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있는기독교07_교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요엘 2:12–13 NKSV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복음주의 교회에 생긴 문제

기독교가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교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곧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 것이다.

평준화 성향

복음주의 신앙의 부흥은 성경권위와 십자가의 필연성에 있었다. 이 핵심적인 믿음은 좁았지만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중심이 와해되었다. 왜 그랬을까?
민주주의 정서에 스며들어 있는 ‘평준화’ 추구이다.
오늘날처럼,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서로 비슷하게 산 적이 역사상없었다.
똑같은 식품을 먹고, 똑같은 오락장, TV프로그램, 고속도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 비슷비슷한 집, 스타일, 옷 등, 현대화된 사회는 사실 똑같은 대중적 기대감을 생산한다. 이는 똑같은 맥락, 경험, 마케팅, 시선에 의해 창출된 복제품 같은 기대감이다. 인생에 대해 생각할 때도 똑같이 단순한 공통분모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모두 아주 비슷한 생각을 품기 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인은 높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비슷한 유의 경험을 낳는 경향이 있다. 이는 축복이자 저주이다. 부의 기회가 재분배되었기에 축복이지만, 고도로 상업화된 문화생활이 생각하는 방식과 원하는 것까지도 똑같이 밋밋하게 동질화시켜 버렸다.
교회에서도 똑같은 양면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만인을 위한 복음이기에 세계선교에 대한 명령을 깊이 명심하고 있지만, 현대사회의 평준화 성형에 맞물리면서 모두에게 접근이 가능하되 깊이와 심오함을 잃어버렸다.
복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아무도 깊이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단순성과 심오성을 둘 다 선택해야 한다.
오늘의 현실은 심오성을 버린 복음주의자들로 인해 교회는 부서져가고 있다.

매력적으로 만들라

마케팅은 모든 것을 고르게 만들고 단순화시키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평준화추구와 마케팅의 만남으로 인해 교회는 너무 단순화되어 그 알맹이가 사라지고 있다.
복음을 팔기에 좋은 매력적인 모습으로 만들다 보니 손해가 막심한 승리가 초래된다. 외적인 매력이 깊이를 누르고, 테크닉이 진리를 누르고, 소비가 비용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다. 빈약하고 속빈 강정같은 얄팍한 복음의 테두리를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다.
지역교회는 이런 잘못을 교정해야 한다.

교회를 잃고 있는 현실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이,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다운’모습을 다 벗게했다. 복음 전도가 제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지 못하고 있다. 비가시적인 교회가 모든 것이 되고, 지역마다 있는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많은 성도들은 TV전도자를 쳐다보고 있으며, 이들이 ‘교회’와 연결되는 유일한 접촉점이다. 교회에 가긴 가더라도 사실은 홀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회는 ‘재정’적인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봉사의 기회도 없고, 징계를 받을 만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성찬식도 제공하지 않고, 목회적 보살핌도 없다. 일련의 가르침도 없다. 이런 행습은 지극히 사유화된 신앙관을 낳을 뿐이다.
무교회적인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실용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축소 지향적인 사고방식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거듭난 기독교인 가운데 최소한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도 갖고 있는 경우가 9%에 불과하다. 생활방식도 세속주의자와 별 차이가 없다. 자칭 그리스도인이 왜 세상과 별로 다르지가 않는가?
교회변혁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직을 재편하고, 인력을 줄이고, 새로운 리더십을 영입하고, 새로운 시장을 찾고, 새로운 광고기관을 고용하고, 참신한 얼굴을 붙이고, 상품을 바꾸는 것이 사업계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재난을 자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조작술, 우리의 체계, 우리의 조직, 우리의 마케팅에 의해 좌우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 다수는 대안에 대해 생각하는데 필요한, 튼튼하고 성경적인 신앙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교회의 양면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 숨은 교회와 드러난 교회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교회’라는 단어는 언제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특정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면서, 또한 모든 시대와 장소, 하늘과 땅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전 시대에는 가시적교회와 비가시적교회의 구분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구별로 나아갔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사유화된 신앙은 비가시적교회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가시적교회는 부적절한 기관으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보다는 선택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숨겨져 있는 것

오늘 날 더 좋은 구별법이 있다. 숨은 교회와 드러난 교회이다.
교회의 삶에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눈에 보이게 될 실재가 있다. 그 현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대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나그네로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이 ‘숨은 있는’이다. 믿음으로만 파악될 수 있고, 어떤 조직이나 테크닉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통제와 조작에 열려있는 인간적인 사업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눈과 권세들에게서 스스로를 숨기신다.
하나님은 야성이 있으신 것 같다. 통제가 불가능한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어야 한다. 복음은 생명의 메시지기 이전에 죽음의 메시지다. 우리가 죽음의 행렬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메세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는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이 모든 주권을 양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구속함을 받았으나, 아직 완전히 구속되지는 않았다.

교회를 재고한다고?

교회는 우리가 만든 창조물이 아니다. 사업체도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관리하도록 부름받은 것도 아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우리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고할 필요하 깄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다.
자문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가. 교회가 얼마나 우리 문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거리감과 영향력

교회는 주변 문화에서 오는 사람들로 인해 문화가 동일시되기 쉽지만, 사실은 문화와 거리를 두고 무언가 불협화음을 일으켜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말씀을 듣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이 예배하는 그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분이다.
교인들은 이 세상 속에 있긴 하지만, 이 세상이 그들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교회를 규정짓는 것은 그 조직적인 측면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로 모일 때,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앞에 서라는 부르심.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품고 예배하라는 부르심.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라는 부르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는 부르심. 하나님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운영하라는 부르심을 듣는다.그러므로 교회는 내세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에 영향을 주는 교회들은 역설적이게도 문화와 거리가 있는 교회들이다. 그들은 그 문화 속에서 세속적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문화적인 삶의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의 주관심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어느 것과도 다른 하나님이다. 이생에서 발견하는 관심사는 철저히 현세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발견해야 할 관심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분의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 속에서 소수파다. 그러나 다수파의 안락함과 세상과 평화롭게 살고싶은 유혹은 언제나 있다.
교회가 성공적이 되려면, 언행을 통해 자기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에 따라 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성성의 표지들

하나님의 말씀

교회는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약성경에는 역사적 내러티브, 비유들, 실제적인 담론 등 여러 장르가 담겨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내세워 사도들이 전한 기독교가 교리의 형태를 지녔다는 사실을 반박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교육하고 양육하고 도덕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교리를 ‘아는’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교리를 ‘믿고’, ‘가지고’, ‘붙들고’, ‘지키고’, 교리를 위해 ‘싸운다’. 교회에서 가장 중앙에 자리잡아여 하는 것은 교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교리는 미지의 땅이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냐하면 소위 거듭난 사람들에게 여러 면에서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지 경험을 얘기하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그 장엄한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말 속에 스스로 숨어 계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배우게 되기를 기대하신다.
설교는 어떤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놓고 얘기를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다. 설교자의 생각이 성경 텍스트에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존전에 있을 때, 그 설교자의 더듬거리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 설교야말로, 우리들을 호출하고, 우리의 영혼을 살지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에 데려가서,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진리나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경외심과 감사와 격려와 때로는 책망을 안고 떠나가게 한다.
강해설교는 텍스트를 설명하고 적용은 하나님께 맡기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설교는 적용에 집중한 나머지 심리학과 각종 치료법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텍스트와 적용 둘 다 붙들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대면시키고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교인들은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예배당에 들어올 때처럼 공허함과 헤갈림만 안고 떠날 것이다.
우리에게 원수가 없는 것처럼 설교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원수가 엄연히 있다. 우리는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 양끝단을 모두 붙들고 씨름해야 한다.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이 설교자가 던져야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설교자가 왜 이리 적은가? 왜냐하면 설교자가 성경적 진리가 포스트모던 청중들에게 진정한 필요를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곳을 향하여

교회는 누가 세우는가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