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우리가 올라가자 ; 창11:1-9(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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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찬양 -대표기도- 광고-봉독
76장 창조의 주 아버지께
49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창세기 11:1–9 (NKRV)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서 론
서 론
비가 억수로 내릴때면 예전에 제 차가 침수를 당했던 때가 기억이 나곤 합니다. 저기 반여농산물시장 쪽에 보시면 좁고 배수가 잘 안되어서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쉽게 고이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 물론 그때 그 여자친구가 지금 제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집에 웃으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나오는데 반대차선에서는 이미 잠겨서 차를 밀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언제 시동이 꺼지려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참을 헤쳐나오다가 결국은 시동이 꺼져버렸습니다. 간신히 강변쪽으로 정차한 뒤에 보험사에 연락했는데 침수 신고가 너무 많이 들어온데다 도로사정이 안되서 못간다고 말하덥니다. 그래서 결국 차를 버리고 집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는 무사히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계속 비가 많이 내렸다가 또 멎었다가 하지 않습니까? 물이 고여서 출렁출렁이는 것을 보면 혹시 또 물이 불어나서 침수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연약한 우리의 인생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들을 천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실 줄 믿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주실 줄 믿습니다.
본 론 1
본 론 1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벨탑 사건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 보자면 이 바벨탑 사건은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다시 번성하게 된 인류들이 배경입니다. 당시에는 온 땅에 언어가 하나였고, 그들은 같은 곳에 살았기에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읍과 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돌과 진흙으로 집을 짓던 시대에 돌 대신 벽돌을, 진흙대신 역청을 사용해서 튼튼한 탑을 지었지요. 그들의 목적은 4절 말씀에 나옵니다. 창11:4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첫번째 목적은 인생의 의미를 자신들의 성취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목적은 인생의 의미를 자신들의 성취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탑을 하늘에 닿도록 잘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기를 원했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며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업적을 통해 자신들의 인생의 의미를 가지길 원했습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목적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이렇게 살아갑니다. 자신이 이룬 것들을 통해 자기 만족을 가지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송을 받는 것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서점에 가면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책들을 찾아 읽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개발해서 인생을 윤택하고 의미있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가득합니다. 20대가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들 중에 한가지는 ‘자신개발을 위해'라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통해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자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살아갈 의미도 없다고 느끼게 되곤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살게하시는 성령의 능력’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살게하시니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갈 가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여전히 죄를 짓곤 하지만 책망하시고 거룩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능력에 우리가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고,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번째 목적으로 그들은 흩어지지 않길 원했습니다.
두번째 목적으로 그들은 흩어지지 않길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에 나와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요? 창세기 1장 28절에 아담에게 복을 주시면서 주셨던 명령과 비슷합니다. 그때도 복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었죠. 그 말씀대로 하려면 어디 한군데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야 했습니다. 8명으로 새롭게 시작했던 인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세상에 흩어져서 번성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성읍을 쌓고 모여서 안전하게 살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서 뭉치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의 편안한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흩어졌을 때는 생존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또한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먹고 사는 문제를 매일같이 걱정해야만 합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길을 떠나 새롭게 가게 된 곳은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생존과 평안한 삶을 위해선 뭉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명령을 거부하고 뭉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인류의 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사지로 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남으로써 사지로 몰리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면 그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걸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죽을 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이들을 생명 길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며,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는 사명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기로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실 줄 믿습니다.
세번째 목적으로는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세번째 목적으로는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 당시에 지었던 탑은 신전의 기능을 했습니다. 신을 만나는 장소인 것이죠.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집"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꼭대기가 구름 층에 이르는 이 탑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접촉하기 위해, 그러니까 보통 '신이 거하는 곳을 표현하는 하늘'에 접근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탑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긴 계단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계단을 통해 하늘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이르고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 생각했던 하늘에 이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보는 하나님과 동급이 되거나, 하나님마저도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기를 원했습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한 목적은 "자신들의 업적을 쌓아 유명해짐으로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의 흩어지라는 명령을 어기며 모여살며,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우리가 느끼게 되는 인생의 연약함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변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심각한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창조주를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창조주처럼 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모릅니다. 일종의 광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7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7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멈추지 않을만큼 완강했습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말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완강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십니다. 언어가 달라지니까 서로 뜻이 잘 통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세상에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론 2
본론 2
오늘 말씀 본문은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2절은 ‘온 땅에 언어가 하나'인 것과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거류'한 것을 말해줍니다. 반면 8-9절은 여호와께서 거기 거류한 자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고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3-4절은 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의 말과 그들의 결심을 보여주는 반면, 6-7절은 그들을 막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심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5절 말씀을 기준으로 역전되고 있습니다. 창11:5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거주했지만 개입 이후에는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가려는 인간의 결심과 그들의 결심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결심이 대조됩니다. 인간들은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하고 좋은 삶을 만들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을 멈춰세우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따라 살아가며,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반전을 이루어내고, 사랑에 목말랐던 인생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만드십니다. 사라져버릴 것들을 쫓아가던 인생이 이제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 불안과 근심 가운데 있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불행하지도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불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적용할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날마다 개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마음을 따라 그릇된 길로 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는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선한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선하신 손길로 개입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에 닿으려고 지었던 탑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려고 내려오셔야 했다고 본문은 말해줍니다. 탑을 지은 자들은 교만하게도 자신들이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작고 볼품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나눠주셨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니까 온갖 건물들과 사람들이 먼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고요. 우리는 하늘에서 보면 아주 작은 먼지와 같은 존재로 느껴집니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주십니까? 어떤 찬양의 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 바다에 이는 파도 안개와 같지만 주는 나를 붙드시고 부르짖음 들으시며 날 귀하다 하시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마음, 하늘에 닿은 것처럼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과대망상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겨주시는지를 더욱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이들과는 달랐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11장8-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으실 도성을 바라며 이 땅에서 방랑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방랑자의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도성을 바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지었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안전과,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력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갔고, 하나님께서 지으실 성읍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를 바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성을 향해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해주시기를 바라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닿아 그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필경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겸손히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어 우리가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자! 우리가 올라가자!’라고 되어있는데 이렇게 한번 같이 해봅시다. ‘자! 우리가 엎드리자!’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주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더욱 큰 은혜로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