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술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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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재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가운데 나아와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며 나아갑니다. 이 시간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오늘 올려드린 찬양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간구함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 하나님 함께하셔서 위로하여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셔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감사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옆에 계신 성도님들과 이렇게 인사하시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옷과 장식’이라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옷은 우리에게 어떤 기능적인 것을 제공해줍니다. 추울때 껴입어서 추운 것을 막을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또 옷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개성이나 어떤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사람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같은 것도 알 수 있는게 바로 옷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면 의사일 것이고 방화복을 입고 있으면 소방관일 것이고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겠죠. 또 검은 정장과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으면 장례식에 가거나 다녀왔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도 있죠. 옷은 이러한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옷에 다는 장식들은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더욱더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넥타이는 원래 30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의 군인들이 두른 목수건, 크라바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크라바트라는 목 수건은 계급장도 겸했다고 합니다. 색이나 무늬, 장식에 따라 지위 고하를 판단하는 역할을 한 것이죠. 정확히는 넥타이에 달려있는 핀이 계급장 역할을 하였고, 넥타이 색은 부대마크같은 것을 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크라바트를 보고 파리 시민들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본 소년왕 루이 14세가 그것을 목에 둘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프랑스 귀족 패션의 일부가 되었고 이는 모든 목에 두르는 천 그러니까 스카프, 머플러 등의 시초가 되었고 여러 가지 타이가 개발 된 후에는 남성 정장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되었죠. 그래서 이 넥타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필수로 착용해야하는 아이템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사무 직종이나 교복, 제복 등의 유니폼에 기본적으로 포함됩니다. 넥타이 말고도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는 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결혼한 사람이 있거나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옷이나 옷의 장식들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것만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닌 특징과 상징성들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데 사용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이러한 상징성들이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경의 율법들 중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의 삶과 완전히 구분된 삶을 살도록,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구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별된 거룩한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가봐도 한눈에 유대인이어야만 했습니다.
일단은 유대인들은 레위기 11 장에 나오는 음식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음식법을 대강 살펴보자면 일단 피는 먹을 수 없었고, 포유류 고기는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것만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낙타나 토끼 같은건 새김질을 하는데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이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는데 새김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먹지 못했습니다. 조류는 독수리같은 맹금류는 제외하고 모두 먹을 수 있었고, 해산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곤충은 뭐 거의 못먹긴 했는데 베짱이, 메뚜기, 귀뚜라미, 팥중이 류에 한해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도축하는 방식도 피가 고기에 스며들지 않도록 해야했구요. 제물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어서도 안됐습니다. 의식주에서 식에 대한 부분에서 굉장히 까다로웠습니다.
식이외에 앞에 이야기하던 의, 옷에 대해서도 규례가 있었습니다. 레위기 19:19 제가 읽겠습니다.
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짠 옷을 입으면 안됐습니다. 요즘 저희가 입는 옷들은 두 가지 재료를 쓴 옷들이 너무 많죠. 그냥 티만 해도 순면으로 되어 있는 옷이 있는가 하면 폴리에스터가 섞인 옷들도 있고 기능성 티들도 있고 여러 가지 혼합해서 옷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옷은 입을 수가 없었어요. 입는 옷에 대해서도 규율이 아주 빡빡했습니다. 그들은 입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고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옷에 다는 장식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 살기 위한 규례를 옷의 장식에도 적용하신 것이죠.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의 끝단에 술을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찌찌트라고 불리는 옷술의 색깔은 저희가 읽은 본문인 개역개정에서는 청색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색의 히브리어 단어인 트켈레트는 구약 성경에서 청색으로 쓰이기도 하고 자색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비슷한 색깔이고 어찌보면 다른 색깔이 같은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마다 청색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자색, 자주색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청색이냐 자색이냐 보다 그 색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일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다루고 있는 미드라쉬에서 청색은 푸른 바다를 나타내고, 바다는 하늘을 말하고, 하늘은 영광의 보좌를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색 실을 두를 것을 말하고 있죠. 또 이 트켈레트라는 단어는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색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이 실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 이제 이 법궤를 덮어야 했는데, 먼저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나서 트켈레트를 순청색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순청색으로 된 보자기를 덮어서 채를 꿴 뒤에 옮기도록 하셨습니다. 또 성막의 휘장, 가장 중요한 장소였던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그 휘장을 이 색깔이 있게 해서 짜야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옷은 이 색깔로 해야했습니다. 출애굽기 28:31 에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자주색, 자색은 성경에서 왕과 귀한 사람을 상징하는 색깔로 자주 등장합니다. 다니엘에게 벨사살왕이 약속한 것도 자주색 옷을 입혀준다는 것이었구요.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 때, 조롱하는 의미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 입혔던 옷도 바로 자주색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색, 자색 실은 왕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의 옷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인 법궤와 지성소의 휘장이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보면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임재하여 계심을 나타내는 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의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혹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리고 광야 생활 동안 이동하면서 하나님의 그 법궤를 볼때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색이 이스라엘 백성의 옷술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한 메시지는 그냥 단지 이쁜 색으로 너희 옷들을 장식해라가 아니었습니다. 너희 옷은 재료 하나만 써서 밋밋하니까 이런거 줄게가 아니에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단지 제의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만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내가 그분의 백성됨을 인지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왕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이 옷에 단 술을 보면서 내가 준 계명을 기억하여서 그것을 따라 행하고 너희로 하여금 음란하게 따르도록 만드는 너희의 마음과 너희의 눈을 따라 방황하지 않고,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함으로써 내 앞에서 거룩하게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디니다. 이 전에 있었던 사건인 열 정탐꾼의 과오로 인해서 40년을 광야에서 뱅글뱅글 돌게 되었죠.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너희는 그것을 매달아서 기억해라 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이러한 점들에 기초하여서 몇 가지 영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옛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자신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한 목소리로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너희의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하고 본문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걸쳐서 되풀이 합니다. 내가 다른 것 때문에 너희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건져내었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고통의 애굽 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셨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밖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보내셔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애굽에서 고통받는 것 처럼 죄로 인해 고통받던 우리를 구원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었다면 당시의 이스라엘도 지금의 우리도 고통가운데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원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게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두번 째,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삶으로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이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시 근동에서 먹던 음식과는 다른 음식을 먹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옷 장식을 달게 하셨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이 에수님을 보고 바로 유대인임을 알아 챌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옷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다른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옛날 이스라엘 처럼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옷술도 달라는 이야기도 또 세상과 동떨어져가지고 마치 무슨 속세를 벗어난 도사처럼 살라는 것이 아닌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모습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들과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따라서 사는 것, 말씀 생활과 기도로 경건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구별된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에 오려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 만큼 사람들을 전도해서 데리고 오는 것도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과 다른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뉴스에 나오고 하면서인 것도 있고 주변에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을 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아는 분이 자기 직장에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고 새벽예배도 나가고 뭣도 하고 뭐도 한다 이렇게 했는데 그분이 자꾸 남 이간질하고 말을 잘못 옮기고 하다가 문제 일으키고 직장을 나갔는데 나중에도 직장에다가 민원을 넣었다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 다른 크리스쳔이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니 제 일이 아닌데도 부끄러워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가 더 이상 특별한 곳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보이기를 이 험한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처럼 보이지 않고 다른 흔한 배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교회는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갈아 타아야 할 방주의 모습을 갖고 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구별된 삶으로 요구하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입니다. 구약의 음식법이나 옷감이나 성막이나 제사장의 옷, 옷술 같은 것은 일종의 멀티미디어 교재 혹은 시청각 교육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직 충만하게 주어지지 않은 오경의 시대, 즉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충분히 영적인 통찰을 갖추지 못한 시대에 하나님은 이런 시각적이고 외형적인 규례들을 통해서 이들에게 좀 더 본질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깨닫게 해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중요하다는 점은 오늘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본문 39-40절을 다시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여기서 너희가 그것을 보고 즉 외형적인 기억 보조 장치인 옷술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그 계명들을 “준행”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처럼 “음란하게 따르도록 만드는 너희의 마음과 너희의 눈을 방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옷술에 대한 규례의 진짜 강조점은 외형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바로 내면적인 구별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외형과 내면 사이에 진짜 본질이 무엇인지를 놓쳐 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 장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그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진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내면적 본질을 갖추는데 신경 쓰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모습에만 치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외형과 내면 사이의 이런 관계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2:28-29 에서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이면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유대인인 사람이 유대인이고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적 표시인 할례는 원래 마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 할례는 마음에 할례 받은 것에 대한 외형적인 표시일 뿐입니다. 마음에 할례 없이 육신만 할례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 신부가 되는 성도는 베드로전서 3:1-5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물론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원래는 당시의 믿는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참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이보다 더 적절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는 “외모”가 아닌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사신 특별한 백성입니다. 특별한 백성은 세상과 구분되는 특별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별되는 특별한 모습은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옷술과 할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옷술을 단다고 해서 그것이 마음이 먼저가 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장식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면의 옷술은 결국엔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밖으로 드러난 우리의 옷술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무언가 다르다. 교회란 어떤 곳일까? 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갖춤으로써 세상에서 방황하지 않고 천국 가는 길까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적용 찬양 :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며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상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내면의 옷술을 달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삶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