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기쁨과 온전함을 이루는 복음(골 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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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승리와 온전함을 이루는 복음(골 1:21-29)
거래하는 은행이 있으실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과 어플이 발달해서 종이로 된 통장이 아얘 없기도합니다. 그래서 은행 볼일을 대부분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해결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번거롭지만 현금을 싸들고 꼭 은행에 가서 금융거래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은행 볼일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통장정리입니다. 내가 거래한 것이 정확한지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함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왠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은행잔고와 통장에 찍힌 잔액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입출금을 맞추는 행위, 수지를 결산하는 행위를 영어로 ‘화해하다’는 뜻을 가진 ‘reconcile’이라고 합니다. ‘구좌의 입금과 출금을 화해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잔고가 맞지않다면 어떻게 할까요? 나중에 은행이 알아서 정리해 주겠지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들 돈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은행을 찾아가서 잘못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피땀 흘려 번 돈이기에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과 마음으로까지 원수 되었던 우리를 고쳐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reconcile) 해주셨습니다. 지난 1:14절의 강론을 통하여 살폈듯이 흑악의 노에였던 우리를 속량(대속)하셔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주셔서 그 잔액이 꼭 들어맞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과 일치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그 일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성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이런 복된 소식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은혜의 우산 밖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괴로움과 고난 때문에 낙심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골로새서 1:21-29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복음은 괴로움과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성숙한 자로 서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론>
바울은 골로새서 1:15-20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주가 되시며, 구원의 주가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괴로움과 고난도 넉넉히 감당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를 완전한 자로 서게 한다고 말합니다.
(Exegesis) 이와 같은 복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결과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I. 하나님과 화해하게 합니다(21-2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한 분이시고, 그래서 그 별명도 또한 사랑입니다(요일 4:8, 16).
동시에 그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입니다.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 간격이 얼마나 큰 지 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벌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나 철학, 도덕의 힘으로도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당연히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물론 영원한 죽음이라는 삼중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예전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악한 행실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고, 그 결과 마음(dia,noia, mind, understanding)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절망 가운데 있었고, 아무런 살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우리 인생에 대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절망 가운데 빠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간섭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이 그 사실을 말씀합니다.
창조의 주요, 구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 육체적으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22a).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avpokatalla,ssw, reconcile completely) 곧 화해하게 하셨습니다(22b).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도 없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22c).
이어지는 23절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지 그 비법을 소개합니다.
계속 믿음 안에 머물고(23a), 그 터 위에 굳게 서서(23b), 이미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23c).
다시 말해서 믿음과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오늘 나의 상처와 약함도 고쳐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23절이 말씀하는 ‘복음의 소망’은 또한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복음의 소망입니다.
그 날에 오늘 내가 겪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또한 복음의 소망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그 날이, 고통과 갈등이 없는 그 날이 반드시 예비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의 소망입니다.
사도바울은 23절 끝부분에서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의 복음이 천하만민에게 전파되었고(23d), 바울 자신은 바로 그 복음의 일꾼(dia,konoj)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23e).
그 은혜의 복음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허물, 약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영혼과 육체가 부숴질 대로 부숴져 버린 우리를 다시 고쳐주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도 없고, 책망할 것이 없도록 서게 해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영혼과 육체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우리는 살려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또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이 위대한 복음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겨야 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늘 깊이 잠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는 그런 자리로는 되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이후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복된 그 자리에 늘 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복음이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결과 두 번째는,
II. 괴로움과 고난을 기뻐하게 합니다(24-26)
본문 24절은 복음의 일꾼이 된 사도바울의 결연한 자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질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괴로움도 고난도 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천국복음 때문에 수치와 모욕, 고통스러운 죽음까지 당하신 예수님처럼 교회와 복음을 위해 받는 괴로움(pa,qhma, suffering, passion)은 기뻐하고 남은 고난(qli/yij, affliction, tribulation)은 자신의 육체에 채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이 괴로움과 고난까지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꾼(dia,konoj)이 된 것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직분(oivkonomi,a)을 따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경륜(God’s economy)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25).
그런데 무엇이 사도바울이 이루려(plhro,w, fill, fulfill, complete) 했던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26절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musth,rion)이라고 지칭합니다.
왜냐하면 만세와 만대(ages and generations)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 비밀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자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이제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한계와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동일하게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직분 곧 복음의 직분을 부여 받았고, 그래서 복음의 일꾼이자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에 채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얻은 대가가 자신이 치러야 했던 모든 위험과 불편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복음이 주는 자유도 이런 괴로움과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거는 위험도 기꺼이 감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과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는 것입니다.
수고와 고난, 희생을 통해 완성되는 십자가의 길을, 주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언덕 길을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나의 조그만 수고와 고난에도 힘겨워하며 그렇지 못한 상대방에게는 비난의 독화살을 날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주님은 간데 없고 그저 나와 내 가족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수고하면서, 주님을 위해 수고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욕심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 마치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엉뚱하게 고난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오늘 오해가 있고, 아픔이 있지만, 그래도 사랑하며, 섬기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그 오해와 아픔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위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기꺼이 괴로움과 고난을, 오해와 아픔을 감당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준비된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복음이 만들어 주는 세 번째 아름다운 결과는,
III.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서게 합니다(27-29).
오늘 본문 27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 곧 그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의 영광스러운 풍성함(the glorious riches of this mystery)’이 알려지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바울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에 따라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25).
2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이라고 묘사했던 사도바울은 27절에서는 성도들 안에 계신 모든 믿는 자들의 영광스러운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가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비밀 중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8절은 사도바울과 동역자들이 어떻게 감추어졌던 비밀이자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는지를 말씀합니다.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각 사람을 권면하고(admonishing, nouqetou/ntej), 가르치면서(teaching, dida,skontej)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28a).
다시 말해서 잘못된 것들은 고쳐주고, 모르는 것들은 가르쳐주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te,leioj, perfect) 자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mature) 그리스도인들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28b).
‘완전한 자’ 곧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복음을 통해 기대했던 열매였던 것입니다.
29절에는 24절에 이어 복음의 일꾼이자 교회의 일꾼인 사도 바울의 결연한 의지가 한 번 더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단지 자기 힘으로만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한다’(avgwnizo,menoj, engage in an athletic contest)는 것은 레슬링 시합에 참가한 선수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수고의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자신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수고하는 방식이 바로 복음을 따라 권하고, 모든 지혜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의 도덕교육도 어느 정도 우리를 올바른 윤리와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도덕교육이 우리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치유책이 필요합니다.
그 근본적인 치유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케 하는 복음이 우리 안에 역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은 가정교육이 아니며, 학교교육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뿌리를 둔 신앙교육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 없이 연약한 우리를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해의 복음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길 때, 내 안에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새사람으로,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고후 5: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너무 주눅들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시각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이 지배당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서의 짧은 인생 여정이 우리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오늘 힘겨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옮겨놓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의 척박하고 외로운 오늘 삶의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복음과 성령을 통해 거룩하고, 흠도 없고, 책망할 것도 없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복음에서 비롯되는 권면과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확신 가지고 힘있게 복음적인 삶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Applicat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해의 복음, 그 소중한 비밀을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도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24절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그 일을 있는 힘을 다해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교회의 일꾼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우리 교회의 비전을 성취해 가는 일에 우리 모두 같은 마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복음의 증인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을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들로 세워가는데 거룩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더 이상 영적으로 낙오하지 않도록 느슨해진 우리의 영적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복음의 일꾼으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영적인 성숙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의무적으로 네 학기 동안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소그룹 활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 네 학기의 각각의 주제는 정체성(identity), 공동체(community), 진정성(integrity), 그리고 사역(ministry)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를 주제를 가지고 매 학기마다 소그룹의 구성원들과 함께 모여 공부하며, 기도하며, 토의하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완전한 사람 곧 성숙한 신앙의 인격의 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먼저 우리 각자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공동체에 반드시 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진정성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역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것은 물론 정체성, 공동체, 진정성, 사역이라는 선순환의 구조를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했습니다.
또한 이 은혜의 복음 때문에 이제 우리도 괴로움과 고난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도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소망을 간직하고, 화해의 복음 때문에 날마다 완전한 자 곧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