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내 삶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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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내 삶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론]
모든 사람의 삶에는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의 패턴을 정해놓고 반복하는 것을 매우 편하게 느낍니다.
한 예로 지금 우리가 앉은 예배의 자리를 보십시오.
매번 같은 곳에 같은 사람이 앉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죠.
저도 자주 가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앉았던 자리만 꼭 앉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때부터 방황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자리에 앉아볼까, 아니면 나가서 다른 카페로 갈까, 그 자리가 날때까지 기다릴까?
온갖 생각들 속에서 방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생각과 삶의 태도에도 이런 습관과 패턴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론 이런 습관의 틀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꼭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안주하게 되어 새로운 것을 밀어내는 고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고의 틀이 고정되면 다른 사고의 틀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순간 소위 ‘빠’수준이 되면 그때는 이성과 논리가 마비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고의 틀에 빠져 그것에 익숙해지면 거기에서 벗어나는게 굉장히 힘듭니다.
이단, 사이비에서 벗어나는게 힘든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저도 영국에서 유학할때 이전에 가지고 있던 신학적 사고의 틀때문에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생각과 태도의 틀이 있을까요?
특히 현재 삶에 아무런 고난이 없고 평안하면 내 삶이 괜찮다고 착각할때가 많습니다.
그때 거짓 안정감이 삶에 깊이 파고들게 됩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틀은 무엇입니까?
삶의 거짓 안정감을 주는 생각의 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익숙한 자리를 흔들어 우리가 그것을 깨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깨뜨려야할 나의 익숙한 자리는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지난주에 예레미야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왜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좀 바꿔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왜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을까?’
오늘 말씀 4-7절을 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돌아오다’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찾아보니 예레미야서에만 이 단어가 무려 111회나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 66권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많이 등장하는 곳이 시편인데 76회입니다.
그만큼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이 가장 하고싶으신 말씀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지금이라도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돌아오다’는 단어는 회개를 의미하는 ‘슈브’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방향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회개는 감정적인 의미의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내 삶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망나니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신대도 유산을 미리 받아 다른 나라로 가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립니다.
그 후 빈털털이가 되자 갑자기 아버지께 돌아갈 마음을 먹습니다.
그때 그가 집으로 돌아간 것은 단지 자신의 몸뚱어리가 아닙니다.
그가 돌아간 것은 자신의 집이 아닙니다.
그가 돌아간 것은 아버지의 품입니다.
결국 그가 돌이킨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란 익숙한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다 백성들은 한사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첫째, 맹목적인 고집때문입니다.
4-5절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징계를 내리셔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인간의 이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게 되어 있습니다.
넘어졌는데 계속 넘어져 있다면 비정상인 사람입니다.
또한 길을 가다가 잘못 들어서면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려줬는데도 계속 그 길을 가려 한다면 이상한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잘못되면 다시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에게는 이런 인간의 이치가 먹히질 않습니다.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고 계속 알려주는데도 다시 돌이키지 않습니다.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행동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5절은 그들이 거짓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맹목적인 고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맹목적인 고집은 굉장히 꺾기 어렵습니다.
말그대로 논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는 맹목적인 고집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러한 고집을 꺾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삶의 진실을 마주하고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런 맹목적인 고집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깁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현재 삶의 태도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내어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 자기 삶의 진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굉장히 힘든 과정입니다.
내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던 묵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회개를 나를 죽이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재 삶에 대한 내 생각과 태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변화되고 싶은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반복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6-7절입니다.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
유다 백성들은 정말 열심히 예배를 드립니다.
더 많은 예물, 더 좋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 삶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에 빠져있으면서도 약간의 후회만 할뿐입니다.
예배때 와서 하나님께 형식적인 회개로 그칠 뿐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인격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보시기에 예배는 실패한 것이고, 예배때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유다 백성들을 달리는 군마에 비유하십니다.
전쟁터의 말은 앞만 보고 달립니다.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립니다.
유대 백성들이 마치 멸망을 향해 내달리는 군마와 같습니다.
잘못된 방향의 열심은 결국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 버립니다.
계속 앞으로가면 죽음 밖에 기다릴게 없는데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백성들이 너무 한심하고 안타까워 예레미야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랬더니 학도 보이고, 비둘기도 보이고, 제비와 두루미도 보입니다.
그들은 짐승인데도 모두 자기가 돌아와야 할 때를 압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짐승들은 아무도 안 가르쳐줘도 돌아올 때를 아는데 유다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징계를 하는데도 그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게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치에도 어긋나고, 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일을 유다 백성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이런 맹목적인 고집을 갖게 되었을 까요?
둘째,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8-9절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공포에 떨며 붙잡혀 갈 것이다. 그들이 주의 말을 거절하였으니, 이제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다고 하겠느냐?
당시 지혜자들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본래 의미를 놓치고 그 율법의 형식과 교리만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꿔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율법의 형식과 문자를 지키는데만 집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아무리 하나님의 실제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알면서도 실제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대립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본래 뜻을 행하시는데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목적은 무시한채 율법이 정한 형식과 문자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율법도 지킵니다.
그러나 예배와 율법의 궁극적 목표인 삶의 변화는 놓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이 정한 안식일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안식일의 본래 목적인 사람은 하찮게 여기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담당하던 한 친구의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그 날이 주일날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의 리더 였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야할까? 아니면 주일예배를 드려야 할까?
주일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라고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그 친구는 아버지 병원에 가지 않았고, 교회에 가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습니다.
대신 예배시간, 교제 시간에 아버지를 회복시켜달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과연 이 친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요?
예배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까요?
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하나님께 예배만 드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러므로 주일예배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쓰러진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배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저지른 또다른 죄가 있습니다.
10절 중반부터 12절입니다.
힘있는 자든 힘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그들이 그렇게 역겨운 일들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천만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들이 했던 거짓말은 예배만 열심히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예물 열심히 드리고, 봉사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신앙을 종교생활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굉장히 느리고 지루한 과정입니다.
일종의 자기를 죽이는 과정입니다.
반면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은 눈에 잘 띄고 효과적 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이런 종교적 의식에만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더 많은 예물을 가져오게 만들까 고민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예물을 바치면 더 많이 축복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마음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괜찮다며 백성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성전이 있고, 율법이 있으니 절대로 망할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때문에 백성들은 잘못된 확신을 가져 주님께 돌아갈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행위는 마치 돌팔이 의사와 같습니다.
암걸린 사람에게 파스 붙여주며 괜찮아질거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진단도 실패했고, 처방도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지혜와 능력도 없는 종교 사기꾼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몇몇 목회자들은 교회 예배당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속입니다.
성전 신앙은 유대교 신앙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성전이며, 믿는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럼 목회자들이 왜 교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성도들을 교회에 더 헌신하게 만들려는 욕심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잘하는 것이 복받는 비결이라고 가르칩니다.
예배 빼먹지 않고,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하면 복받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럼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돌아오지 않고 맹목적인 고집을 부린 결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3절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의 모든 풍요와 번영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땅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저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맹목적인 고집을 부린 결과입니다.
14-16절은 뒤늦은 백성들의 후회를 보여줍니다.
멸망할 때가 되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피신할테지만 그 성읍도 안전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기에 어느 누구도 피할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죄악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물에 독을 타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적들은 성을 둘러싸고 나면 물에 독을 타서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러면 물을 안 마셔도 목말라 죽고, 마셔도 독으로 죽게 됩니다.
마치 그들의 신세가 주님의 심판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거짓 가르침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5절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평화는 멸망으로 바뀌었고, 상처 낫기를 바랬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속아 주님께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돌팔이 의사에게 속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7절은 또다른 표현으로 그들의 후회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해독제가 없는 독사에게 물린 것처럼 죽음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무슨 방법으로도 막을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한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짓 안정감일 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안전 지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익숙한 내 삶과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폴투르니에는 자신의 유명한 책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험이야말로 첫걸음을 떼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고의 습관과 기존 관습의 구속을 벗어나는 첫번째 발걸음을
떼어놓으면, 자신을 던지고 배수진을 치는 데서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수 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내 삶을 거는 모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는 그 모험의 시작입니다.
회개는 내 삶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던 그 묵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겠다는 결단입니다.
내 삶의 묵은 자리, 내 생각의 묵은 자리, 내 태도의 묵은 자리, 내 습관의 묵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용기입니다.
그런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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