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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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배소서 강해7-1
지금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강건케 할 때(엡3:14-19)
에배소는 로마 제묵의 세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 에배소의 인구는 대략 25만명 정도입니다. 이 에배소에는 유명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데미 여신상이 있고, 또 하는 두란노 서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 이방 신상의 대표격인 아데미 여신상이 있었고,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학습의 전당인 두란노 서원이 이 바로 에배소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이 에배소에 대한 영적인 공격, 영적인 싸움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소아시아의 7교회 가운데 바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에배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연구하다보니까 바울이 기도할 때 성경은 그 자세를 특히 주목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절을 함께 읽어보겟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유대인들은 대부분 서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정말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 그들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에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민족의 죄악을 회개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이 에배소 교인들을 향해 도대체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요? 당대 최고의 목회자였고, 최고의 석학이었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동시에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감정이 아니라 점감이 변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바뀌길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겉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하는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3년을 넘게 개척하면서 교회를 세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서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엡3: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이 간절하게 3년 동안이나 목회했던 에배소 교인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강건케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겉모습만 자꾸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을 가꾸고, 속사람을 강건케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때 겉사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대최고의 학부였던 가말리에 출신이었고, 베냐민 지파였으며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게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면서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모습이 다 가 아니라 더 중요한 속사람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죠? 구체적으로 어떻게하면 속사람을 강건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울은 에배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너희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며...영어에 보니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성령을 통한 그분의 힘과 함께, 다시 말하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강컨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 가지를 알았습니다. 첫째,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는 다른 것이 아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신앙 감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핵심은 우리의 신앙은 감정의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감정은 두 개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모션(감정)이라는 요소이고, 또 하는 어펙션(정감)이라는 요소입니다. 감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느낌,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펙션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애척과 애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수련회, 부흥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눈물도 흘립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터치를 받은 것이지, 정감에 터치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길 합니다. 그럼 정감은 뭐냐?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애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 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우상이 여기에 존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번, 기도하고 말씀 들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전적인 능력이 임할때, 우리의 감정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감이 바뀌는 역사가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우상이 깨어지고, 우상에 기대에 있던 우리의 애착과 애정이 깨어지고, 우리가 드디어 주님만 의지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으 ㅣ단순한 감정을 넘어 여러분의 어펙션, 정감이 바뀌어 지면, 여러분의 겉사람 뿐만 아니라 속사람이 바뀌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뿌리 내리는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또 한 번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엡3:17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자 말씀에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는 여기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말씀이 좀 잘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에베소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아 아닌데 왜 이런 기도를 했을까? 묵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성도들이고 바울이 3년이나 마음을 다해 목회한 성도들인데, 왜 이렇게 기도했을까? 이게 참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단어를 연구하다보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거한다는 단어는 주로 두 단어가 쓰입니다. 하나는 ‘파로이케오’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카토이케오’라는 단어입니다. 파로이케오: 일시적으로 단시간 거하는 것이다. 나그네처럼 일시적으로 잠시 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카오이케오: 정착하여 계속해서 상주하는 것이다. 마치 완전히 주인이 되어 그 집에 사는 것을 말할 때 카토이케오를 쓰게 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은 바로 카토이케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기도한 것은 예수님이 일시적으로만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보좌에 들어오셔서 내 마음에 주인이 되어 완전히 거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예수님을 믿는게 아니구나, 교회 열심히 나온다고 해서 다 예수 믿는게 아니구나...내 마음의 보좌에 주님아닌 다른 것들이 얼마든지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고 난후,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얼마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터가 굳어지고 단단해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동탄에 개척을 왔을때, 여기 시가지에 이렇게 나무들이 엄청 크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도시지만, 조경을 정말 잘했다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난 후, 태풍이 한번 쏵 지나갔는데, 나무들이 쪼르르 누워있었습니다. 이유는 보니까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겉은 멀쩍하고 잎도 무성하고 키도 엄청 큰데,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는 뿌리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얼마나 뿌리가 튼튼한가? 신앙생활의 터가 얼마나 견고한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뿌리 내리는 신앙을 위해서 5가지의 뿌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한 뿌리입니다. 주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그물을 말씀에 의지해서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에 대한 뿌리입니다.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도의 뿌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셋째, 관계에 대한 뿌리입니다. 몸이 성장해야 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관계와 교제를 통한 성장의 뿌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 예배의 뿌리입니다. 온전한 주일성수, 온전한 예배의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다섯째, 가정에 대한 뿌리입니다. 가정이 잘 서야 나도 내 자녀도 잘 세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교회가 너무 빨리 꽃을 피우기 위해서 달려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중요한 것은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리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교육, 제자훈련, 성경공부는 잘 되고 있는가? 제자훈련을 통한 새로운 리더들이 배출되고 있는가? 성도님들은 신앙의 뿌리를 잘내리고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다음 세대가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가? 내 남편과 내 아내는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가? 이번 한 주간, 이런 가정과 목장, 교회의 뿌리를 점검하는 복된 시간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주님과의 실제적인 동행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에배소 성도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또 하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되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엡3:18-19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에 보면 안다라는 의미가 두 개가 쓰였습니다. 18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노나이’ 또 하나는 19절에 깨달아라는 단어인데, ‘카탈라베스다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두 단어는 발음은 다르지만 둘 다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마음으로 붙잡다, 객관적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냥 객관적으로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마음으로, 경험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 중의 하나는 바로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하게 기도하고, 익숙하게 설교하고, 익숙하게 예배하는 것만큼 우리를 무섭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에배소의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알까? 아니 정말 예수님과의 동행이 있을까?
제가 사역하면서 깨닫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완전히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알아가는 참 귀한 시간을 제공했던 것이 바로 예수 동행일기입니다. 지금도 계속 쓰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그 내용 가운데 저는 이 부분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안에 사는 이가 누구냐?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였을때,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매우 드문일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복음을 알지만,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모습들이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시다는 복음을 알고 있지만, 그 주님이 오늘 나와 실제적으로 동행하고 계신다, 그 주님과의 실제적인 동행을 놓치고 있을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2년 반을 쓰면서 제 인생 가운데 정말 많이 달라진 부분이, 제가 10년을 넘게 신학을 했지만, 그보다 지금이 더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나는 집사로서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목자로서, 성도로서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한 집사님의 간증이 참 저에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지난 날에 다가왔던 일과 같은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아파트에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군인 아파트라거 작은 관리비만 내고 있는 좋은 형편입니다. 그런데 당장 나가게 되면 보증금도 얼마 없어서 원룸 아니면 저렴한 투룸에 월세를 내며 살아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이 상황을 애기해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계시잖아하고 말했습니다. 아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방을 알아보며 신가했습니다. 정말 걱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먹고사는 문제로 작년에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믿음이나마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햇고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잘 넘겼습니다.
지금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지만,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니 조금은 온전하여 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제게는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주님을 바라보는 기적을 많이 사람이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눈을 열어 보고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 우리 하나님게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하기 원하실까요? 우리의 감정이 아닌 정감, 우리의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변화되길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우상이 자리잡는 그 정감이 변화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내려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과의 동행이 뿌리 내기리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 그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