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19 수요] 은혜를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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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97 주 사랑 안에 살면 / 391 오 놀라운 구세주
찬송 413 내 평생에 가는 길
본문 막7:24-30
‘은혜’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드는 것 같다. 값없이 거저받은 것이기에 더 감사할 수 있고, 더 감격하게 되는 것이 은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신학자는 은혜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무가치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호의’라고 하였다. 은혜가 우리를 부르고, 은혜가 우리를 중생시키며, 은혜가 우리를 의롭다 하고, 은혜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은혜가 우리를 보호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은혜는 단 한번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필요하며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죄용서를 받기 위해, 때로는 어긋난 인생방향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이키기 위해, 때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기 위해, 또한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승리하기 위해 등등으로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은혜는 물론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이지만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사모해야 할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자세 3가지 측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첫째로,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첫째로, 겸손하고 간절하게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먼저 수로보니게인, 즉 수리아 지방에 속한 사람으로 정확하게는 수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페니키아 족속이었다. 페니키아는 어떤 민족이었는가? 저들은 영어의 알파벳을 발명했던 민족이며, 로마제국이 등장하기 이전 오랫동안 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던 자들로서 특히 우수한 항해기술 때문에 해상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던 민족이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의 공격으로 인하여 그리스의 한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여인은 헬라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이교도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이방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헬라인들은 지식적인 면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하여 하대하였고,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으로 인하여 이방 사람들을 모두 '지옥의 땔깜' 정도로 여겼었다. 그런데 그처럼 자긍심이 대단하던 페르시아 여인이, 그것도 유대인을 하대하던 헬라인이었던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리게 된다. 유대인 앞에 페니키아인이자 헬라인인 이 여인이 엎드린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특별히 저자 마가는 25절 말씀을 통하여 이 여인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마자 곧장 예수님께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가련한 딸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동네를 수소문하여 주님께서 묵고 계시는 숙소를 간절하게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계신 집으로 달려가 주님을 뵈옵고, 뵈옵자마자 두 번째로 한 일은 그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는 점이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에서 발 아래에 엎드리는 행위는 ‘겸손, 존경, 순종’을 잘 드러내는 행위였다. 특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나의 목을, 나의 생명을 당신께 드립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 내 목을 맡깁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의 발 앞에 납작 엎드린 것도 이와 같았다. ‘주님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직 은혜를 베푸실 주님을 간절히 믿습니다. 주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혹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셨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가?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잠언3:34 말씀에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라고 말씀하시며, 시149:4 말씀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져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어려움과 시련과 문제들 가운데 해결 받고, 고침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둘째, 주님을 신뢰하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둘째, 주님을 신뢰하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주님을 신뢰하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찾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방인은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이 주님께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들었던 소문들 때문인데, 이스라엘 중의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도 이 유대인 남성이 고쳐주셨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자기 백성 유대인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복음에 있어서 외인인 이방인이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선민사상에 젖어 이방인들을 멸시 여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한때 역사의 큰 획을 그었던 페르시아 인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가 작고 미약해 보이는 유대인 앞으로 나아와서 엎드려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린 데에는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귀신들린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린 딸은 일반 사람들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성경은 굳이 콕 집어 그 딸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음을 말씀하는데, 이를 통해 귀신의 영적 추악함 뿐만 아니라 그 귀신들린 딸의 상태역시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이 사랑하는 딸을 낫게 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안 해 보았겠는가? 아마도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소중한 딸을 낫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의 소문을 듣게 되는데, 유대인 예수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가 수많은 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한다는 그 큰 능력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여인에게는 이 소문은 곧 복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하여, 혹 멸시천대를 받는다 할지라도 ‘내 딸만 낫게할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 발 아래에 엎드린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찾아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는가?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의 선민사상 답게, 이방인들을 부정한 존재로 말씀하시며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종종 개와 같이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들개로서 썩은 시체들을 뜯어먹는 더러운 동물, 부정한 이미지로 여겨졌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사역 역시 먼저 자녀로 불려지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주어지고, 그 이후에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계획이자 법칙이었기 때문에, 만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규칙을 어기는 것과 같았다. 아주 사랑스러운 개가 있다 할지라도 자녀들과 같은 대접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 대신 개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아주 부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일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태생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던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 딸이 귀신에게 놓임을 받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자신과 자신의 딸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찾는 사람이 어느 민족이든, 어느 가문이든,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오직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내려 주신다. 시편103:8 말씀에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자들의 소리를 주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신다.
그렇기에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며 은혜를 간구하라.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은혜를 구하라.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여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형편일지라도, 심지어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라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개와 같이 부정한 존재’로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상처를 입고, 낙심을 하고, 좌절을 했는지 모른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멸시천대를 받을 것을 염두했었을 것이다. 힘들게 고민하며 주님을 찾아왔는데 그냥 거절도 아니라, 자신을 ‘개’, 유대교에서 말하는 부정한 존재로 말씀하시니 어찌 낙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주 비참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봤지만 딸을 고칠 수 없었다. 이제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한 취급, 부정한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굽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2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자.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드린다. 게다가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함으로서, 설령 유대교에서 말하는 ‘개’와 같이 부정한 이방인의 신분이지만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해결하실 분이 오직 주님 뿐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결코 주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했다. 어렵게 찾아온 그녀를 다시 빈손으로 돌려 보내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방금 함께 읽은 말씀과도 같이 ‘주님 맞습니다. 저는 개와 같이 부정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마저도 나를 외면하시면 나는 더 이상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 딸을 좀 긍휼히 여겨주십시요. 내 딸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능히 내 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주님께 있어서 이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내 딸을 고쳐주시는데에는 큰 능력, 큰 은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작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충분합니다. 작은 부스러기 은혜만 떨어져도 족할 줄 믿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은혜만 주셔도 능히 될 줄로 믿습니다. 제발 나와 내 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 외에 더 이상 아무런 소망조차 남지 않은 이 여인에게 주님은 그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주셨다. 은혜의 외인이던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다가가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소망조차 보이지 않는 때에도 주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이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닌가?
‘호레이시오 스패포드’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한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어릴 적 고열로 인하여 일찍 세상을 떠나고, 또한 살고 있던 동네에 전무후무한 대화재가 일어나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아내는 충격으로 병을 얻게 되었다. 또 네 명의 딸은 유럽으로 가던 중에 난파를 당하여 네 딸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패포드에게 남은 것은 중한 병을 앓고있는 아내 뿐이었다. 그 마저 아내 역시도 병색이 깊어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스패포드가 아내를 만나러 길을 가다가 네 딸이 묻힌 곳을 지나게 되며 너무나 그 인생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울부짖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고, 불행하며, 저주받은 인생과도 같은 그의 삶이 그의 유일한 소망으로 하나님만 주목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주시는 무한한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넘치는 위로와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감격이 물밀듯 밀려오자 그는 그 감동 가운데 한 시를 기록하게 되는데, 그 시의 제목은 “It is Well with my SOUL” 번역하면 “내 영혼 평안하다” 라는 시였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나 고난 등이 왜 없겠나? 한숨만 나오고 속이 뒤집어지는 일들이 왜 없겠나?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심지어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때에도 우리는 주님의 자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왜인가? 하나님께 그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면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상한 마음을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만이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게 하늘의 위로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고후1:4 말씀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는 말씀이 있다. 세상에서 위로를 받고자 할 때에는 고통과 번뇌가 더해가지만, 하나님께 받는 은혜는 헤아릴 수 없는 위로를 얻게 되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방금 불렀던 찬송과도 같이 큰 풍파로 무섭고 때로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저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장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평안할 수 있다.
인생의 험난한 인생 풍파를 지나가고 있는 분이 있는가? 뭔가 가슴 답답하고 밤에 잠 못 이룰 큰 일을 만난 분들이 있는가? 이래 저래 손을 쓰려 했지만 문제가 더 커져만 가고, 어떤 답도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 놓인 분들이 계신가? 절망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망이 끊어진 것이다. 소망이 단절된 것이다. 모든 희망의 끈들이 다 끊어지고, 어떠한 소망도 남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때에 변함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길 축원한다.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 있을지라도 여러분의 모든 소망을 주님께 올려드리라. 주님께서 여러분의 소망이 되어주실 것이다.
말씀을 맺는다.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늘상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늘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그리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주님을 신뢰하며, 어떠한 상황과 형편 중에서라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으라.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은혜 베푸신다. 주님의 은혜를 찾는 자들이 그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은혜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
또한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다. 여호와 라파! 주님께서 우리의 치료자가 되시겠다고 하셨다. 여호와닛시! 주님께서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 되시겠다고 하셨다. 여호와이레!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모든 것들을 예비하시겠다고 하셨다. 여호와샬롬! 주님께서 우리의 깨어지고 고장난 관계들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여호와삼마!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욱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여,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인생의 여러 풍랑과 고난 앞에서, 관계의 문제들과 갈등들, 내 안의 질병, 연약함과 죄성들로 인한 결과들을 마주하며, 이 모든 어려움들을 제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기억하며 겸손히 은혜 베푸시길 간청합니다. 우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붙드실 주님을 신뢰하며 간구합니다. 지금 낙심할만하고 실망할만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 베푸심을 사모하며 간구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어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의 부스러기 은혜만 주어져도 나의 모든 문제들이 능히 해결될 줄로 믿사오니 주여, 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마시옵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께 능치 못한 일이 없사오니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임하는 여러 문제들, 고난들, 괴로움들, 질병들을 감당할만한 능력 베푸시길 원합니다. 주의 보좌 앞에 머리숙인 모든 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어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나의 삶 가운데, 나의 문제들 가운데, 나의 가정 가운데, 나의 직장 가운데, 내가 속한 모든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비하신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