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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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벽을 넘을 용기

담을 넘으려면 용기가 많이 필요합니다. 요즘 학교에는 담벼락 위에 높게 초록 팬스가 많이 쳐져 있어서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초록팬스가 없었습니다. 그게 없으면 학생들이 잘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담을 넘었다가는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줄빠따였기 때문입니다. 저 담을 넘으려면, 다음날 선생님께 혼나고 빠따맞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넘다가 걸리면 더 큰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담을 넘을 때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담을 한번 넘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수업 다 마치고 선생님들이 다 귀가하고 난 뒤에 혼자 조용히 ‘아 이런 기분이구나’하며 넘어봤습니다. 겁이 많아서 감히 수업 중에는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혼나니까요. 혼나면 아프니 싫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장벽을 넘으려고 할때 그냥 넘을 수 없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게 내 안에 있는 신념이나 관습이라면 그것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장벽을 뛰어넘는데 목숨이 걸려 있다면 더더욱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놓인 현실의 벽을 뛰어넘은 사람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곤레료와 베드로입니다.

본론

1) 목숨이 걸린 상황을 뛰어넘은 고넬료

이스라엘에 ‘가이사랴’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의 왕 헤롯이 로마군대가 이스라엘로 편하게 들어올수 있도록 만든 인공 항구이자, 행정수도였습니다. 그 당시 이곳에는 로마군인이 1000명이나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곳에 살았던 고넬료는 로마 친위대 간부로서 오늘로 치면 대위 정도 계급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은 군인 간부들을 심심찮게 많이 볼 수 있지만 AD.1세기였던 그 당시는 군간부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고넬료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그에게 욥바란 곳에 있는 베드로를 집으로 초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종들과 함께 그 곳에 도착해서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한 답을 듣고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고넬료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이지만, 제자들이 활동하던 AD1세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로마 사람들이나 로마제국의 식민지 사람들은 더 힘듭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나라의 국교로 삼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종교만을 갖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며 거기에 더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따른다면 그 사람을 반역자로 여겨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의 밥이 되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황제가 아닌 예수님만을 유일하신 주님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을 고넬료가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집에 배신자가 있어서 그의 상관에게 이 일을 알린다면 고넬료와 그 곳에 모인 가족들, 동료들은 처형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넬료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의 목숨이나 지위보다 귀하게 여겼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 그러자 그에게 성령이 임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찾아오 지금 얻은 재상이나 권력보다 더 귀한것이 무엇인지 물어본 것입니. 고넬료는 그에게 닥칠 어려움을 감수하고 이토록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벽을 뛰어넘자 예수님이라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일은 고넬료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일어났습니다.

2) 편견의 벽을 뛰어넘은 베드로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욥바라고 하는 지역에 있던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항아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동물들과 먹어서는 안되는 동물들이 섞여 들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코셔’라 해서 ‘하나님께서 부정하니 먹지말라고 금지하신 음식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지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여겨서 철저하게 지킵니다. 지금도 이를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에 굉장히 예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과거 율법에 얽매여 있는 베드로에게 항아리 안에 담긴 동물들을 보여 주시며 ‘이것들을 잡아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저는 지금까지 속되고 더러운 것을 먹어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앞으로도 자신은 그런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죠.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너가 더럽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며 이 환상을 세번이나 거듭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번이라는 숫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숫자입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께 당신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고 세번이나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되물으시며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번이라는 숫자는 회복과 변화를 의미합니다.하나님은 오늘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자 세번이나 부정한 음식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먹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있고난 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찰나 마침 자신을 찾아온 고넬료의 부하들을 만나게 되었고 고넬료의 집에 초청받아서 고넬료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해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지 말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따라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와 다른 열한 제자들에게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배로 들어가는 것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즉 죄를 통해 부정해진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Mark 7:16–19 NKRV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긴 유대인 제자들에게 있어서 파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유대인 대부분은 자신들만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다른 이방인들은 부정한 자들이라는 잘못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구원받지 못할 더러운 존재들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사람을 그들의 겉모습이나 출신만으로 부정하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도 그 말씀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그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서 들어간 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그러자 고넬료와 그의 온 가정,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보며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자들임을 깨닫게 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고넬료의 집에 몇일 더 머무르며 그와 교제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면, 그는 당연히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이런 일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그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의 범위를 넓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갖고 있는 고정관념들을 깨기 원하십니다. 특별히 사랑에 관해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Matthew 22:37–40 N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또한 그분은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향한 구제와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Acts 2:41–42 NKRV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스스로 기준과 벽을 만들고 거기에 부합한 사람만, 내 마음에 맞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한다면, 심지어 그냥 그 자체가 마음에 안든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옛날의 율법에 머물러서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과거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처럼, 예수님에 대해 몰랐을 때처럼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 다를 것 없이 사랑에 제한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cts 10:15 (NKRV)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깨끗하다고 지은 것을 너가 더럽다고 여기지 말라’ 내가 귀하게 여긴 존재를 너가 꺼려하지 말라,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너가 미워하지 말라,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숨값을 지불하시고 사랑한 형제를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또는 얼마나 우리가 마음을 기울이며 사랑하고자 노력합니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어 사랑하기 원합니다. 부끄러움의 벽, 쑥스러움의 벽, 미움의 벽, 무시의 벽을 깨뜨리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던 원수의 벽을 깨뜨리시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다시 친해질 수 없는 원수같은 사이였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분리의 벽을 허무시고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eph2:13-16
Ephesians 2:13–16 NKRV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평하게 하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만 마음에 평화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평화를 전하길 원하십니다.
eph2:17
Ephesians 2:17 NKRV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우리안에 좁아진 사랑의 범위를 넓히기 원합니다. 사랑할 만 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내 맘에 안드는 행동을 한다 해도 7번에 7번을 곱해서 용서할 수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편함과 불만을 몸소 기꺼이 아무말 없이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고자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주변을 돌아봅시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오른쪽입니까? 왼쪽입니까? 앞입니까 뒤입니까? 그곳이 여러분이 사랑해야 할 곳입니다.

벽을 뛰어넘자!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는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지위와 명예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겪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어떤 것보다더 예수님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뛰어넘는 사랑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아직 마음에 확신이 없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고대문헌보다 사본이 많이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고대 역사서를 믿지만 그것들의 복사본은 100개 채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런 복사본도 저술되었던 시기보다 적게는 100년 많게는 500년 1000년이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10000권도 더 되는 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록도 100년 안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보다 더 정확한 고대문헌은 없습니다. 글쓰는 것이 그리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왜 이런 글을 남기려고 했을까요? 그토록 비싼 돈을 들여가며, 복사기도 없던 시절 손으로 그 글을 일일이 옮기는 수고를 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 어떻게 그리 당당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 분의 12제자의 삶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들은 전부 편하게 죽지 않았습니다. 목이 베이거나, 낭떨어지에서 떨어지거나,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비참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그 순간에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2제자 이후에 그들의 제자들도, 그리고 그 이후 수 많은 사람들도, 그리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 죽은 많은 선교사님들과 신앙의 선배님들도 자신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게된 구원을 역사적 사실이며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천문학적인 돈보다 그리고 그 돈보다 더 가치있는 목숨보다 예수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단지 이 성경을, 그리고 예수님을 도덕적인 책, 도덕적인 인물, 성자 그 정도로만 보고 있습니까?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고넬료와 같이 자신의 목숨보다 어떤 지위보다 귀한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귀하신 분입니다.

적용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베드로를 봅시다. 우리 사랑에 편견을 가지지 맙시다. 기준을 세우고, 벽을 세우지 맙시다. 우리 사랑에 범위를 넓혀 내가 사랑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사랑합시다. 말과 기도만이 아니라 행합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말로는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못하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를 자꾸만 가두려하고 이기적이게 만들고, 낯가리게 만들고, 움추려들게 만드는 마음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한발짝 내딛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손을 들어 친구들을 향해 흔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할 수 있다면 선팔도 해봅시다. 사랑을 넓힙시다. 분열과 갈등의 벽을 허무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이 우리의 구주로 계십니다. 그분께서 먼저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우리가 됩시다.
내일부터 이제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알아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베푸신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하는지, 특별히 우리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실천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우리의 교회와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갑시다. 함께 가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 기도하고 찬양합시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을 뛰어넘기 원합니다. 고넬료와 같이 예수님을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분으로 믿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상황을 뛰어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을 우리 인생의 구원자로 믿게 해주십시오.
또한 베드로와 같이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의 이웃에게, 내가 정말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사랑이 부족합니다. 믿음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도와주시옵소서. 고정관념의 벽을, 외면과 이기심의 벽을 뛰어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벽을 뛰어넘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벽을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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