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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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views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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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생긴 핍박으로 인해 루스드라로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와 달리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 집니다. 이고니온에서는 핍박을 받았더라면, 루스드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영광을 받게 됩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유심히 보다가 그에게 치유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직선거리로 약 33km 떨어진 장소였습니다. 이곳은 앞서 살펴 본 이고니온처럼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약간 외진 곳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바울은 도시를 옮기면,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유대인들의 삶이고 문화였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릴 것 없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집합소 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전반을 살펴보면 그 유대인의 회당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루스드라에 구성원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앞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10명이 모이면 유대인의 회당을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당이 없다는 것은 이 지역의 종교가 유대교가 아니다 즉, 이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고니온에서 발생한 핍박을 통해서 이 외지고, 이방인들로만 구성된 루스드라에 복음을 전하기로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에게도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기로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이곳에는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 걸어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천적 하반신 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름발이는 바울의 이야기 즉,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안에 자신의 이 질병도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생긴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본 바울은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라고 명했고, 그 기적은 곧바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적은 단순히 앉은뱅이, 절름발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귀한 도구가 됩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황소들과 화환들을 성문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본 많은 루스드라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며 그들을 추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제우스라, 헤르메스라 부르며 그들을 신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기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앙하는 모습을 볼 때, 루스드라 사람들은 종교심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지식은 얕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종교심이 많고 지식이 많은 이들이었다면, 이 기적을 보고 비판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해석할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종교심이 많고 지식이 적은 사람들은 작은 이적과 기사에도 자신의 신앙의 전부를 내어 던집니다. 반면에 종교심은 없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주의 기적을 또 하나의 우연한 사건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무엇이 좋고 나쁘다가 아니라 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으면 복음이 흘러 들어가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앉은 뱅이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허락해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 앉은 뱅이는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앉은 뱅이 한 명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로, 발판으로 사용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역이 오직 주님께서 이끄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바울과 바나바가 투철한 사명정신과 대단한 믿음으로 이 사역의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진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 앞에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계획하시고 일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역 앞에 날마다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추종하는 루스드라의 사람들을 만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보통 유대 전통에서 옷을 찢는다는 것은 큰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거나, 때로는 열렬한 간청 또는 고백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단순히 그들에게 ‘그러면 안돼요.’라며 만류한게 아니라 루스드라의 사람들의 이런 행위를 보고 탄식하며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조금이라도 흑심을 품었다면 이렇게 까지 탄식하는 마음으로 만류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정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한 평생을 일관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여,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앞서 제우스 신당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우스 신당에서 드렸을 제사는 불보듯 뻔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제사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표상으로 그 신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들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욕망과 이기심의 표상인 헛된 우상들로부터 ‘마음을 돌이켜라, 하나님께로 돌아와라.’라고 간절히 외치며 참된 진리의 삶으로 그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영광 받을 수 있다는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간절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들이 가능했을까? 바로, 바울 자신이 그 헛된 것을 쫓았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한때는 유대교의 일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폭도요, 살인자였습니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산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상은 자기 의로움에 갇혀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를 맛보고 자신이 쥐고 있던 그 모든것이, 그 의로움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가 그의 가슴안에 스며들어, 그 어떤 것 보다 값진 것인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역자 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질 것임을 알고,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거짓교사의 자랑에도 위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보다 영원한 것,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것만이 가장 귀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영광보다 이땅에서의 영광을 더욱 값지게 여깁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땅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눈에서 사라지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 인간의 박수소리를 자신의 사명과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뒤에는 공허함과 외로움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과 영광만을 바라보며 산다면 참된 기쁨과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제멋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증언하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하늘에서 비를 내려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시고 넉넉한 양식을 공급해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런 말로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간신히 말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바울의 설교에서는 사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만이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자비를 베푸시고 때에 따라 열매를 맺으며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며 이방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다른 말로, 영적인 갈망을 말합니다. 대상이야 잘못되었지만 루스드라 사람들 안에는 신에 대한 열망과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무지로 인해 헛된 것을 바라며 종교적 활동을 했을 뿐이죠. 그런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부터 이미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허락하고 계셨다는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감동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바르게 전달되려면 그 복음은 순전해야 합니다. 복음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메세지에 오로지 주님의 마음만 참된 주님의 의도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참 진리를 더욱 깊이 맛보게 해달라는 간구와 동시에 나의 나됨을 내려 놓고, 다시 한번 더 나 자신을 꺾고, 나의 의와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다듬어진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흘려 보내실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복음만을 잘 전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놀라운 기적을 본 무리가 신이라며 제사하려고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14~17 절)
사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사람들의 인기나 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