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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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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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켜주시고,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능력과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말씀을 사모하여 주 앞에 나온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내일을 살아갈 새 힘 허락하여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대언할 때, 나의 연약함은 감추시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요나서 4장 1~11절입니다.
요나 4:1–11 NKRV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시간 “나의 정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어린이 동화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그 동화처럼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으실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까?
머리로는 답이 뭔지 아는데, 몸과 마음이 그 답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요나의 입장에 놓고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 속에 요나가 있고,
또한 요나가 우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겉으로 드러난 요나의 반응을 보면, 그는 지금 화가 나 있습니다.
요나서 4장 1절은 말합니다.
요나 4:1 NKRV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는 지금 하나님께 몹시 못마땅해 화가 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요나 4:2 NKRV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혹시 요나 선지자가 화난 이유를 찾으셨나요?
요나가 화난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화를 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신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올바른 신학이 왜 도리어 그를 화나게 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자신의 조상들이 진멸당할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지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혼인 서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신랑, 이스라엘이 신부가 되었다는 것을 선서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 서약이 끝나고, 모세는 시내산으로 들어가
십계명을 비롯한 성소와 성막에 관한 규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백성들이 아론을 찾아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으로 선포하더니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부가 바람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본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모세에게 이 백성을 진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버리시려거든 자신의 이름을 먼저
여호와의 책에서 지워달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용서해주시며,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 것이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출애굽기 34:6 NKRV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바로 오늘 본문 2절에서 요나가 고백했던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출애굽기 34장 6절에 근거를 둔 고백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 성품 덕분의 자신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죽을 뻔하다가
간신히 살아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살린 이 성품으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전에 니느웨에 가지 않겠다고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설득으로 다시 니느웨로 향했고,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예상대로 되었다며 화를 내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요나는 아주 완강합니다.
요나 4:3 NKRV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니느웨를 용서하실 거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합니다.
모세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거든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는데,
요나는 니느웨를 용서하실 거면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끝까지 버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거면,
차라리 그 재앙을 자신에게 내리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와 자기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하나님께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죽어도 니느웨와는 같은 하늘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절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반항이 5절에서 계속 나옵니다.
요나 4:5 NKRV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달한 후,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봅니다.
니느웨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재앙이 떨어지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의 머리 위로 박넝쿨이 자라게 하셔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는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신 하나님의 호의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다음 날에는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어
그늘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게다가 뜨거운 태양 볕에 더위를 먹어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나는 다시한번 죽여달라고 떼를 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이 박넝쿨도 네가 이렇게 아끼는데 나 여호와가 니느웨에 있는 십이만여 명과
가축의 생명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잘 알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뜻에 반항했을까요?
그것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적이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앗수르의 포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점령국에게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니느웨를 벌하지 않으신 것을 보고,
거듭 분노하며 억울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많으셔도 이런 악한 나라까지 용서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아주 오래된 작품인데, 내용면에서 그리고 작품성으로도 유명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태권도 관장을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찾아갔는데, 그 관장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주인공 신애는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자식 잃은 아픔에 몸서리치고 있는데,
어떻게 가해자가 자기보다 먼저 평안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요나의 분노도 이와 결이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용서할 수 있어도, 요나 자신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만큼 따뜻한 말이 없을텐데...
그것이 요나와 신애에게는 죽음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가 법의 응징을 받지 않는다면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습니까?
이제 다른 각도에서 요나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나의 분노 이면에는 ‘정의’ 실현과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 존재합니다.
요나는 정의를 사랑한 선지자였습니다.
요나를 단순히 적국에 대한 미움과
원한의 감정에 매몰된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니느웨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해서라도
그 정의를 실현해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풍랑을 만났을 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니느웨에 하나님의 정의 심판이 실현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고자 하는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다시 한 번 강력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요나에게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회개를 위한 예언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고 했고,
혹시나 그 경고를 듣고 돌이키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나올까봐 우려했습니다.
그런데 잔인하게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자마자
왕과 함께 회개 운동에 동참한 것입니다.
요나에게 그 장면은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한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40일이 지났는데 니느웨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그 한 번의 회개로, 그동안 니느웨가 범한 모든 불의와 악행이
모두 용서된다는 사실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를 아시나요?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는 도구로,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신다는 것에 분노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박국 1:13 NKRV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요나와 하박국 선지자가 보기에 하나님의 방법은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데,
더 악한 나라와 민족을 용서하시거나, 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저항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이 방법은 절대 옳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정의의 하나님이 정의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데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 하나님의 선교는 경계가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반면에 요나에게는 인간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의 관점에서밖에 볼 수 없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의는 자신들에게 적용된 기준이
왜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집나간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며
시기 질투하는 형과 같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원수였지만, 하나님에게는 똑같은 자녀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해, 방황중인 안타까운 영혼였습니다.
그런 동생 탕자를 찾아오라고 형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심지어 요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원래 그런 분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했을까요?
왜 그 성품을 소유하지 못하고, 삶에 적용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보다 자신의 정의가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포악한 니느웨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성에 있는 생명을 보십니다.
그들을 멸하기로 계획을 세우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그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한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축의 생명까지도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정의는 이런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는
불의를 향한 처벌과 죽음이 우선이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처벌보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더 높은 차원의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곧, 온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즉,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의 경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들만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경계를 넘어
열방을 향해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어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바랬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요나가 자신은 선민이고, 저들은 악한 민족이기 때문에 멸망받아야 된다는
선민사상의 경계를 만들기 이전에,
남을 속이며 늘 비겁하게 도망치는 보잘 것 없던 야곱의 경계를 넘어
선민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요나가 선민 이스라엘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경계를 넘어 그들 가운데 들어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요나의 정의도, 세상 그 어떤 공정함도 무시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늘 경계를 넘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 할 때, 베드로는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큰 자가 섬김을 받고, 작은 자가 섬겨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경계를 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NKRV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생명의 경계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무 죄가 없으신 독생자가 죄인의 길과 사망의 경계를 지나가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전히 다 이루어졌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렇게 십자가 죽음의 경계를 지나셧기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우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이고 조종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옳다고 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집과 편견, 내 삶의 방식과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아무리 옳은 신념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의, 헌신, 충성조차 하나님을 조종하려 한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오늘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땅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임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나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저에게도 최근에 저의 정의를 많이 허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저는 어떤 사람 같나요?
저는 대략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사역지를 거치면서 많은 검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검증과 칭찬은 그토록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에 대한 순수함과 열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요행을 피우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 생각하며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는 늘 또다른 정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것은 노력한 것에 대한 정직한 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인정과 격려,
그리고다음사역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물론 사역에 대한 순수함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이고, 남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에게는 단지 내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고, 순수한 열정으로 했으며,
그렇게 했기 때문에 결과가 이렇게 좋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많은분들이 아시겠지만, 제가 많이 바빠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쌓여있는 일을 쳐내느라 보상 받을 틈이 없었습니다.
늘 방송실에 있고, 늘 책상에만 앉아 있으니 평가받을 틈이 없었습니다.
밥을 사주신다는 분들도 계셨는데,
식사약속을 잡으면 2시간을 써야된다는 생각에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솔직히 처음 1~2주는 신났습니다.
많은 일을 해내고, 많은 보상을 받을 생각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상없이 수많은 노력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거 아닌데요.
저는 많이 힘들지 않아요. 할만해요. 더 할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이렇게 그냥 지나가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요즘 사역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어요.
MZ 세대들이 목회 안하려고 해요.
하나님 이거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나의 정의를 내세우며 교회를 평가하고
하나님께 따지는 MZ 목회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저는 MZ세대를 이해하지만, 제가 MZ세대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제 안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20대 중반에 처음 전도사를 시작할 때는,
존경하는 목사님들의 이런 멘트에 늘 감동받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잠은 죽어서 평생 잘 수 있다.”
“목회자가 출퇴근이 어디있나. 24시간 근무지.”
“사명이 있는 자는 절대 죽지 않는다.”
늘 머릿속에 되뇌이면서 인생의 좌우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약해지니깐,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나의 정의에 사로잡혀 어느순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하나님께서 함께 걷고 계신데.
여기에 무슨 정의와 논리가 필요합니까?
사실 많이 바쁜 것 같지만 숨을 못쉴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일들이 빠르게 잘 풀렸습니다.
돌아보니 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 1년이 안되어서 처음해보는 일들이 다반사인데,
그때마다 마땅한 자료들이 잘 찾아지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고,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곳곳에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미 내 삶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서 걷고 있는 이 길 위에서
어떤 것이 정의인지 따지는 것부터 이미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한다면
내 뜻, 내 생각과 다르지만, 때로는 답답하고 남들보다 느린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 길이 헛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주간 이 찬양이 계속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와 함께 가자.
네가 연약해도 나와 함께 가는 이 시간이 나에겐 힘이 된다.
내 생각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도 조금만 기다려주겠니.
나의 열심으로 너와 함께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러니 너에게 이 땅을 부탁한다. 이 영혼을 부탁한다.
<찬양 - 하나님의 열심>
기도제목
나의 뜻, 나의 정의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게 해주세요.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해주세요. 비록 세상과 다른 방법이지만,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지만, 끝까지 신뢰하게 해주세요.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열심으로 내 삶에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통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그 영혼이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방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나의 정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온전히 이루어 주시옵소서.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모든 사역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세상과 다를지라도, 내 뜻과 계획, 내 생각과 방법, 내 기대와 다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내게 주시옵소서.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그 원수가 나로인해 구원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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