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3 설교
Notes
Transcript
사랑이 모든 것을 이룬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룬다
여러분! 오늘 이 캠프 마지막날에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다들 어제 좀 쉬었나요? 뭐 항상 캠프의 시간이 그렇지만, 아마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느라 많이 피곤한 친구들이 대부분일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몸을 좀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기지개도 좀 피고, 졸려보이는 친구 안마도 좀 해주고, 몸을 좀 푼 후에 조금 개운해진 상태에서 함께 말씀을 들어봅시다.
다들 좀 괜찮아졌나요? 말씀 들을 준비 되었나요? 네 그럼 함께 말씀을 나누어 봅시다.
우리가 이번 캠프때 나눈 말씀이 어디 말씀이었죠? 그렇죠 로마서 말씀이었어요. 우리가 이번 캠프를 통해 필사도 하고, 또 열심히 읽기도 했고, 이틀간 말씀을 듣기도 했어요.
아마 다들 로마서가 이제는 많이들 익숙해졌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았던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나요?
복음에 대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에 대해서 바울이 열심히 설명을 했다는 것을 다들 잘 이해하고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 부분을 넘어서서 바울은 또 어떤 이야기를 하냐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양하게 이야기를 해주는데요, 12장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서로 화목하고 우애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구요, 13장에서는 사회 공동체의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회 정치와 제도에도 복종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전하죠.
그리고 14장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음식문제와 같은 교회 안에서 생길 수 있는 분쟁들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 행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죠.
이어서는 15장에서는 이웃과 함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를 이야기하고 이어지는 16장에서 문안하며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로마서는 크게 복음의 내용에 대한 첫번째 파트와, 성도의 삶에 대한 두번째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러프하게 이야기할 때, 첫번째 파트의 핵심 구절을 찾자면 로마서 일장 십칠절의 구절을 이야기하듯이, 두번째 파트 역시도 핵심 구절을 찾을 수가 있는데요, 그 부분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본문이 결국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성도의 삶의 기본이 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물론 바울이 여러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내용들도 보면서 알아야겠지만, 그것을 위해 먼저 이 본문을 함께 살펴보는 것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캠프의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죠. 이 시간들이 끝나면 다시 또 이전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보고 느꼈던 것들을 실천해야 할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이 아마 큰 유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함께 집중하면서 과연 성도의 삶에서 무엇이 핵심이 되는 것일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바울은 오늘 말씀 8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뭐라고 하죠?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죠.
자. 빚을 진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보통 계약서 같은 것들을 쓰게 되면, 계약서에 꼭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갑’과 ‘을’ 이죠.
물론 이 표현은 그저 A,B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계약 체결 대상자들을 표현한 것일 뿐이지만, 보통 계약서에서 갑은 계약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표현되고, 을은 계약에 끌려가는 사람들로 표현이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보통 사회에서 갑은 강한 사람, 을은 약한 사람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빚을 지게 되면 서로 어떤 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거에요? 갑을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에 의해서, 혹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상하관계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서 상하관계는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공동체에서 상하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겠죠.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 의도가 어떠했는지와는 상관하지 않으시고 공동체 서로를 향해 빚을 지도록 하는 것을 하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외로 두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뭐죠?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의 빚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빚을 진다라는 것은, 보통 돈이나 어떤 물건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사랑의 빚은 어떤 것을 내어주는 것일까요? 그렇죠. 사랑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눔인 것이죠.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 사람은 우리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랑의 빚이 일반 빚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빚은 앞서 말했듯이 돈이나 물건이 오갑니다. 그러면 빚을 주는 사람은 무엇을 보고 빌려주는 것일까요? 사람을 보고 그런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경우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엇이겠어요. 바로 돌아오게 될 돈과 물건을 바라보고 주는 것입니다. 이자의 개념도 순전히 그러한 것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장치이겠죠.
하지만 사랑의 빚은 어떨까요? 저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어서 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닐 거에요. 그저 그 사람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넘쳐나서 사랑을 내어주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일반 빚은 상하관계를 만들고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사랑의 빚은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사랑의 빚만을 제외하고 모든 빚을 짓지 말라고 한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추가적으로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이죠.
율법은 뭘 이야기하죠? 크게 말하면 구약의 말씀이고, 작게 이야기하면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들을 이야기하겠죠.
그리고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9절에 등장하는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다들 한번씩은 들어보았을거에요. 특히 어린 시절부터 주일학교생활을 한 친구들은 십계명을 어릴때부터 듣고 해서 아마 외우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듣고 알고 있는 십계명의 말씀인데, 혹시 다들 100% 잘 지키고 계시나요? 아마 그렇지는 못할거에요. 저 조차도 그러니까요.
그것은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씀 한구절을 가져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말씀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로 알려져있는 구절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게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공개적으로 저렇게 말할 정도니까 아마 정말로 철저히 계명들을 잘 지켰을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니 근심하면서 떠나가죠.
어찌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보다도 나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굳이 소유를 팔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십계명, 다시 말하자면 율법에 담긴 참뜻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담긴 참뜻은 무엇일까요? 당장 십계명을 보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누구와 누구 사이에 대한 계명이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러면 5계명부터 10계명은 어떤 관게인가요? 바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십계명의 핵심을 정리해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결국 율법의 계명은 사랑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부자청년에게 ‘너가 그렇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진것을 이웃 사랑에 사용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었겠죠.
그런데 왜 부자청년은 그것을 이뤄내지 못했을까요? 진정한 사랑이 없었던 것이죠.
사실 신약시대 예수님과 자주 분쟁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율법에 대해서 정말 전문가인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알고, 또한 지키려고 애썼냐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부 조항까지 만들어서 지켰을 정도였어요.
예를 들자면,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일을 하지 말아야겠죠. 그러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일하는 것이냐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성소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거리를 계산해서 그 이상의 행동을 하는 것을 일로써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성소의 자리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니까 일이 아니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더 한다면 일을 한다라고 여긴 것이죠.
이런 식으로 모든 계명에 세부 조항을 넣어서 정말 철저히 말씀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들은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부딪치고 예수님께 혼나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표면적인 말씀만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지, 말씀 안에 담긴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의식적으로 행동만 좇아서 할려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진정한 율법의 실천은 뭐라는거에요? 오늘 말씀 9절 뒤편에 나오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다면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라는 거에요.
자 그러면 우리 생각해봅시다. 아니 율법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하고 좋은거면, 바울이 맨 처음에 이 말씀을 넣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왜 굳이 뭐 어려운 이야기를 계속 하다가 뒷편에 실제적인 내용을 넣은 것일까요? 무슨 이스터에그도 아니고 말이죠.
자. 바울이 이 말씀을 지금 한 것은요, 우리가 이제야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원래는 우리가 실천을 못한다는 이야기겠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래 잘 실천할 수 있었다면, 인간이 그렇게 전쟁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고 하지는 않았겠죠.
그러면 왜 실천을 못했던 것일까요? 바로 우리 안에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우리 안에 죄가 가득하니까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틀동안 보았듯이, 그 사랑을 누가 주신거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죠. 스스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도 의롭게 되었고, 그렇기에 우리도 사랑을 이제는 실천할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러니 바울도 이 말씀을 두번째 파트로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말한 것이죠.
이제 너희가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0절을 볼까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보았던 율법의 계명, 그리고 바울이 말하고 또 이야기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등장하는 삶의 예배, 영적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면 13장에서 나오는 사회의 권세에도 복종할 수 있고, 14장에서처럼 형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은 뭐에요.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복음을 통해 사랑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은 당연히 이러한 성도의 행동들을 행할 수 있게 된다라는 거에요.
자 그러면 우리 모습을 한번 볼까요? 우리는 구원 받았으니까 당연히 이웃사랑 해야죠? 어떻게, 잘 하고 있나요?
그렇죠. 사실은 여기서 괴리감이 생깁니다. 분명 나는 믿음이 있어요. 복음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삶은 뭔가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매번 캠프만 봐도 어때요. 항상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찾지만, 돌아서서 삶으로 나가면, 게임하면서 욕하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 안에 있잖아요.
이런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아직 부족해서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분명히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해졌고, 재림의 때에 구원을 받을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속까지도 바로 완벽하게 변화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칭의라는 것이 뭐에요. 안 의로운데 의롭다고 그냥 해준 것이잖아요. 우리의 속은 아직도 인간적인 모습이 남아있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 인간적인 유혹으로 죄를 짓는 모습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뭐가 달라진건가요?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죠. 그게 뭐냐,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살았던 때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어요? 그냥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죠. 내가 좋으면 좋은거에요.
하지만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그러한 모습들이 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를 붙잡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주십니다.
그렇기에 이전과 달리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빠져 죽을 수는 없는거에요.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죄 많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힘들지도 몰라요. 아직 우리 안에 죄로 인한 유혹이 찾아오는데, 성령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우리로서는 참 힘든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하나님을 믿으며 열심히 싸워내고 견디면서 이겨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이전보다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주시고, 결국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는 우리의 모습이 완벽한 의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하신 성도들의 삶은 인내의 연속이지만, 그 인내를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죠.
이제 여러분들의 앞에도 그러한 삶의 모습이 놓여 있습니다. 아마 이전과 동일하게 힘들 거에요. 하나님은 현재의 직접적인 복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기서 막 울고불고 했다고 해서 지금 밖으로 나가면 하는 것마다 잘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겟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의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실 거에요.
그 사랑으로 부어진 여러분들이라면, 오늘 이자리에서 느꼈던 그 사랑을 여러분들이 나아갈 모든 삶의 자리에서 나누어줄 수 있을 거에요.
여러분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어주는 것이죠. 사랑이 흘러넘쳐서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도 사랑이 전해지는 거에요.
경제학 용어중에 낙수효과라는게 있죠. 어느 한 곳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해주면, 그 곳이 성장해서 다른 곳들에게까지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이 자리에서, 이박삼일의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부어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각자의 삶으로 나아가서 그 사랑을 실천하여 말씀을 따르고, 그 사랑이 전달되어 다른 이들도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라나갈 수 있는 그러한 복음의 역사가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할게요. 예수가 보이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사랑이 전달되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