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1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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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받는 구원
믿음으로 받는 구원
우리 하임 공동체 모든 친구들! 함께 27차 하임캠프로 모이게 되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다들 귀한 시간을 내어 이렇게 캠프에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너무 고맙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3일간의 캠프 시간을 통해 정말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넘치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다들 우리 캠프의 주제가 뭔지 아시나요? 바로 그 누가 끊으리요 입니다. 바로 로마서 팔장에 등장하는 말씀인데요, 이번 주제말씀인 만큼, 우리 친구들이 로마서를 열심히 읽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읽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필사도 함께했을테니, 아마 우리 친구들에게 로마서가 이제는 그리 먼 말씀이 아닐 거에요.
자, 그럼 다들 말씀을 잘 읽었을테니까, 이 로마서 말씀을 읽고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요? 많이 어려울 수도 있고, 낯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로마서의 말씀은 물론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제 개인적으로 이 로마서 말씀에서 가장 핵심되는 구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이 한구절의 말씀일 것 같아요.
우리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네. 이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짐, 즉 이신칭의라는 개념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개념을 이 말씀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박국 이장 사절, 히브리서 십장 삼십팔절 등등 여러 부분에서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오늘의 말씀이 가장 유명하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낸 어떤 한 인물의 삶을 바꾸어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물이 누구냐, 바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마틴 루터라는 인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로마서 일장 십칠절은 그 말씀 자체로도 너무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적으로도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친 그러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앞으로 여러분들이 로마서를 함께 볼 것이기 때문에, 그에 앞서 이 로마서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우리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피기 전에, 우리는 이 말씀이 어떤 연유에서 기록된 것인지를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이전에 제가 하늘고에서는 한번 말씀을 나누었었지만, 이 로마서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씀들이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당연히 어떤 상황과 그에 따른 목적이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로마서 역시도 마찬가지인데요, 로마서의 수신자들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는 어떤 상황이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로마 교회 성도들과 같은 이방 성도들과 유대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쟁은 바로 율법을 놓고 이루어진 분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본인들이 살아왔던 것처럼, 구원을 얻는 것에 있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더해 율법이 필수적이라고 여겼고,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할례를 행하는 것부터 해서 여러가지에 충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충돌과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말씀을 따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율법 준수를 끔찍히 고수하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하셨기 때문에 마치 율법 자체가 굳이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키신 분이셨습니다. 그의 모든 삶은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향한 선지자들의 예언까지도 다 이루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말씀대로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말씀을 지키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씀을 귀히 여기고 지키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국 아시나요?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이요.
다윗과 솔로몬의 엄청 강력했던 이스라엘 나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져 결국에는 수많은 왕과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죠.
그 이후 이스라엘 나라가 있던 지역에는 수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이방 민족들이 섞여들어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남유다에서는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포로들이 겨우 돌아오긴 했지만, 이전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말씀을 잘 지켰을까요? 아니겠죠. 학사 에스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말씀은 잘 지켜지지 못했고, 이후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에 의해 다시금 이스라엘 지역이 점령당하면서 이전처럼 말씀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보기가 어려워졌죠.
그렇게 여러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말씀을 들고 모든 백성이 말씀을 지키는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외친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말씀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 여러 지켜야 할 행위들을 붙여넣게 되었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일을 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행동을 자제해야 하는, 이렇게 모든 율법에 여러 행동수칙들을 제정해 지키도록 한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말씀 회복을 외쳤기 때문에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과한 모습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 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을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어떻게 일하지 않을까만을 생각하는 모습들이 있게 된 것이죠.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잘못된 준수를 꾸짖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 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말씀을 어떻게든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임을 말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이신칭의의 말씀은 여러 이방인들을 주님의 길로 인도했고, 결국 동방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로마라는 큰 제국의 종교가 되어, 결국 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종교로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중세였죠. 중세시기 기독교는 모든 유럽민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 아이가 크면 교회에서 신부님의 집례로 결혼을 하며, 연로하여 죽게 되면, 신부님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즉 교회는 모든 백성들에게 당연한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랬다는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거대해지고, 그 힘 또한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자 초대교회시기 서로 나누고 헌신하던 교회의 모습은 점차 그 자체가 권력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수평적인 모습이 아니라, 점차 말씀은 뒤로 밀려나고 성도들은 아래로, 성직자들과 교회 조직은 위로 향하는 수직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죠.
성직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이것이 말씀이다’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권위로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한 중세의 시기가 계속되자 중세 말에는 교회가 부패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성경책 한줄조차 읽지 못한 채, 신부가 말하는 대로만 순종하며 따르고, 부패한 신부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게 됩니다.
그 모습이 수면위로 드러난 것이 바로 면죄부였죠.
당시 교회의 대표인 교황의 숙원 사업이었던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돈으로 죄를 면해줄 면죄부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받는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말씀이 사라지고, 구원은 교회를 통한 행위로 받는 것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나고 만 것이죠.
하지만 성도들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삶 자체가 교회였기에, 교회를 통해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하는 수많은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많은 이들이 면죄부를 구매하게 됩니다.
그때 교회 신부 중 한 명이었던 루터를 깨운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이었습니다.
위대한 기독교 학자 중 한 명인 R.C. 스프로울은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전까지 모든 신부들은 이 말씀을 라틴어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라틴어 성경이었기 때문이죠.
그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각 성도들을 교회에서 성례와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의롭게 만드신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면서 실제로 이 사람이 의롭게 변화한다고 여겼던 것이죠.
하지만 루터는 그 말씀은 바울이 사용했던 헬라어로 읽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그 부분은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게 여겨준다, 의롭다고 선포해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행동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의롭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이죠.
우리의 어떤 교회에서 행동한 것들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신 것임을 루터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루터의 눈앞에 당시 중세 교회의 잘못된 행동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잘못된 교회의 행동들을 95가지로 기록하여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 붙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트리거 역할을 한 95개조 반박문입니다.
이 종교개혁을 통해 부패한 중세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 교회는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말씀을 주기 위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수직적인 교회의 제도 역시도, 이전과 같은 수평적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루터를 비롯하여 칼빈, 츠빙글리와 같은 여러 종교개혁가들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노력을 통해 지금의 개신교 교회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도 구원을 받기 위해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는 이러한 잘못된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 하나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로마서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이 말씀이 귀한 이유입니다.
이제 앞으로 함께할 캠프의 시간들을 통해서, 이 말씀이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지,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함께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신앙을 만들어준 이 말씀이 너무나도 귀함을 우리가 깨달았으니, 이 말씀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앞으로의 캠프 기간동안 이 로마서 말씀에 깊이 빠져서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함께 앞서 찬양했던 입례 찬양 부르면서 이 귀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다리며 그 은혜를 누리겠다고 고백하겠습니다.
1. 말씀을 놓고
2. 앞으로의 캠프를 놓고
3. 우리의 변화됨을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