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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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4 1-18 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총 2번에 나눠서 말씀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1-7절 까지이고, 다음으로는 8-18절 까지 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14:1 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4:1 DKV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수의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됐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진행하게 돼죠. 그리고 1차 전도여행의 다섯 번째 도시인 이고니온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고니온에서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고니온에 오기 직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핍박을 당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고니온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고니온으로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많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해발 1,600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로마는 자신들의 나라를 점령하며 가장 먼저 도로를 냈기 때문에 그 도로를 이용하여 이고니온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600미터나되는 높이와 직선거리로 약 125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최근 제가 걷기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하루에 만보를 걸어보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플에 확인해 보니 만보를 걷는데 통상 2시간이 걸리며, 7.5km 정도 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감안해 본다면 125km의 거리는 성인 남자 걸음으로 약 33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럼 과연 단순히 박해를 피하기 위해 약 33시간의 시간을 투자하여 이고니온으로 향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로부터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맡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걷게 되었습니다.
이고니온은 부유한 도시이며 번영하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평야가 참 넓었습니다. 얼마나 넒었는지 그 평야에서 생산되는 밀로 터키 인구 전체의 식량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방으로 도로가 잘 나있어 교통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고니온은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인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박해를 또 한번의 복음의 확장을 기회로 삼으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기꺼이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에까지 달려가 복음의 씨앗을 심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4:1 DKV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수의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됐습니다.
오늘 한글 번역본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 보면, 카타 토 아우토(κατὰ τὸ αὐτο)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를 번역하면 ‘평소와 같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감안해서 다시 번역해 본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평소와 같이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했습니다.’로 번역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지역 대부분을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생활 뿐만 아니라 삶의 일부였습니다. BC 605년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면서 자신들의 성전을 잃어버리게 사건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만든 것이 바로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회당에서 기도하고 연구하며 함께 모여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을 전도하기에 적절한 곳이 바로 유대인의 회당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언제나 유대인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외에도 ‘세보메노이 (σεβόμενοι)’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 안식일에 함께 유대인과 예배하고, 유대인의 율법을 삶에 적용하며 유대인의 삶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대인의 회당안에서 그 지위가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유대인 회당에 있는 세보메노이 ‘(σεβόμενοι)’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지위가 상당히 불분명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 자신의 민족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민족 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회당안에 들어오면 그들을 막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좋은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주 배타적인 민족인 것입니다.
이는 회당을 세우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 민족의 배타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회당을 세우려고 한다면 유대인 남성 10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유대인 남성 9명과 여성 9만 9천 9백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의 회당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합니다. 이방인 또한 그 수가 얼마나 많던지 회당을 세우는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화와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긴 하지만, 그들이 차별받았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복음을 믿을 수 있는 특성을 바로 복음의 보편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누구라도 구별없이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리는 복음을 위해 모인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는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이라면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기능이며 교회가 지향해야 할 참된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4:2 DKV
그러나 믿기를 마다하는 유대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 형제들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믿기를 마다하는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모습들을 보며 이들은 위협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방어적으로 자신들의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동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절입니다.
사도행전 14:3 DKV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를 의지해 담대히 말씀을 전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주의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오히려 더 그곳에 머물며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또 그런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마음이 하나님께 향한 사람에게 그 능력을 더해 주시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음의 증거와 역사가 확연히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갔습니다. 4-5절입니다.
사도행전 14:4–5 DKV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 한쪽은 유대 사람들 편을, 다른 쪽은 사도들 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고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선동이 먹히지 않자, 기존의 유대인 쪽에 있던 사람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 심각성을 알게된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루스드라와 더배로 피신하게 됩니다. 7절입니다.
사도행전 14:6–7 DKV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루가오니아 지방에 속한 두 도시인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신해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다 또 죽을 위협에 처했고, 또 핍받을 받았지만 이것은 어떠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이 어떤 지역으로 가야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았는 지, 받지 않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명인 복음 전파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복음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이 세상 어느 것 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필요로 한 곳이라면 그들은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셔서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에 복음의 확장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바른 마음을 품고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견지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며,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른 마음을 품고,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참된 진리를 발견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안에 참된 자유가 있고,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만이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을 때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써내려져 왔습니다.
우리 모두 그 진리를 맛보기를 소망하며, 그 진리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누리기를 소망하십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질 만큼 큰 자유와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참된 진리의 힘으로 새로운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 갈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1- 4절)
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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