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회복해야 할 두 가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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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기념주일 설교-
마태복음 16:18-20
소설가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아십니까?(ppt) 병자호란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요. 잘 아시다시피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을 때,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 않습니까?
이 청나라의 군사들이 양민들을 학살하고 기술자들과 부녀자들을 인질로 삼고 아이들은 길거리로 내쫓겨서 동사하는 아이들이 이곳저곳에서 속출하는 불행한 상황인데, 왕과 신하들은 남한산성 안에 갇혀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만든 소설입니다. 저는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봤는데요. ‘백성이 나라를 잃게 되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마침 어떤 칼럼에 보니까 그 소설을 소개하면서 이 소설은 두 가지 포인트를 두고 봐야 한다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첫 번째는 ‘적의 스피드’의 관점에서 봐야 하고 두 번째는 ‘그 와중에 벌어진 아군끼리의 싸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전쟁이 터지자마자 왕의 일행이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청나라 기병대의 침략이 얼마나 초스피드로 쳐들어왔는지 강화도로 가는 그 길을 차단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간 곳이 남한산성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그 와중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정 신하들은 밤낮없이 논쟁만 일삼고 있는 겁니다. 그 소설에는 당시 지도층들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성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마침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가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있을 때였거든요. 온 나라가 한국 교회를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낼 때였는데, 당시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오늘의 한국 교회가 남한산성에 갇혀서 외우내환(外憂內患)을 겪고 있는 모습처럼 자꾸만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한국 교회의 모습은 밖으로는 세속화와 다원화의 물결이 청나라 기병대보다 더 초스피드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저는 자녀교육 하는 게 참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또 부모로서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하는 속도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세상 문화가 훨씬 빠른 속도로 장악하고 있는 것을 벌써 저희 두 아이를 통해 보고 있거든요.
여러분, 궁금하시면요.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OTT서비스나 아이들이 즐겨보는 유튜브 동영상을 한번 보세요. 영화든 소설이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문화가 얼마나 깊게 침투해 있는지 모릅니다. 갈수록 더 빨라지게 될 거예요.
이렇게 세상은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로 빠르게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조정 대신들처럼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분열이 있습니까?
그러다보니 어느 때는 한국 교회가 꼭 길을 잃어버린 등산객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게 원칙이죠. 그래서 등산을 하면서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 표시를 하라고 하잖아요?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점검하고 체크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교회 창립 69주년을 맞은 우리 하름교회에 주시는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교회의 첫 시작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하면서 교회의 원형을 초대 교회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은요. 이 초대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 훨씬 더 중요한 본질적인 교회의 터전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 교회가 탄생 되었다면, 오늘 마태복음 16장은 교회가 잉태되는 순간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그것을 알게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라면서 베드로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굉장히 중요한 한 말씀을 주시는데, 18절 말씀(합독)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제가 교회의 잉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는데, 이 반석이 뭐겠습니까?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 반석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화면 행4:11 합독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우리 각자 개인에게, 또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시라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견해로 이 반석이라는 것은 베드로 자신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요.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여기고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황의 권위를 거의 성경의 권위처럼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곧 반석이라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세 번째 견해는, 이 반석이라는 것은 베드로 자신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때 베드로가 했던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베드로와 교황을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발 때문에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견해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해보는데요. 첫 번째 견해와 세 번째 견해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작년 9월 담임목사 취임식을 할 때,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제 조카가 자기 엄마한테 물어보더래요. “엄마, 이 교회 이름이 심훈교회야?” 조카 아이는 제가 취임을 한다니까 제가 교회의 대장인 줄 알았나 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반석이시고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이후로 그 반석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흘러넘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평소에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말씀이지만, 전혀 모르는 말씀처럼 다시 묵상해 보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이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이 우리 하름교회를 살릴 수 있는 원형의 말씀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얼마나 많이 묵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가 영적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회복해야 할 두 가지의 조건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진정성’입니다. 진정성! 이것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조건입니다.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권 아닙니까? 왜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게 진정성을 말할까요? 진정성이 가장 사라지기 쉬운 곳이 바로 정치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진정성이 가장 필요한 곳이야말로 바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이 진정성이 많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엡4:23-24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권면하고 바로 그 다음절에 보니까 십자가로 새롭다함을 얻은 사람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그 사람 다음 25절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25절(ppt)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여러분, 이 ‘그런즉’이 뭘 말씀하려는 건지 아시겠죠? 너희들이 새 사람을 입었다면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길 잃은 등산객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진정성이 보이질 않습니다. 뒤에서는 비난하고 앞에서는 축복하는 이런 진정성이 사라져버린 한국 교회의 모습이 바로 교회를 병들게 하는 핵심이더라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가 회복해야 할 진정성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의 진정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한 대로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심지어는 저같이 목사도 되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으냐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야말로 담임목사로서 우리 하름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사들은 삶은 배제된 채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설교라는 것이 인격과 영성이라는 이 두 가지의 진정성이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설교자의 영성이 말에서 나오는 게 아니잖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진정성이 있는 신앙고백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잘 믿으시길 바랍니다. 진짜 예수님을 잘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는 그 신앙고백이 말뿐인 고백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두 번째 진정성이 무엇입니까? 성도들 간에 진정성 있는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참 진정성이 없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뭔지 아세요?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입니다. 뭐 사랑하지도 않는데 시키니까 해야 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는데 축복하라고 하니까 해야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선배 목사님 한 분이 분쟁이 있던 교회에 막 부임해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저처럼 성도들 간에 인사를 몇 번 시키셨는데, 나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 그런 인사 좀 안 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는 거예요. 이유가 뭔가 봤더니 본인을 망신 주어서 싫어하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축복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제가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정말 진정성있게 사랑하고 섬기게 해달라는 게 제 기도 제목입니다. 부교역자들 정말 귀한 분들이신데, 기능적으로 보지 않고 인격적으로 바라보면서 행복한 동역을 해달라고 하는 게 제 기도 제목이에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내년에 70주년이어서 해야 할 일도 많고 10년 후, 30년 후가 더욱 지속 가능한 교회가 되도록 준비하고 감당해야 할 일이 많지만,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공동체를 향한 진정성이 회복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부임 심방을 했을 때,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에게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여쭤봤거든요. 언젠가 한 젊은 남자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그러시는 거예요. “목사님, 전에 계시던 목사님들도 설교도 잘하고 목회도 잘하셨습니다. 목사님 지금도 잘하고 계시지만, 성도들을 정말 사랑해 주는 담임목사가 되어 주세요” 저는 이 말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라고 여겼습니다.
여러분, 올해가 가기 전에요. 혹시 진정성 있는 관계 회복을 위해 저처럼 기도해야 할 분 안 계십니까? 저는 소망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하름교회 당회원들이 서로 진정성이 있는 당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남녀신도회 안에서의 교제가 서로 얼굴 볼 때는 웃지만, 돌아서면 불편한 관계가 아닌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진정성이 있는 신도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못 만나더라도 단톡방에서 서로 축복하고 격려하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목장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대해 이런 꿈을 꾸세요. 입술로 사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고 연합하는 우리 하름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교회가 회복해야 할 두 번째가 있는데, 바로 예수 시스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을 하시려고 제자들을 일부러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데리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이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참 중요한지 아십니까?
주님이 데리고 오신 가이사랴 빌립보 그 웅장한 도시를 보면서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시스템에 압도당하면서 살면서 세상의 논리에 영향을 받았던 베드로가 그 화려한 가이사랴 즉 황제의 도시에서 ‘이제는 로마 황제의 시스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시스템에 굴복하겠습니다’ 이것이 담겨진 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싫어했던 핵심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던 것일까요? 무슨 메시아가 이렇게 초라하게 왔느냐는 것 아닙니까? 무슨 메시아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느냐는 것 아닙니까? 무슨 메시아가 세리들을 가까이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냐는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의 논리로는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실 분이라면 힘을 가지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십자가를 지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겁니다. 이게 당시 유대인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 땅의 화려한 성공을 위해 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화려한 빌립보 황제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왕궁이 아닌 마구간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 안에는 이 두 시스템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 안에 예수 시스템과 유대인들 시스템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십니까?
그토록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인들의 논리가 여전히 교회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모든 게 잘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세상 사람들이 로마 황제를 붙잡아 가지고 저렇게 화려한 가이사랴 빌립보를 건설했다면 나는 메시아 끈 붙잡고 더 화려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게 유대인들의 논리였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날마다 기도를 한다면 주님은 그거 필요하다면 줄 수 있다는 하실 겁니다.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런 세상의 논리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 잘 믿다가 사업이 잘 안되어서 망하더라도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 시스템입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장로 피택, 권사 임직식 할 수도 있었습니다. 교회들마다 담임목사 취임할 때 중직자들을 피택하는 게 관행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 같은 목사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장로, 권사, 안수집사 교회의 제직들은 명예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 안에 직분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논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제직교육을 먼저 하자고 한 것 아닙니까? 진짜 성경이 말하는 제직의 역할은 무엇인지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딱 하나입니다. 섬김과 순종입니다. 다 예수 시스템 안에 있는 논리이죠.
그래서 교회 안에 이 두 가지가 복원되기 위하여 하나는 진정성이 흐르고 또 하나는 예수 시스템을 위하여 우리가 늘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 베드로 믿을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담임목사 의지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지금은 멀쩡해 보이는지 몰라도 저도 얼마나 많은 연약함이 있는지 몰라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중요한 것처럼 저도 역시 제가 가진 목회철학이 얼마나 건강한가? 신앙과 인격은 어떠한가?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 7년째 되는 해에 재신임 투표를 합니다. 목사님들 따라서는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는 게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제가 지금은 이렇게 부임 초기니까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6년, 7년 후에 제가 어떻게 될지 무슨 사고를 칠지 어떻게 압니까? 저도 저를 못 믿는데요. 그래서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를 통해 제가 계속 우리 교회에서 시무를 할 수 있을지 재신임 투표를 하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정신 바짝 차리고 목회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것이 필요합니까?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마치고자 합니다. 창립 69주년을 맞은 우리 하름교회가 이름 그대로 하늘 아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끼리만 좋으면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왕 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그분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세워진 교회가 어떻게 태동합니까? 바로 사도행전 2장에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임하실 때, 성령의 역사가 시작될 때 교회가 시작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 여러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내규도 좋고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모든 게 좋아도 이 교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 변질될 수 있는 우려가 진짜 큽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성령님께 붙들림 받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대단한 방언이나 말로 성령, 성령 하지 않더라도 우리 교회 바탕에 사도행전 2장에 임하신 초대 교회의 가장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창립주일을 맞은 우리 하름교회 안에 이런 진정성이 흐르는 관계와 예수 시스템으로 인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69년간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또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담아 우리 이 찬양 함께 힘차게 불러보겠습니다. “주님의 선한 능력으로 우리를 안아주세요. 그리고 창립기념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 교회도 그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라” 가사를 생각하며 함께 찬양합니다.
❙결단찬양 : 선한 능력으로
❙합심기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과 성도들 간의 진정성이 회복되는 교회 되길 원합니다. 세상적인 논리나 시스템이 아닌 예수 시스템이 작동되는 교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지난 69년의 세월을 우리 교회와 함께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성도들의 헌신과 수고로 또 은혜로 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이렇게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장학금을 수여하고 기념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과 성도들 간에 진정성이 있는 관계 회복과 예수 시스템이 작동되는 진정 하늘 아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하름교회가 10년 후, 30년 후가 더 좋은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하름교회가 회복해야 할 두 가지 가치 진정성과 예수 시스템 회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길 다짐하는 우리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