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일하심

다시보는 룻기 시리즈⑪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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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4:11-22
지난 3개월이 넘게 룻기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이 룻기 강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다시 만나주시길 참 많이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설교를 준비했었습니다. 이제 이 시리즈도 오늘로써 마지막 시간이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살펴본 ‘룻기’의 초점은 딱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일하심”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가장 엘리멜렉의 판단 착오로 궤도 이탈한 한 가정이 몰락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비참한 실패의 자리에서, 실패한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이것이 저에게는 전율이 될 정도로 감동이 되고 또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인 ‘헤세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헤세드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낭떠러지 앞까지 몰려 있던 이방 여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떠났던 여인 나오미가 다시 영안이 열리면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만나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계보를 통해 태어나시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위기는 지나가고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보아스가 장로들과 증인들에게 자신이 온전하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한 이후, 그 선언을 들은 장로들과 백성들의 즐거워하는 반응이 11절과 12절의 내용입니다. 11-12절 합독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장로들은 보아스의 선언을 즐거워하며 자신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아스가 결혼하게 될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가 된 라헬과 레아와 같은 존귀한 어머니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보아스가 에브랏과 베들레헴에서 더 유력하고 유명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 마지막 셋째는 보아스와 룻 사이에 상속자가 태어나서 유다의 끊어졌던 가문이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통해 다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엘리멜렉의 가문이 이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엘리멜렉 집안에 대한 기업 무르는 것에 충실했던 룻과 보아스, 그리고 그 결과로 회복될 엘리멜렉 가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4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1장에 있었던 가족의 죽음, 외로움과 고독, 흉년과 헤어짐 같은 암울한 분위기와 달리, 답이 없을 것만 같았던 상황들이 봄 햇살에 눈이 녹듯 그렇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는 복의 날이 임한 것이죠. 13절은 그러한 밝은 이미지의 정점에 있습니다. 13절 합독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와 룻이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 사이에 거하시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것 아닙니까? 그토록 원하던 상속자를 주신 거죠. 보아스는 이미 늙은 사람이었고, 이방 여인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었던 룻은 감히 재혼은 꿈도 못 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안 된다는 상황을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상속자를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룻의 가족들은 계속되는 죽음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생명이 태어나는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자녀의 사망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오미, 남편의 죽음과 재혼은 꿈도 못 꾸었을 이 여인들의 통곡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남편을 얻고 아기가 태어나는 생명의 이야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슬픔과 기쁨, 죽음과 생명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빵집인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만난 생명의 빵인 보아스,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배고픔을 겪는 이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그 회복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찾아 나섰지만,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할머니가 된 나오미의 감격스러워하는 반응이나 엄마 룻 아니면 보아스의 반응이 궁금하잖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14절부터 그런 가족의 반응은 전혀 나오지 않고, 뜬금없이 베들레헴 여인들의 합창이 나옵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14-17절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6절에도 나오미가 그 태어난 아기를 받아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다고 증거 한 후에 “그의 이웃 여인들이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라는 조금은 황당한 결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룻이 드디어 아들을 낳았어요. 이건 이 집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죠. 룻도 나오미도 보아스도 이 아들로 인해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반응은 전혀 나오지 않고, 갑자기 베들레헴 여인들의 노래로 <룻기> 마지막이 채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 태어난 아들, 즉 상속자의 이름을 누가 지어 주었나요? 17절을 보세요.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이 귀하고 귀한 아들의 이름을, 베들레헴 여인들이 지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여인들은 누구기에, 이 귀한 룻의 아들 이름을 그들이 짓는 것일까요? 만일 단순하게 감동적인 이야기로만 <룻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면, 이 책은 나오미의 노래나 룻의 노래로 끝나면 됩니다. 한 많았던 시어머니 나오미가 손자를 안고 노래를 부르거나 룻이 아이를 젖 먹이며 노래를 부른다면 우리는 행복한 그림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감동적인 결론보다 더 깊은 이야기, 한 여인의 해피엔딩 인생을 넘어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1장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세요.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반기며 “네가 나오미가 아니냐?”(1:19)라고 물었던 이들이 바로 4장에서 룻의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준 바로 그 여인들입니다. 잘살아 보겠다고 고향을 버리고 이민을 가버린 나오미에게 “너는 죄인이야!”라고 외쳤던 이 여인들의 말이 오늘날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4장에서 재등장하는 여인들도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이들도 똑같이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공동체로 1장을 시작했던 말씀이 4장도 공동체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4장의 교회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빵이 돌아온 빵집,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교회 공동체 안에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 것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문 앞에 있던 장로들의 세 가지 축복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축복은 회복된 공동체가 주는 축복이기 때문이죠. 베들레헴 여인들의 축복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역시나 생명이 넘치는 베들레헴 공동체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룻기>는 아주 작은 자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텅 빈 나오미의 인생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이들의 회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들의 회복과 채움은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 때부터 아닙니까? 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회복된 빵집 공동체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 모든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를 전후로 교회를 떠난 분들을 두고 어떤 마음들이신가요? 벌써 몇몇 분들 안타깝게 교회를 떠난 분들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그분들이 다른 교회에 등록하셔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면 다행이지만, 그냥 교회를 안 나오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9개월 동안 사역지 없이 쉬어 봤지만, 처음에는 주일날 한가하게 보내는 게 되게 편하더라고요? 그런데 불과 1달도 채 안 되어서 ‘교회를 이렇게 쉬면 안 되는데’ ‘주일을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하면서 불편한 마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처럼 교회를 쉬게 되면 몸이 좀 편할 수는 있지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분들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떠난 분들에게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 있고, 이제 다시 나오려니 나오미처럼 부끄러울 뿐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분들이라면 교회 밖에서 행복할 조건을 찾는다는 것은 제 경험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날 수도 있고, 잠시 방학 중일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속 편하고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하시는데, 행복해 보이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 개혁자 칼뱅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은 자다”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부였던 키프리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공통점은 교회와 구원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실망스럽고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가나안 성도가 되어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 짧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참된 만족과 행복은 교회 밖에서 얻기란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는 온전한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어서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오미와 룻이라는 두 여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 텅 빈 인생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충만은요. ‘생명의 빵으로 채워진, 생명 공동체인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아마 주변에 “여전히 상한 마음 때문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힘들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또 말씀드립니다. 조금 모자라고 또 조금 불편해도, 그분들이 다시 힘을 내서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애써 주십시오.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생명의 떡을 나누는 교제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 하름교회 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실족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텅 빈 가슴을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이야기가 16절에 나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았고, 룻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를 엄마가 아닌 할머니 나오미가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는 나오미에게 여인들이, “네 손자의 이름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로 오벳이라고 하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왜 이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이런 축복을 하는 걸까요? 역시 1장에서 텅 빈 사람이 나오미였기에, 4장에서 가득 찬 사람도 나오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오미가 기쁨의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다윗의 조상을 양육하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간 것 아닙니까?
<룻기>는 나오미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와 그 비참한 나오미가 ‘빵집에 빵이 돌아왔다’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나오미의 선택이 얼마나 복된 선택이었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면서 끝이 납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읽기만 해도 해피엔딩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문장은요. 내용상으로 볼 때, 정확하게 1장 5절과 대칭을 이룹니다. 1장 5절을 찾아보시죠(화면).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이 죽었을 때, 나오미는 세 남자를 모두 가슴에 묻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는 그 순간에 아들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다 죽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남겨져 어둠 속에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슬픔이 바뀌게 되었어요.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품에 ‘아기’를 안겨 준 것입니다. 차갑게 식어 있던 나오미의 품에 뜨거운 생명을 가진 아기가 안겨진 것입니다. 이전에 차츰 식어 갔던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의 심장이 아닌, 식어 버린 자신의 심장을 다시 두근거리게 만드는 ‘작은 생명’ 오벳을 안고 기뻐하며 감사의 찬양을 부르는 나오미를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을 ‘쓴 물’이라고 불렀던 마라가 아니라, 그의 원래 이름이었던 나오미 즉 ‘기쁨’이라는 이름을 회복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아들을 키우던 여인은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아들을 청년이 되기까지 지극정성으로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외아들이 그만 죽었습니다. 사연이 기구했는지 나인성 사람들이 아들의 장례식에 함께했습니다. 사람들이 수많은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말은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전혀 위로가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아들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눅7:15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은 아들을 살려서 그 여인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홀로 된 여인의 아들을 살리시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다시 그녀의 품에 돌려주기 위함이죠.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들밖에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와 누가복음의 아들을 잃은 홀로 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이 한 개인의 삶을 회복시키실 때는요. 그 사람의 고통의 주변만 만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로만 “너 참 불쌍하다”라고 하시는 분도 아니고, 흔히 사람들이 하듯이 조의금을 전달하고 급히 돌아서 가버리는 분도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고통과 슬픔의 중심을 만지시고, 아픔을 치료해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아들을 잃고 우는 엄마에게 아들을 살려 안겨 주시는 가장 큰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텅 빈 나오미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그녀는 많은 기대를 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디 마음 둘 곳도 없으나 죽더라도 ‘고향 땅에 묻히자’라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미는 생명을 다시 품에 안게 되는 놀라운 회복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가장 큰 텅 빈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주어야만 그 텅 빈 것이 채워질 수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텅 빈 자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우신 것입니다. 바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찬양이 되게 하신 거죠. 그리고 이 룻기의 마지막은 하나의 족보를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지막으로 17-22절 합독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여러분, 족보를 세세하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태어난 이 오벳이 이후에 나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의 할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더 확대하면, 이 오벳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룻기>의 시대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아닙니까? 온통 혼동과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그 모든 혼란의 이유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작은 동네 베들레헴의 늙은 여인인 나오미의 품에 이 시대를 살려낼 생명의 씨앗이 안겨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요?
<룻기>의 마지막에 있는 이 족보는, 베들레헴에 있었던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였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압 땅으로의 이민했죠.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봤죠. 며느리 룻과 돌아온 베들레헴의 이야기가 있고요. 보리 추수 때의 들판과 타작마당에서의 긴박했던 대화들, 그리고 룻과 보아스의 결혼 등. 물론 작은 시골 마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위대한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혼란을 끝낼 위대한 왕과 연결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더 길게는 이 작은 이야기가 ‘세상을 죄로부터 건져낼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과연 인생이라는 전체 그림을 다 볼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오긴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우리 앞에 있는 작은 것만 보면서 계속 그 작은 것들 때문에 울고 웃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이나 순종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내 눈앞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오는 만큼 하면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작은 열심과 사랑을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는데, 때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게 사용해 주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룻을 향해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헤세드가 있었고, 어머니와 죽어도 함께하겠다는 며느리 룻의 헤세드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룻의 헤세드를 본 보아스가 베푼 헤세드도 있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에게 당당히 나아가 기업 무를 것을 요구하는 도전은 말씀에 대한 룻의 용기 있는 도전이었죠. 또 이를 당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손해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보아스의 헌신과 용기도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작은 이야기들 아닙니까? 그 모세나 다윗 같은 영웅이나 여호수아 군대와 같은 엄청난 전투도 없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 같은 것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조그만 사랑과 헌신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모든 이야기가 크고,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 <룻기>의 소소한 이야기가 바로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라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을 함께 행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홍해를 가르거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큰 기적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가대로 섬기시는 분들, 다음세대를 가르치시는 교사 여러분, 더운 날씨에 주차장에서 안내위원으로, 재정부실에서 애쓰시는 분들, 또 제단장식으로 섬기시는 분들, 때마다 주방에서 남몰래 묵묵히 봉사하시는 교우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수많은 봉사 중의 하나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던 나오미와 룻을 주목했던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직장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떨 때는 부끄러울 때도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밝히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잘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조그만 순종들 하나하나를 묶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프고 저렇게 아픈 분들 계십니까? 이런저런 말 못 할 어려움과 고민으로 잠을 못 주무십니까? 나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나고 여러 상황이, 또 장래의 일들이 두렵기만 하십니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것 같고, 그분이 내 사정을 모르시는 것 같은 실망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말씀을 의지하여 나오미가 그랬던 것처럼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나오미처럼 찬양과 기쁨이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빵집에 빵이 돌아오다”라는 주제로 시작했던 <룻기>를 마치려 합니다. 이 시대의 비참함과 고통들, 그리고 그 고통의 중심에 있는 영적인 기근에서 시작한 이 말씀은, 결국 이 거대한 기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것이 아닌 우리 삶 속에서 찾아온 보아스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의 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주님과 대화하고 부딪히다 보니 어느새 그분이 이 텅 빈 이야기들을 가득 찬 이야기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저와 같은 은혜가 있으셨길 바랍니다.
여전히 우리는 텅 빈 공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이 땅의 교회는 슬픈 신음을 내야 하는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건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꿈을 꾸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오셔서 손을 펼치시면 나오미처럼 우리 역시 새 생명 주심을 기뻐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과 순종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반드시 확인할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와 함께 아름답게 여러분들의 삶을 채워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이 찬양을 가사를 생각하며 함께 부르겠습니다.
❙찬양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시겠는데요. 여러분과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소소한 삶에도 누군가로부터 연결되는 헤세드의 사랑이 있고, 그로 인해 회복되고 다시 헌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누군가에게 룻이 될 수 있고, 나오미가 될 수도 있고, 보아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작은 순종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래 살아오신 분들도 계실 테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보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겪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또 장래 일이 두려운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나오미의 족보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소소한 삶이지만, 신실하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함께 한목소리로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이 삶의 작은 어려움이 왔을 때 <룻기>를 다시 읽게 하시고,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전하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텅 빈 가슴으로 빵집 공동체에 돌아온 나오미를 룻과 보아스를 통해,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체들을 통해 회복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면서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예루살렘 빵집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얼마나 컸는지요?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사명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하름교회와 한국 교회들 안에 나타나게 하시고, 지속되게 하셔서 이 시대에 또 다른 룻과 보아스, 나오미들이 복음을 살아내게 하시고, 또 거룩한 빵집 공동체로서 잠들어 있던 영혼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모두 이 공동체로 돌아와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역사, 믿음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이런저런 말 못 할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교우들이 계신다면, 주여, 저들을 찾아가 주시고 삶의 노고를 위로해 주셔서 나오미처럼 찬양과 기쁨이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룻기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나오미이며, 룻이며, 보아스가 되어 빵집 공동체의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가기를 소망하는 우리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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