다시 말해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알고 있었어요. ‘작은 일도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러우면 겉에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감동시켠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이 명언의 결론은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세상까지 아니어도 ‘나를 ‘ 변화 시키는 과정에 ‘가서, 보고, 머물러야 해요’ 운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장에 가서, 운동하는 사람을 보고 자신이 그곳에서 머물면서 운동해야 해요. / 유튜브로 아무리 봐도 가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되고,/ 가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시간만 보내고 오면 안되듯//
모든 분야가 그렇게 움직이는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 인지를 알아본 두 제자의 ‘가서, 보고, 머물러’ 있는 과정을 통해 그는 시몬도 데려올 수 있었고, 시몬은 베드로 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자 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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